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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의 문 - H. G 웰즈

Joyfule 2007. 8. 17. 02:34

    벽의 문       H. G 웰즈

 


  1
  석 달쯤 전 어느 날 밤, 허물없이 얘기하는 자리에서 라이오넬 월러스는 '벽의 문'에 관한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하였다. 나는  그때 그가 이 이야기를 공연히 꾸며 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너무도 솔직담백한 투로 확신에 차?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방에서 잠이 깼을 때는 주위의 분위기가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침대에 누운  채 그가 이야기한 것들을  되돌이켜 보았을 때, 그의  진지하고도 느린 음성이 지닌 매력은 사라진 상태였으며, 갓을 씌운 탁자의 불빛도, 우리를 감싸던 은은한  분위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분좋게 빛나던 것들, 함께  나눈 저녁 식사의 후식이나  유리잔, 식탁보 등 일상의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밝고  작은 세계를 이루던 것이 없어지자, 그가  얘기한 문은 전혀 믿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나를 홀렸던 것이야!" 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감쪽 같은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친구가 그렇게 감쪽같이 꾸며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 걸."
  그리고 나서 나는 침대에 앉아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그의 회고담에 스며 있는 놀랄 만한 현실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의 이야기는 그런 방식으로가  아니면 달리 말할 수  없는 무언가의 경험을 암시하거나 제시하거나 혹은 전달하고자 -글세 어떤 단어를 써야 될지 모르겠지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식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한때 지녔던  의심에서 이제 완전히 벗어났다. 그 이야기를 들을 당시 믿었던 것처럼, 월러스가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자기 비밀의  진실을 보여 주려 했다는 점을 이제는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정말 본 것인지, 아니면 보았
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는  엄청난 특권의 소유자인지, 아니면 환상적 꿈의 희생자인지, 나는 추측해 볼  도리가 없다. 나의 의혹을 영원한 미궁 속으로 빠뜨린 그의 죽음에 관한  여러 사실조차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독자 자신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나의 어떤 우연한 논평이나 비판이 그 친구같이 과묵한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게 만들었는지 지금은 잊었다. 아마 그 당시에 있었던  대대적인 사회운동에서 그가 맡아 하던 역할에  실망한 나머지 내가 그 운동이 느슨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난하자 그 친구가  자신을 옹호하는 중이었던 것 같다. 그가 불쑥 그  이야기를 꺼냈다. "한 가지 내 마음을 사로잡는게 있어."
  얼마 후 그가 말을  이었다. "게을렀다는 것은 나도 인정해. 사실은 말이지, 영혼이나 유령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게 참  말하기 묘한데, 레드먼드, 그러니까 말이야, 나는 홀려 있는 거야. 무언가에 홀려 있단 말이지. 그 때문에 온갖 사물은 광채를 잃고 내 마음은 무언가 열망으로 가득 차 있게 된 거지....."
  그는 잠시 멈추었다.  우리들이 무언가 감동적인 일, 중대한 일,  혹은 아름다운 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할 때 흔히 우리를 압도하곤 하는 그 영국인 특유의 수줍음 때문에 말문이 막혔던 것이다.  "자네도 세인트 앨설스턴 학교를 쭉 다녔지?" 라고  그가 말했는데, 한동안 그 말이 하던  얘기와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말하고 그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무척 머뭇거렸지만 차차 훨씬 수월하게 자기 인생의 숨은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것은 만족시킬  수 없는 가지각색의 동경으로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고, 이 세상의 온갖  흥미거리와 구경거리마저 싱겁고 지루하고 헛된  것으로 보이게 할 정도로 아름다움과 행복이 깃든 회고담이었다.


  이제 그 이야기에 대한 실마리를 잡고 보니 그런 느낌이 그의 얼굴에 분명히 쓰여 있던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의 초연한  표정이 강조되어 나타나 사진 한 장을  갖고 있다. 그 사진을  보면 그를 몹시 사랑했던 한  여인이 그에 대해 한 말이  생각난다. "그이는 갑자기 흥미를 잃어버린 거예요. 상대를 잊은  것이지요. 바로 앞에 있는  사람조차 전혀 거들떠보지 않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항상 흥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일에 주의를  집중하기만 하면 월러스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실제로 그의  생애는 가지가지의 성공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나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내  머리 저 위로 날아올라  나로서는 도저히 따르지 못할  출세의 길을 달렸다. 그는 아직  서른아홉이었다. 그러나 만일 살아만 있었다면 사람들 말대로 그는 관직에 있음은  물론 틀림없이 새로운 내각의 각료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그는  별반 애쓰지 않고도 늘  나보다 앞섰다. 꼭 그렇게 타고난 것 같았다. 우리는 학창시절 거의 대부분을 웨스트켄싱턴에 있는  세인트 앨설스턴 학교에서  같이 보냈다. 입학할  당시만 해도 나와 비슷한 실력이엇지만, 나중에는 눈부신 실력과  훌륭한 성적으로 나보다 월등히 앞서게 된  것이었다. 물론 나 역시 중간 정도의  성적은 올리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벽의 문'에 대해 내가 처음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학교에서였다. 그러니까 그가 세상을 뜨기 불과  한 달 전에 들은 것은 두 번째가 되는 셈이었다.


