1. 서론
살을 에이고 저미는듯 하던 율렬하던 겨울 바람도 이제는 부드럽고 온화한 봄바람이 불어온다.북향 그늘에 굳게 쌓인 적설도 소리없이 다 사라져 없어져 간다. 엄한의 위세에 압복을 받아 죽은 듯이 업드렸던 잔디는 속 잎 내고 버들가지 눈을 뜬다...인생인들 슬픔에,고통에서 쾌락에,눌림에서 자유에 기쁜 때가 이르지 아니할가 보냐?
그리스도의 사랑과 화평의 따뜻한 바람이여,춘풍과 같이 불어 오사 인간의 험음하고 침침한 마음 골짜기에 냉수같이 싸이고 쌓인 질투,시기,음모,침해,압박,학대,쟁투의 돌덤불을 살으고 녹여 버리사 사랑스럽고 화평하며 의롭고 동정많은 행복의 생명수가 면면히 흘러주사 그 물을 마시는 자가 많게 하시며 마시는 자마다 영생케 하소서.
이 글은 평생을 한복을 입되 바지 댓님을 매지 않았고,시계를 30분 늦게 맞추어 살았던 한 민족운동가이자 감리교인이었던 박동완의 외침이다. 이 외침은 1925년 2월에 <신생명>이란 잡지를 통해 들려졌는데 당시(1925년)는 말그대로 우리 민족의 암흑기였고 추운 엄동설한이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조직적인 정치.경제.종교.문화적 탄압으로 민족의 존재 마저 위태해 보이던 그 시대에 겁없이 '봄의 노래'를 부른 이 인물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이었고 당시<신생명>주간이었던 박동완이다.
호는 근곡,말 그대로 '무궁화골'이란 민족주의적 호를 갖고 있던 박동완은 3.1운동이후 한복만을 입으면서 조선이 독립하기까지는 바지 댓님을 매지 않았다. 정확한 시각은 일본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자신의 시계는 항상 30분 늦추어 놓았던 것이다.
2. 생애와 사상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변절하지 않았던 박동완은 1885년 12월 27일 경기도 포천에서 민족의식 강한 박형순의 막내아들로 출생하였다. 위로 형과 누이가 있었던 그는 비교적 여유있는 가정 환경에서 자라 다섯 살 때부터 독선생을 두고 한문을 배웠다.열세 살때는 포천의 명문집 현석운의 딸(현 미리암)과 결혼하였다.
1901년 그의 가족은 서울로 이주,수하동에 정착하였다. 그는 양사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어 관립고등소학교.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영어를 전공하였다. 한성외국어학교가 폐쇠되면서 배재학당 대학부에 전입,비로소 기독교에 접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졸업후.장.감연합으로 발생되던 <기독신보>서기로 근무하면서 언론에 발을 들여 놓았고 정동제일교회 전도사로 목회도 시작하였다. 이무렵 그는 최병헌.손정도.이필주 등 정동제일교회 목사에게 민족주의적 신앙을 전수받았고 언론기관에 있음으로 사회적으로 폭넓은 교제를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 국외 정세에도 누구보다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1차에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공감하여 우리 민족도 독립에의 의지를 세상에 밝혀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3.1운동 참여가 이루어졌다.
1919년 2월 20일경 그는 YMCA간사 박희도를 기독신보사 사무실에서 만나게 되면서 민족독립운동에의 꿈을 실현시키게 된다. 박희도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독립운동 의지와 그때까지 은밀하게 추진되던 독립선언운동에 참요할 의사를 밝혔다. 박희도는 기독교측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책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박동완의 강력한 의지는 이승훈,이필주,함태영 등 지도급 인사들에게 전달되었고 마침내 27일 낮 이필주의 방에서 이루어진 기독교 대표자 서명에 그도 참여하게 되었다. 3월 1일 당일 명월관(현 태화기독교사회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고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후 고통스럽고 지루한 심문과 재판이 이어졌다.
- 경찰심문(1919.3.1)중에서 -
경찰:조선민족의 독립은 어떤 수속을 하려고 했는가?
