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얻다 - 나희덕
담양이나 평창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서 일할 공간이 필요해서요.
나는 조심스럽게 한옥 쪽은 가리켰고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글씨, 아그들도 아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이씨 집안의 내력도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오.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 계신 저녁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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