  이 '벽의  문'은 적어도 그에게는  실재하는 문으로서, 현실의 벽을  지나 영원불멸의 세계이 이르게 하는 그런 문이었다. 그 점에  대해 나는 지금도 상당한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문은 그가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의 어린 아이였을 때 그의 생활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가 천천히 엄숙하게 내게  고백할 때, 그 시기를 신중하게 추정하고 계산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는 진홍색의 담쟁이 덩굴이 있었지. 맑은 햇살이 비추는  하얀 벽을 배경으로 온통 빛나는  진홍색이었어. 어떻게 해서 그런 인상이 들었는지  확실히 기억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런 인상이 남아 있거든. 그리고 초록색  문 바깥, 깨끗한 도로 위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있었어. 그 나뭇잎들은 노랑과 초록으로 알록달록했었지. 갈색이나  거무죽죽한 색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방금 떨어진 잎임에 틀림없었어.  그로 미루어 그때는 시월이었을 거야. 나는 매년 유심히 나뭇잎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틀림없을 거야."
  "그러니까 내 기억이  옳다면 아마 다섯 살하고  넉 달이 되었을 때일거야."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꽤 조숙한 편이었다. 그는 비정상적이라할 만큼 어린 나이에 벌써 말을 배웠으며 나무도 분별이 있고 이른바 '어른티'가 나서 보통 아이들 같으면 일곱이나  여덟 살이 되어서야 얻는 행동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어 있었다. 그가 두 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
후에는 어머니보다는 주의를 덜 기울이고 엄격하지 않은 가정교사 밑에서 자랐다. 부친은 엄격하고  일에 열심인 변호사였는데 그에게 별로 관심을  쏟지는 않았으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명석했으나  이 세상이 따분하고 무미건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는 길을 헤메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주의가 소홀한 틈을 타  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혹은 웨스트켄싱턴의 어떤 길로 갔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기억의 안개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러나  하얀 벽과 초록색 문만은 매우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 어린 시절의 추억에 따르면 그는 그 초록색 문을 처음 본 순간 그 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이상한  감정, 매력, 욕망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 유혹에 빠진다는 것은, 둘 중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으나, 현명하지 않든지 아니면 잘못하는 일일  것이라는 확신을 분명히 가졌다는  것이다. 한편 기억이 틀림없다면 그 문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원하기만  한다면 곧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도 그는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어린 소년이 한편으로는 끌리면서도 한편 주저하는 모습을 눈에 선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지만, 만일 그 문으로 들어가면 아버지가 크게 노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 속에도 분명히 떠올랐다고 한다.
  월러스는 이  망설임의 순간을 대산히  상세하게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그 문 앞을 바로 지나간 다음, 두 손을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잘 나오지도 않는 휘파람을 애써  불면서 벽의 끝을 지나 곧장 걸어갔다.  그는 거기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여러 가게들을 기억해 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토관, 함석판,  수도전, 벽지 견본, 에나멜통  같은 것을 지저분하게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철물점 겸 벽지 가게를 기억해 냈던  것이다. 그는 물건을 구경하는 척했지만,  그 초록색 문이 '탐'?돛만? 그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그때 그는 격정에  휩싸였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주저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그 초록색 문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곧바로 초록색 문을 열고 들어갔으며, 들어서자 문이 곧 쾅하고 닫혀지도록 손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일생에 걸쳐 그를  사로잡곤 하던 그 정원으로 눈깜짝할 사이에 들어갔던 것이다.


  월러스로서는 그가 들어간 정원의 느낌을 남김없이 이야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정원에는 사람을  기뻐 들뜨게 하는 분위기,  다시 말하면 경쾌함, 행운, 유복함의 느낌을 안겨 주는 그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광경에는 색채를 선명하고 완벽하고 정묘하게 반짝이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거기에 들어서는 순간 더할 나위없이 기쁘기만 했다. 이 세상에는 아주 드문, 우리가 어리고 즐거울 때나  느낄 수 있는 그런 기쁨이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월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말이지." 그는 믿을 수 없는  일에 이르러 망설이는 자신 없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거기엔 큰 표범이 두 마리 있었어. 점이 있는 표범이었지. 그래도 나는 무섭지 않았어. 길고  넓은 길이 있었고 길 양쪽가에는 가장자리가  대리석으로 된 화단이 있었지. 그런데 매끄러운 피부의 그 큰  표범 두 마리는 공을 가지고 뛰놀고 있었어.  그중 한 마리가 호기심이 생겼는지 고개를  치켜돌고는 내게 다가왔어. 곧장 내게로 달려와서는 내가 내민  조그마한 손에 그 부드러운 둥근 귀를 조용히 비비며 기분이 좋은지 목에서 가르릉가르릉 소리를 내더군. 그것은  마법의 정원이었어. 그렇고 말고. 크기는  얼만큼이냐고? 아아! 사방 팔방으로 쭉 펼쳐져  있었어. 멀리 저쪽에는 언덕이 있었던 것 같아. 웨스트켄싱턴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모르겠더군.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꼭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어."