박동완:별로 수속할 방법 등은 생각한 일이 없고 우리들은 배일(背日)을 하면서도 독립할 생각은 없었다가 단지 정의와 인도를 중히하여 민족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고 특히 구주에서 인종차별을 철폐하라는 것은 구미인의 귀를 기울이게 하고 있으므로 장래에는 백인종과 황인종 문제가 평등한 원칙에서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때는 조선도 독립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검사심문(1919.3.18)에서 -
검 사:피고는 조선독립이 꼭 될 줄로 생각하는가?
박동완:그렇다. 일본과 열국들이 허락할 줄로 생각하고 있다.
검 사:금후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박동완:물론 그렇다.
- 경성지방법원예심(1919.5.2)에서 -
판 사:자결이란 여하한 것인가?
박동완:자결이란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조선이 일본의 정치에서 이탈하여 독립하려고 생각하였다.
- 경성지방법원 항소심(1920.7.23)에서 -
판 사:일한 합병에 관한 감상과 조선독립에 관한 감상은?
박동완:그것은 합병에 반대라고 하기 전에 먼저 조선 민족의 자존.자립의 정신으로써 그를 대하게 되었고 조선독립에는 언제든지 기회와 동기가 있으면 민족적 운동을 하고자 한다.
박동완은 징역 2년을 선고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고 1921년 11월 5일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그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방해공작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언론및 교회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근무하던 <기독신보>주필이 되어 신문 편집을 계속하였고,1924년에는 민족적 신앙인들이 주측이 되어 조직된 조선기독교창문사의 기관지<신생명>의 주간에 취임하였다. 그의 글은 항상 일제의 신경을 거슬르는 것이었고 그만큼 일제의 압력은 가중되었다. 그래서 결국 1925년 한때 교계일에서 손을 떼고 경성공업사란 회사를 차려 운영하기도 하였다.
1927년 2월 당시 국내에 있던 불교.기독교.천도교.사회주의계 민족단체들이 총동원된 새로운 민족운동단체,신간회가 창설되었다. 이때 박동완은 이상재,조만식,유억겸,이갑성,이승훈 등고 함께 기독교계 대표로 신간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그는 상임 간사가 되어 실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1928년 1월에는 당시 만주에 있던 우리 동포들이 중국인 관리와 지주들에게 착취와 방해를 당해,고통을 호소함에 따라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구성했는데 이때 그는 재무부장이 되어 직접 만주를 방문하여 동포 구제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간회의 활동과 그의 존재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일제는 서서히 체포망을 좁혀 왔다. 결국 신간회는 1929년 광주학생사건을 핑계로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만다. 이에 뜻한 대로 국내에서는 민족운동을 전개할 수 없음을 안 박동완은 해외망명을 계획하였다.
당시 하와이에서 목회하면서 민족운동을 벌이던 감리교 목사 민찬호,임두화와 연락을 취하면서 망명을 계획, 마침내 1928년 8월 하와이로 나갈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와히아와(Wahiawa)섬의 한인기독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목사 안수는 하와이에서 받은 것 같다)하여 목회를 하면서 임두화,민찬호 목사등과 손잡고 민족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1931년 하와이 학생모국방문단을 이끌고 잠시 귀국한 적이 있으며 1934년에는 <한인기독교보>를 창간,그 편집을 맡았다. 그는 특히 국내의 흥업구락부와 비밀연락을 취하여 국내 민족운동을 후원하였다. 교회,언론,민족운동의 바쁜 세월을 보내던 중 1941년 초 불의의 병을 얻어 그해 2월23일 이국 땅에서 별세하였다. 당시 국내에 있던 가족,친지들은 그의 유해를 들여와 장례식을 치루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부고조차 내지 못했고 한 달 후 쓸쓸하게 돌아 온 유골은 3.1운동 동지 함태영 목사의 손에 의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시계가 30분 늦었던 것처럼 그의 장례도 한달이나 늦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산 시대가 그의 시대,그의 시간이 아닌 남의 시대.일본제국의 "빼앗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1962.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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