  "문이 내 뒤에서 닫힌 그 순간부터 나는  그 길, 나뭇잎이 떨어져있고 마차와 장사꾼의 손수레가  다니던 그 길을 깨끗이 잊어버렸어. 뿐만  아니라 집안의 규율과 복종으로 돌아가도록 끌어당기는 힘도 잊어버렸과,  온갖 종류의 주저와 공포도,  신중함과 이 세상의 일상적 현실도 모조리  잊어버렸단 말이야. 나는 그 순간 매우 즐겁고도 행복에 찬  새 세계에 사는 소년이었지. 그것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어. 햇빛은 더 따뜻했고 깊숙이 스며들면서도 더 부드러웠어. 은은하게 맑은 기쁨이 대기에서 느껴졌고, 푸른 하늘에는 햇빛를 받은  구름이 둥실 떠 있는 그런 세계였어.  그리고 앞에는 나를 환영하듯이 길고  넓은 길이 펼쳐져 있었고, 그 양쪽  가에는 잡초 하나 없는 화단이  있었고 거기에는 들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지.  또 두 마리 큰 표범의 부드러운 털 위에 무서움 없이 내 작은 손을 얹었고 그 동그란 귀와, 귀 바로 아래의 민감한 부분까지 쓰다듬어 주었지. 그리고 표범들과 함께 뛰어 놀았어.  그들은 마치 내가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는 듯 했어. 내 마음엔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 곧 키가 큰 예쁜 소녀가 나타나더니, 얼굴에 미소를 띠고 나를  마중하러 다가와서는 '안녕?'하고 인사를 하더니, 나를  들어올려 키스를 한 다음 내려 놓고는  손을 잡고 길을 인도했어.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어, 다만 그런 것들이 당연하다는 즐거운 느낌, 그 동안  왜 그랬는지 무시해 왔던 행복한 일들이  다시 상기되는 듯한  인상을 받았어. 긴 못처럼  생긴 참제비꽃 사이로 널따란  붉은 계단이 눈에 띄었는데, 우리가 그 계단을 올라가자 울창한  고목 사이로 난 큰 길이 나왔던 것이  기억나. 이 빨갛게 벗겨진 가지의 고목  사이 가로수 길을 따라 대리석으로 만든 의자와 석상이 있었고, 잘  길들인 다정스런 흰 비둘기 때가 있었지...."
  "그 시원스런 가로수  길을 따라 그 소녀가 나를 인도했지.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여러 가지를 묻기도  하고 또 무슨 얘기를 해 주었는데,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즐거운 이야기였던  것만은 분명해. 그때 그 부드러운  선, 그 아름답고 상냥한 얼굴의 섬세하나 턱이 생각나는군.... 곧 매우 깨끗한  카푸친 종의 원숭이 한 마리가 나무에서 내려와 내  옆으로 달려왔어. 불그스레한 갈색  털이 나 있었고 회색  눈이 순해 보였어. 나를 올려다보며 웃더니, 이내 내 어깨로  뛰어 올라 왔어.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은 매우 즐겁게 걸어갔지."


  그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재촉했다.
  "여러 가지 사소한 것이 기억나는군. 우리는  월계수 사이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 한 노인  옆을 지나, 앵무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고 있는  곳을 지났지. 그리고 넓고 그늘진 주랑을  지나, 마침내 아주 넓고 시원한 궁전에 이르렀어. 그곳은 시원한 분수와 아름다운 것들, 소망하는 것과 그 충족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었어. 그리고 거기에는 온갖 물건과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다소 어렴풋하게 기억이 날 뿐이야. 그러나 이들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아름답고 친절했어.  자세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여튼 그들은 모두  무척 친절했고 내가 온 것을 매우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겠더군. 그들의 몸짓, 부드로운 손, 환영과 사랑의 눈빛 때문에 나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었어."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거기서 나는 함께 놀 친구들을 발견했지. 나는 외톨이 소년이었으므로 그것은 내게 매우 기쁜 일이었어.  그 애들은 꽃으로 장식된 해시계가 있는 잔디밭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어.  그리고 놀 때에도 사랑이 넘쳐 있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기억에는 공백이 있어. 우리가 무슨  놀이를 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아.  직후에도 기억할 수 없었어. 나중에 나는 어린애같이 몇 시간이고 눈물까지 흘리며  그 행복한 놀이의 방법을 되새겨 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어.  나는 그 놀이를 내 방에서 혼자 다시 해  보고 싶었던 거야. 그러나 실패했어.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그때의 행복감과, 그리고 늘 내 옆에 있던 두  명의 놀이 친구 뿐이었어....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침울하고 어두운 표정의 여자가 나타났어. 엄숙하고 창백한  얼굴에 꿈꾸듯 공상에 잠긴 눈을 한 침울한 여자였어. 그녀는 엷은  자주빛의 부드러운 긴 옷을 걸치고 책을 한 권 들고 있었는데, 나를 손짓해  부르더니 홀 위에 있는 화랑으로 데리고 갔어. 함께 놀던 친구들은 나와 헤어지기 싫었던지, 놀이를 중단하고 그 자리에 선  채 내가 이끌려 가는 것을 지켜보았어. '돌아와! 빨리 돌아와야 해!'라고 그들은 소리쳤지.  나는 그 여자의 얼굴을 올려 보았으나 그 여자는  친구들의 말에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어. 그녀의  얼굴은 매우 부드러웠으나  엄숙했어. 그녀는 화랑의 어느 의자로 나를  데리고 갔어. 나는  그 여자 옆에 서서  그녀가 무릎 위에 책을 펼치면  들여다 볼 생각을 하고  있었지. 책이 펼쳐졌어. 그  여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어. 왜냐하면 그 살아 있는 책에서  내 자신을 봤기 때문이야. 그것은 바로 내 자신에  관한 책이었어. 그리고 그 안에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겪은 모든 것이 들어 있었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어.  그 책의 책장은 그림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니 말이야."


  월러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멈추고는 이해해 달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어서 계속해 봐!" 라고 나는 말했다. "이해할 수 있어."
  "그것은 현실이었더.  그래, 현실이었음에  틀림없어. 사람들이  움직이고 물건들이 그 속에  나타났다 없어졌다 했으니까. 거의 잊어버릴 뻔했던  사랑하는 어머니, 엄격하고 강직한  아버지, 그리고 하녀, 유모, 집에 있는 낯익은 물건들이 보였어.  그 다음은 대문과 이리저리 오가는 마차들이  나타났어. 나는 그것을 보며 정말  놀랐고, 믿기지 않아 다시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어. 그리고는  다시 책장을 넘겨 여기저기 뛰어넘으면서 책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했어. 그래서  결국 길고 흰 벽과 초록색 문  바깥에서 배회하면서 주저하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에까지 이르렀어. 그리고 다시 나는 갈등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지."
  "'그 다음은?' 이라고 소리를 치며 책장을 넘기려고 하는데 그 엄숙한 여자의 차가운 손이 나를 제지했어."
  "'그 다음은?' 이라고  말하며 난 고집을 부렸지. 그리고 나는  어린 힘을 다하여 그 여자의
손가락을 잡아  당기면서 밀어내려 했어.  마침내 여자가 양보하고  책장이 넘겨졌을 때 그 야자는 그림자처럼  내 위로 머리를 수그리고 이마에다 키스를 했어."
  "그러나 책장은 내게 마법의 정원도, 표범도, 내  손을 이끌어 준 소녀도, 나와 헤어지기 싫어하던 놀이 친구들도 보여 주지 않았어.  그 책장은 등불이 켜지기 전 싸늘한 저녁 시간의 길고 어두?㎵㎸? 웨스트켄싱턴 거리만을 보여줄 뿐이었어. 그리고  나는 바로 거기 있었어. 작고 초라한  몰골로. 나는 울음을 참으려 애썼지만  그만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어. 내  등 뒤에서 '돌아와! 빨리 돌아와야 해!' 라고  소리지르던 그 친구들 곁으로 되돌아갈 수 없어서  울었던 거야. 나는 거기 그렇게 내버려진  거지. 더 이상 책 속의 한  장면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이었어.  그 마법의 정원 그리고  나를 제지하던 엄숙한 부인의  손도 사라졌어.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을까?"
  그는 다시 말을 멈추고, 불빛을 들여다보며 잠시 동안 가만히 있었다.


  "아!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그 비참함이란!" 그는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조금 후 그를 재촉했다.
  "난 그야말로 가련하고 불쌍한 아이였지! 이 회색의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오다니 말이야! 내게  일어난 일을 깨닫자 나는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잠기고 말았어. 그리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울었다는 그 수치심과 굴욕감, 그리고 겁에 질린 채 집에 돌아갔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 금테 안경을 쓴 한 인자한 노신사가 걸음을 멈추고 우산으로 쿡 찌르면서 내게 말을 건넸는데 그 얼굴이 기억에 생생하군. 그분이 말했어. '불쌍한 아이로군. 길을 잃었나 보구나!' 글세 다섯 살이나 되는 런던 소년인 나늘 두고 말이야! 그러더니 친절한 젊은 경관을 불러오고 사람이 모여들게 하고는 함께 집까지 데리고 갔어. 결국 엉엉 울면서, 여러 사람들의  눈길을 받으며, 겁에 질린 채 마법의 정원에서 우리집의 계단까지 돌아왔던 거야."


  "그 정원, 나를 지금도 사로잡고 있는 그  정원에 대한 모습은 이 정도밖에 기억할 수가 없네. 그리고 물론 나는 그 주위에  감돌던 형언할 수 없는 그 반투명한 비현실성을, 보통 경험과의 '차이'에 대해서는  설명해 줄 수가 없군. 그러나 그런 일이,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야. 만일 그것이 꿈이었다고 하더라도 낮에 있었던 별난 꿈이었던 것은 틀림없어.... 물론 그후에 아주머니,  아버지, 유모, 가정교사  등 갖은 사람한테서 귀찮은  질문을 받았었지...."


  "나는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으나 아버지는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전 처음으로 내 종아리를  때렸어. 나중에는 아주머니에게도 이야기하려  했지만, 내가 완고하게도  끝끝내 고집을 부린다고 해서  또 다시 벌을 받았지. 그리고는 전에도 말했듯이 모두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금지되어 한 마디도 듣지 않게 돼버렸어.  심지어는 동화책도 얼마 동안 빼앗겼어. 내가 너무나 '공상적'이기 때문이라는  거야. 뭐? 그래. 그랬다니까.  정말 압수당했어. 아버지는 약간  구식이었거든.... 그래서 내 이야기는 나  혼자 간직하는 수밖에 없었어. 나는  배개에다 속삭였지. 애들처럼 눈물을 흘리며 속삭이는 바람에 내 배개는  가끔 축축하게 젖곤 했어. 그리고 열성이  없는 형식적인 기도뒤에 진심에서 우러나온  한 가지 요구를 덧붙이게 되었어. '하나님, 제발 그 정원에  대해 꿈꾸게 해 주세요. 아! 제발 저를 정원으로  데려가 주세요!'  라고 말이야. 그 정원으로  데려가 주세요! 사실  그 정원을 자주 꿈꾸기는 했지. 그때마다 내가 처음과 다르게 약간  보태거나 혹은 좀 바꾸었는지도 모르겠어.... 이 모든  것은 자네도 알겠지만 단편적인 기억을 가지고 매우 어렸을 때의 경험 자체를 재구성해 보려는  것이지. 이 기억과 그 이후 어린 시절의  다른 기억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어.  그런데 그 놀라운 환상을 다시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때가 오게 되었어."


  나는 뻔한 질문을 했다.
  "아니," 그는 대답했다.  "어렸을 때는 정원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 기억은  없어.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아마 이 사고가 있은 후부터는 내가 또 길을 잃지  않도록 행동에 대한 감시가 더 엄격해졌는지도 모르지. 자네를 알  무렵까지는 그 정원을 다시 찾으려고 했던  적이 없어. 그리고 지금은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되지만, 한때는 그 정원을 깨끗이 잊어버린 적도 있었지. 아마 그때가 여덟이나  아홉 살 무렵일 거야. 자네, 세인트 앨설스턴 학교에서 내 어렸을 때 모습 기억하나?"
  "물론이지."
  "내가 그 무렵 무슨 비밀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아니겠지?"

 


  2
  그는 갑자기 미소를 띤 채 얼굴을 들었다. 
  "'노스웨스트 항로'라는 놀이를  나하고 해본 적이 있던가?....  아니, 학교 가는 길이 나하고는 달랐었지?"
  그는 말을 이었다.  "그건 변화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매일 하는  그런 놀이였어. 방법은 학교로 가는  '노스웨스트 항로'를 발견하는 것이었지. 학교가는 길이야 뻔하잖아. 그래서 색다른 길을 발견하는 것이  이 놀이의 골자였는데 평소보다 십 분 일찍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출방해서 안 다녀본 생소한 길로 목적지인  학교에 도달하는 놀이였어. 그런데 어느 날은  캠프던 힐의 맞은편, 빈민가에서 그만 길을 잃었어. 나는  이번에는 실패구나, 학교에 지각하겠는데 하고  걱정을 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막다른 골목으로  보이는 길에서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끝까지 갔더니 다행히 또 다른 길이 나오더군. 나는 다시  희망을 갖고 그 길을 서둘러 지났어. '아직  할 수 있어'라고 중얼거리면서 걷다보니 이상스럽게도 낯익은  지저분한 가게들을 지나가게 되었어.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앞에 긴 하연  벽과 마법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초록색 문이 나타난 거야!"
  "갑자기 나타난 거지. 역시 그 정원, 그 놀라운 정원은 꿈이 아니었던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그 초록색  문을 두 번째로 보았을  때는 학생으로 바쁜 생활을 보냈기에, 예전 어렸을 때 얼마든지 놀 시간이 있던 시절과는 달랐어. 어쨌든 이때는 곧장  문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어.  그건 말이야, 우선 시간에 늦지 않게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야.  개근 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거든. 물론 그 문으로 들어가보고 싶은 생각이  조금은 있었을 거야. 그래, 그러고  싶은 생각이 분명히 있었을  거야.... 그러나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 문의 유혹은 하나의  방해물로 생각되었던 모양이야. 물론 초록색 문을 다시 발견하자 대단한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어. 나는 오직 그 생각만 하면서 계속  걸었어.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어. 그것 때문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단 말이야. 나는 뛰어가면서  시계를 꺼내 들었어. 아직 십 분 가량  여유는 있었어. 언덕을 내려가니 낯익은 길이 나왔고 나는 숨을 헐떡이며 학교에 도착했어. 온몸은 땀에  흠뻑 젖었지만 그래도 지각은  면했어. 그리고 코트와 모자를  건 것도 기억하네.... 바로  앞을 지나가면서 그냥 지나쳐 버렸던 거야. 이상하지 않은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야 물론 그것이  늘 거기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몰랐었지.  학생의 상상력이란 제한되어  있는 법이거든. 그 문이 거기에 있고,  또 그곳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다는 점은 꽤 즐거웠던 것 같아. 그러나 학교 수업이 있었지. 그날 아침 나는 몹시 산만하고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았던 것 같네. 곧 다시  만나게 될 그 아름답고 신비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거든. 참  이상하게도 나는 그들이 나를 만나면  기뻐하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어....  그래. 그날 아침 나는 그 정원을 힘드는  학교 공부 틈틈이 찾아갈 수 있는 즐거운 장소 정도로 생각했었어."
 
 "그러나 그날은 거기에 가지 않았어. 다음 날이  토요일이라 그것이 내 생각에 영향을 끼쳤거나 아니면 그날 수업에 태만한 벌로 보충수업을 받아서 거기 들렀다가 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날 마법의 정원이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서 도저히 나 혼자만 간직하고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야."
  "그래서 난 이야기했지. 이름이 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들이 스퀴프라고 부르던 그 흰 족제비같이 생긴 녀석한테 말이야."
  "홉킨스 2세말이군." 하고 내가 말했다.


  "그래, 홉킨스였어. 그 녀석에겐 말하고  싶지 않았었는데, 그에게 말하는 것은 뭔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얘기를 하고 말았어. 집에 가는 길이 그 친구와 같은 방향이어서 같이 걷고 있었어. 그  녀석은 말이 좀 많은 편이어서 그  마법의 정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아무거나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될 형편이었어."
  "그랬더니 그 녀석이 내 비밀을 모두에게 떠벌린  거야. 다음 날 노는 시간이 되자 나보다 큰 놈들  대여섯 명이 둘러싸더니 반은 놀리면서도 한편 호기심에 가득 차 그  마법의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더  하라는 거야. 거기엔 그 키 큰 포세트도 끼어  있었지. 자네, 그 녀석 기억하나? 또 카너비, 모얼리 레이널즈도  있었지. 자넨 거기 없었지?  자네가 거기 있었다면 내가 기억하고 있을 거야...."
  "애들의 감정이란 참 묘한 거지. 난  은근히 내 자신이 혐오스러우면서도 그 덩치 큰 녀석들의  주목을 받는 통에 다소 우쭐한 기분도  들었거든. 특히 크로쇼우가 찬사를 보낼 때는 특별히 기분이 좋았어.  왜 자네도 기억하겠지만, 작곡가  크로쇼우의 아들 크로쇼우  말이야. 그 녀석이 '이거  들어 본 중에 제일 가는  거짓말이군!' 이라고 말했지. 그러나 동시에 나는  신성한 비밀을 얘기한 데  대해 정말이지 가슴 아픈 수치를 느꼈어.  그 짐승같은 포세트란 놈이 그 초록색 문 안에 있던 소녀에 대해 농담을 했거든."


  그 수치의 뼈저린 기억 때문에 월러스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난 못 들은 척했어." 그는  말했다. "그러자 카너비가 갑자기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기에, 나는 정말이라고 우기면서 한바탕 입씨름을 벌였지. 그리고 그 초록색 문이 있는 곳을 똑똑히 알고 있으며 십 분이면 그곳으로 데리고 갈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지. 카너비는 정색을  하고, 자기들을 꼭 데리고 가야 하고, 증거를  보여 주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는 거야. 자네 카너비에게 팔을 비틀려 본 적이 있나? 그렇다면 내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정말이라고 맹세했어. 그 당시 카너비에게 당하는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 학생은 전교에 하나도  없었지. 크로쇼우가 한두 마디 끼어들기는 했지만. 카너비 녀석 사냥감 하나 잡은  거지, 뭐. 난 흥분하여 귀가 빨개지고 겁도 좀 났어. 난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그 결과, 마법의 정원을 혼자 찾아가는 대신, 놀려대면서도 한편으로는 호기심에 차서 협박하는 여섯 명의  애들을 이끌고 가게 된 거야. 내  뺨은 상기되고 귀는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은 쑤시고 아프고, 마음은 더할 수 없는 비참함과 수치심에 타오르고 있었지."
  "그런데 우리는 그 하얀 벽과 초록색 문을 찾지 못했어...."
  "무슨 뜻이지?"
  "찾을 수 없었다, 그 말이야. 찾을 수만 있었으면 데리고 갔을 거야."
  "그리고 나중에 혼자 갔을  때에도 찾을 수 없었어. 다시는 찾지 못했어. 그후에도 학교  다니면서 줄곧 찾아  봤지만 결코 찾아 내지  못하고 말았어."
  "애들이 괴롭히지는 않던가?"
  "지독하게 혼났지.... 카너비는  내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다고 회의를 소집했어. 나는 운  흔적을 감추려고 집에 가서도 몰래 이층으로  올라갔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네. 나는  엉엉울다 잠이 들었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카너비 때문은 아니었어.  그것은 그 정원과, 내가  간절히 바란 그 아름다운 오후와, 그 아름답고 다정한  여자들과,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 때문이었어. 그리고 다시 배우고 싶은 놀이, 그 잊어버린 아름다운 놀이 때문이었어...."
  "그 녀석들에게 말하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굳게 믿었어.  그후로는 형편없는 세월이었어. 밤에는 울고 낮에는 멍청하게 넋을 잃고 말이야. 두 학기 동안 죽 게으름을  부려서 성적이 나빠졌지. 자네 생각나나? 물론  기억하고 있을 거야. 자네가 산수에서  나를 이겼지. 그 때 그래서 다시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던 거야."

 

 

  3
  얼마 동안 나의 친구는 잠자코 타오르는 불길 한가운데의 불꽃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열일곱이  될 때까지는 그것을 다시는 보지 못했어."
  "그런데 세  번째 기회가 내게  찾아왔던 거야. 옥스퍼드의 장학생  선발 시험을 보기 위해  마차로 패딩턴 역에 가는 도중이었어. 아주  순간적으로 힐끗 보았을 뿐이야.  이륜마차의 창문에 팔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면서  내 자신이 꽤 훌륭하게 출세의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어. 별안간 그 문과 벽이 나타났단 말이야. 잊을 수 없었던, 그리고 아직은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그리운 마음이 솟구쳤어."
  "우리는 털거덕거리며 지나가고 있었어. 나는 너무나  놀라서 그 길을 다 지나 모퉁이를 돌 때까지  마차를 멈출 생각도 못했어. 나는 내  의지가 둘로 나뉘는 묘한 순간을 경험했어. 나는 마차 천장의  조그만 문을 두드리면서, 시계를 꺼내려고  팔을 아래로 내렸지. 마차꾼이 '네, 뭡니까?'  라고 곧 물었으나 나는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내가 잘못 생각했소!  시간이 별로 없소. 그냥 갑시다!' 라고 소리쳤어. 마차는 계속 달려갔지...."
  "난 장학금을 받게 되었지.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는  말을 듣던 날 밤 나는 아버지 집의 이층의  작은 내 서재에서 난롯불을 쬐며 앉아  있었어. 좀체로 칭찬하는 일이 없던 아버지의  칭찬과 좋은 충고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지. 나는 애용하는 파이프,  청년용의 매우 뭉뚝한 파이프를 피우며 그 긴 흰 벽의 초록색 문을 생각하고 있었지. '만일 그 마차를 정지시켰더라면 나는 장학금을  놓쳤을 거고, 옥스퍼드에도 들어가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내 훌륭한 경력이  엉망이 되었을지도 몰라! 나도 이제는 사리를  판단하게 된 것 같군!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깊은 생각 끝은 내 출세를 위해서라면 마법의 정원쯤은 희생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어."
  "그 사랑스런 친구들,  그리고 그 맑은 분위기는 내게 몹시  아름답고 훌륭해 보였으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어. 그 대신 현실에 대한 집착이 점점 강해져 갔지. 나는 다른 문,  즉 출세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봤던 거야."
  그는 다시 불 속을 들여다 보았다.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한 순간, 그 붉은 불빛이 그의 얼굴에 굳센 의지를 떠오르게 했지만 이내 다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난 출세를 위해 노력했지. 나는  많은 일, 어려운 일을 했어.  그러나 그 매혹적인 정원을  수천 번이나 꿈꾸었고, 그 이후 네 번이나 그 문을 본 거야. 적어도 힐끔 보기는 했어.  그래, 네 번이나 말이야.  한동안 이 세상이 매우  밝고 흥미로우며 의미와 기회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보인 반면, 그 정원의 반쯤  사라진 매력은 희미하고 거리가 멀게 느껴졌지. 아름다운 여인, 유명 인사들과 갖는 만찬회에 나가는 길에 누가 표범이나 쓰다듬고 싶어하겠나? 옥스퍼드를 졸업하자 전도 유망한 청년으로서 런던에 나왔지. 사실 당당한 실적도 올렸어. 꽤 성공을 거둔 셈이야. 그러나 실망스러운 것도 있었어...."
  "나는 두 번 사랑에  빠진 일이 있었지. 뭐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언젠가 내가 접근할 용기를 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하던 여인을 찾아가고 있었어. 나는  얼즈 코오트 근처 왕래가 드문 길을  통해 지름길을 찾던 중이었는데, 뜻밖에도 그 하얀 벽과 낯익은  초록색 문을 만났어. '참 이상하다! 이 담은 캠프던 힐에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스토운헨지의 돌을 세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장소가 아니었던가. 나의 기묘한 백일몽의 장소이기도 했지.' 이렇게 나는  중얼거렸어. 나는 목적에 열중한 채 그곳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네. 그날  오후에는 그것이 내게 그다지 매력이 없었던 거야."
  "기껏해야 세 걸음만 옮기면 되었기 때문에 문을 열어 볼까 하는 충동을 일순간 느끼긴  했지. 비록 마음 속에는  문이 열려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나의 명예가 걸린 그 약속을 어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 나중에는 시간을 너무  엄격히 지켰던 것을 유감으로 여겼어. 적어도 잠깐 들여다보고 표범들에게 손이라도 흔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그때쯤에는 열심히 찾아도 발견되지  않은 것은 뒤늦게 다시 찾으려 들지 않을 정도로 세상사에 익숙해져 있을 때였어. 그  순간이 무척 유감스럽군...."
  "그후 몇 해 동안은  열심히 일했고 그 문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 그것이 내게로  다시 돌아온 것은 극히  최근이야. 이와 더불어 나의  세계에는 엷은 때가 덮여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어. 그 문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매우 슬픈  일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거야. 아마 과로로  다소 몸이 쇠약해졌는지도 모르겠어.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사십대  남자들이 느끼는 그런 감정일지도  모르고, 잘 모르겠어. 그러나  애를 써도 힘드는 줄 모르게 하던 예리한  빛이 최근에 이르러서는 확실히  사라지고 모든 것이 시들해지기 시작했어. 그것도  새로운 정치적 발전이니 뭐니 해서 내가  적극적으로 활동을 해야만 할 바로 이때에 말이야. 참 이상한  일 아닌가? 그러나 나는 인생이란  몹시 고달픈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보상을 받을 만해지니까 그  보상이라는 것이 아주 값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게 된 것이지. 그래서 얼마 전부터 그 정원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지
기 시작했어. 그래. 그리고 나는 세 번이나 봤지!"
  "그 정원을?"
  "아니, 그 문을 말이야! 그런데도 들어가지 않았어!"
  그는 매우 슬픈 어조로 이야기하며 테이블  위로 몸을 숙였다. "세번이나 기회가 있었어. '세 번' 이나! 만일  그 문이 내게 다시 나타난다면 나는 이 속세의 지저분함과 싸움, 허영심의  공허한 화려함, 이 힘들기만 하고 헛된 세계로부터 벗어나 그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맹세했지. 들어가서는  다시 되돌아오지 않겠다고.  이번만은 머물러 있자....  이렇게 맹세를 했지만  막상 그때가 닥쳐오면 나는 '가지 않았던 거야'"
  "한 해 동안 세 번이나 그 문  앞을 지나쳤는데도 들어가진 못했어. 작년 한 해에 세 번씩이나 말이야."
  "첫번째는 소작인  구제법안에 대해  의견이 분열되었던 그날  밤이었어. 그 밥안에서 정부가 세  표 차로 간신히 이겼는데, 자네 기억하나?  우리편에서나 반대편에서나 그날  밤 결정이 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어.  그런데 의외로 토의는 곧 종결되었어. 나와 호츠키스는 그의  사촌과 함께 브렌트퍼드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어. 우리 둘만 표결에 참석하지 않았고  현재 찬반이 동수라고 전화로 호출을 받았어. 즉시 그 사촌의  차를 타고 의사당으로 달려갔지. 간신히 시간 내에 도착했는데, 가는 도중에 우리는 나의 벽과 문을 지나쳤던 것이지. 달빛을 받은 곳은 납빛으로 보이고, 자동차 불빛을 받은 곳만 노랗게 비쳐 얼룩이 졌지만, 틀림없는  그 벽과 문이었어. '세상에!' 이렇게 내가  소리치자, 호츠키스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 나는  '아냐, 아무 것도 아냐!' 라고 대답했으며 그 순간은 그렇게 지나가고 말았어."
  "'난 큰  희생을 치르고 왔어!'  의사당에 들어가면서 원내총무에게  말을 던졌더니, '다들 그랬다네' 라고 대답하고는 급히 지나가 버렸어."
  "그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지. 다음 번 기회는  아버지의 임종의 자리로, 그 엄격한 분의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해  달려가고 있을 때였었어. 그때 역시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긴급한 때니까 어쩔  도리가 없었어. 그러나 세 번째는 달랐지. 바로 일주일 전에  일어난 일이야. 지금 생각해 보아도 너무 후회스러워. 그때 나는 거커와 랠프스와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지.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거커하고 이야기가 다 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 우리는 프로비셔즈에서 식사를  하면서 둘 사이에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새 내각에서 내 자리 문제는  늘 토의 대상이 되기 바로 전의 상황이었지. 그래, 그래. 이제 다 결정됐어. 아직은 말을 낼 필요가  없지만 자네한테야 뭐 감출 이유가 있겠나....  응, 거듭 고마워. 하지만 내 이야기 좀 들어주지 않겠어?"
  "그런데 그날 밤에는  일이 아직 확정되어 있지도 않았고, 내  지위는 매우 미묘한 상태였어. 나는  거커로부터 무슨 확답을 듣고 싶었지만, 랠프스가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바람에 그게 어려웠지.  나는 가볍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면서, 나에  관한 문제에 너무 노골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지  않도록 애를 쓰고 있었지.  그랬어야만 했어. 그후 랠프스의 행동을 보더라도 당시에는 그렇게 조심한  것이 참 잘한 일이었어....  나는 랠프스가 켄싱턴 대로를 지나서는  우리와 헤어질 것이며,  그러면 거커에게 바로  솔직하게 얘기를 꺼내 놀라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 사람이란  때로는 그런 잔꾀를 부려야만 할 때가 있지.... 그런데  바로 그때 내 시야 한쪽에는 다시 한 번 하얀 벽과 초록색 문이 들어왔던 거야. 거리 저쪽으로 말이지."
  "우리는 이야기하면서 그 앞을  지나갔지. 그냥 지나쳤어. 우리들이 천천히 지나갈 때 나와 랠프스의 그림자 앞으로 가는  거커의 인상적인 옆모습, 그림자와 돌출한 코 위로 내려 눌러쓴 오페라 모자,  주름잡힌 그의 목도리가 지금도 눈에 선해."
  "나는 그 문에서 몇  발자국도 되지 않는 곳으로 지나갔어. '그들에게 작별을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자문해 보았지. 사실 거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지."
  "다른 문제들로  머리가 복잡해서 그  문제에 대답할 수는 없었어.  나는 생각했지. '그들은 나를 미쳤다고 생각할 거야. 가령 지금 사라진다고 하자! 전도유망한 정치가의  놀라운 실종으로 여겨질 거야!'  그런 것들이 신경이 쓰였네. 그 중요한 순간에 생각도 할  수 없는 만큼 보잘 것 없는 속된, 수천 가지의 생각들이 마음을 사로잡앗던 거야."


  그리고 그는 슬픈 미소를 띤  채 내게로 몸을 돌리고 천천히 "그래서 여기 있는 거야!" 라고 말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거야!" 그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리고 기회는 영영 사라졌어. 한 해 동안 세  번이나 그 문은 내게 나타났는데. 평화에 이르고 기쁨에 이르는 문,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이  지구상에서는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친절함에 이르는 그 문이 말이야.  그런데 레드먼
드, 나는 그 문을 거절했고 그 문은 영영 사라졌어."
  "어떻게 알지?"
  "난 알아. 알고  말고. 나는 이제 내게 기회가  올 때마다 그토록 강하게 나를 사로잡은 일들에  얽매여 그것을 계속해 나가는 수밖에 없어.  자네는 내가 성공을 했다고 말하지. 이 천하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역겨운 것,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래, 나는  성공했지." 그는 큰  손 안에 호두를 하나 쥐고 있었다. "만일 이것이 내가 거둔 성공이라면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호두를 쥐어 깨고는 나더러 보라고 내밀었다.
  "여보게, 레드먼드,  그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 나를 파괴시키고  있네. 두 달 동안, 거의 십주일 동안 가장 필요한 긴급한  일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어. 내 마음에는 달랠  수 없는 후회의 심정 뿐이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듯한 밤에 나가  홀로 헤메지. 그래. 만일 사람들이 안다면 어떻게 여길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지. 각료  가운데 한 사람이, 모든 부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서를 맡고 있는 장관이 그  문, 그 정원 때문에 슬퍼하며, 때로는  거의 소리내어 흐느끼며 홀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말이지!"

 

  4
  나는 이제 그의 창백한 얼굴과 그의 두 눈에 담긴 낯설고 음울한 불빛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오늘 저녁에 나는 아주 똑똑히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마지막 말을, 그의 어조를  되새기며 앉아 있다. 그의 사망 기사가 실린 어젯밤의 「웨스트민스터 거제트」지가 소파  위에 놓여 있다. 오늘 점심 때는 그의  죽음으로 클럽이 시끄러웠다. 그 밖의 다른 화제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시신은 어제 새벽 이스트켄싱턴 역 근처의 깊은 웅덩이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은 지하철을 남쪽으로 연장하기 위해 파놓은 두  개의 갱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곳은 일반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큰  길에다 널빤지로 울타리를 쳐  놓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부근에 사는 노동자들의 편의를  위해 널빤지에는 조그만 통로가  뚫려 있었다. 그 문은 양쪽 갱도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부주의로  잠그지 않은 채 내  버려둔 상태였다. 그 문으로  그는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내 마음은 여러 가지 의문과 수수께끼로 어둡다.
  그날 밤 그는 하원에서  내내 걸어왔던 것 같다. 지난 회기  동안에도 걸어서 집에 돌아오는 일이  자주 있었다. 시간이 늦은 텅 빈  거리를 외투를 뒤집어 쓴 채 생각에 골몰하여  걸어가는 그의 어두운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려 본다. 그는 정거장 근처의 창백한 전등불로 인해  거친 널빤지를 하얀 벽과 비슷한 것으로 착각했던 것일까?
  도대체 벽에 초록색 문이란 것이 실제 있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나는 다만 그가 내게 말해 준  그대로를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때로는 월러스가 드물지만 전례가 없지도 않은 그런 종류의 혼각과, 부주의로 인한 함정의  희생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은 아니다. 여러분은 나를  미신적이라거나 혹은 어리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이지  나는 그가 비상한 재능과 의식이랄까 뭐 그런 것을 갖고  있었다고 굳게 확신한다. 그래서 그 무엇인가가 그에게 벽이나 문의 형태를 빌려 이 세상으로부터의 출구, 이 세계보다는 훨씬 더 아름다운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은밀한 통로를 제공했던 것이라  확신한다. 어쨌든 결국에는 그것이 그를 배신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배신일까? 여긱에서 당신은 이들 몽상가들, 환상과 상상력의 소유자들의 가장 깊숙한  비밀에 접근하는 셈이 된다. 우리는 우리  세계를 아름답고 일상적인 것으로, 널빤지로 둘러싸여 있고 또한 웅덩이가 있는 곳으로 본다. 우리의  환한 대낮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한다면 그는 안전한 세계에서 어둠과 위험과 죽음의 세계로 걸어가 버린 셈이다.
  그러나 월러스도 과연 그렇게 보았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