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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딸기

Joyfule 2012. 5. 22. 10:28

  산딸기

 

 

(정재은-수필가 충북충주 출생(1937~1996)
현대수필 문학상 수상.수필문학진흥회 이사 역임 수필집(돌베의 꿈)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날씨가 갑자기 무더워졌다.
아들아이가 하학하는 길에 산딸기를 한 도시락 사 가지고 돌아왔다.
버스에서 내리니 전선주 밑 뜨거운 햇빛아래, 때묻은 수건을 머리에 얹은 시골 할머니가

새빨간 산딸기를 한 양푼 앞에 놓고 앉았는데, 소문난 명화를 보는 것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더란다.
삼 남매가 엉키어 떠들썩 먹으며 나의 입에도 한 알씩 넣어 준다.
떫은 듯 새콤달콤 맛 짙은 딸기알이 입 속에서 오독오독 깨물어진다.
그 시고 달고 쌉쌀한 딸기알을 깨물며 나의 기억은 선명하게도
나의 미각을 유혹해 오던 산딸기를 찾아 산자락을 누비던 어린 시절을 더듬고 있었다.

 

6.25가 났을 때 우리 가족은 충주 읍내에서 산 하나를 넘는 난영이란 마을로 피난을 갔었다.
종범이네라는 선량한 농가의 뜰아랫방에 우리는 피난짐을 풀었다.
10여 호쯤의 촌락인데 주민과 피난민이 반반 섞이어 여름 난리를 치르게 되었다.

종범이네와 우리는 한 식구처럼 한솥밥을 먹었다.
하루 걸러 한 번쯤 점심때가 너웃해지면 나는 다래끼를 어깨에 걸고 산비탈에 걸린 목화밭으로 배추를 솎으러 갔었다.
목화밭 이랑 사이에 심은 배추를 솎아 놓고는 뱀을 좇듯
작대기 끝으로 풀섶을 이리 헤척 저리 뒤척이며 멍석딸기를 찾았다.
좀 후미진 곳에서 산딸기가 여남은 포기나 담송담송 모여 난 곳을 찾게 되었다.
검지손가락 끝마디 만큼씩한 검붉은 산딸기가 소담하게 열려 있었다.
산딸기 맛에 김칫거리 장만은 짜증스럽지 않은 심부름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나 말고도 이 산딸기를 따 먹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땐 희므르레 덜 익은 딸기만 남겨진 때도 있었다.
그럴 땐 배암딸기나 멍석딸기를 찾으며 서운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어느 날 배추를 다듬어 다래끼에 담아 놓고 숲을 헤치며 올라가니 누가 먼저 와서 딸기나무 위에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던지 허리를 펴며 후딱 뒤돌아보았다.
십사오 세쯤, 꼭 내또래의 머스매였다.
희멀건 얼굴에 눈과 입이 작은 머스매는 유순한 표정에 좀 무안한 빛을 띠고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범인이 바로 너였구나 싶어,
"니가 맨날 딸기 다 따갔구나?"
하고 대담하게 다가서며 싸움걸듯 쏘아붙였다.
"산에 나는 딸기에두 임자가 있냐?"
머스매는 똑 따온 듯한 서울 말씨를 썼다.


그러지 않아도 흰 반바지 흰 러닝에 검은 허리띠를 맨 깔끔한 차림새며
계집애보다도 하얀 살결이 서울내기란 딱지처럼 눈에 두드러졌다.
등갱이 넘어 촌락으로 피난 온 애일 거라고 짐작이 갔다.
나는 풀이 죽어,
"내가 먼저 맡아 놨거덩."
머스매는 비죽이 웃으며,
"야, 산이나 들에 나는 건 누구나 먹는 게 임자야."
나는 흰 운동화를 꺾어 신은 머스매의 희고 통통한 종아리와 뒤꿈치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종아리에 꺼먹 고무신을 신은 내 다리가 창피해서 오히려 오기가 치밀 지경이었다.

 

딸기밭에서 곧잘 그 머스매와 마주치곤 했다.
이름이 성준인데 그냥 준이라고 부른단다.
다 같은 열네 살인데 나는 국민학교 육학년이었고 준이는 중학교 일학년이었다.
준이는 처음 인상처럼 무척 순한 아이였다.
시골뜨기라는 자격지심에 말끝마다 톡톡 쏘아붙이는 데도 준이는 늘 부드러운 억양을 썼다.
내 말투도 어느덧 많이 눅어지며 준과 나는 서먹서먹하면서도 싫지 않은 친구가 되어갔다.

어머니를 졸라서 허리에 고무줄 넣은 소창치마, 소창반소매 속에
나는 꼭 조끼가 단단한 속치마를 받쳐입고 배추를 뽑으러 갔다.
젖몽오리가 목화 다래알만큼 여물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내가 먼저 목화밭에 나가 있었고 어떤 땐 준이 먼저 딸기밭에 나와 있었다.
준이는 나를 도와 배추도 뽑고 풋고추도 땄다.
<성불사의 밤>을 가르쳐 주어 함께 부르기도 했다.
피난 왔다는 사실은 깜빡잊고 여름 방학에 외가에라도 간 듯 곤충채집한다고 하늘소, 딱정벌레를 잡기도 했다.
마을 앞 논 귀역지에 있는 삼밭에는 풍뎅이가 많았다.
풍뎅이 큰 다리를 한 마디씩 끊어 넙적한 바위 위에 재껴놓고 손바닥으로 주위를 탁탁 치며,
"풍뎅아, 풍뎅아, 앞마당 쓸어라, 뒷마당 쓸어라."
하면 풍뎅이는 쪽 펼친 짙은 청록색의 날개를 번쩍이며 앵앵 세차게 맴돌았다.

 

어느 날이었다.
"저기 좋은 데 있다. 이리 와 보아."
준이는 나를 데리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갔다.
절벽처럼 선 바위 밑에 50센티쯤이나 굴처럼 패어져 있었다.
그 앞에 산골 물이 자갈 섞인 모래바닥을 투명하게 빛내며 시리도록 말갛게 흐르고 있었다.
인동덩굴, 다래덩굴이 나뭇가지에 얽히어 터널 속처럼 짙은 그늘을 서늘하게 드리워주고,
그늘을 벗어난 물가에 산나리, 패랭이, 범부채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얘, 여기서 세수해, 발두 담가 봐라. 무척 시원해."
물 속에서 더욱 희고 통통해 뵈는 준이 발에서 조금 떨어져 머뭇거리며
새까만 나의 발을 들이밀고는 손으로 발등을 자꾸 부비었다.
준이얼굴은 햇빛에 그을면 빨개졌다가 다시 희어지는데 시골아이라 그런지
나의 살은 검붉게 익었다가 그대로 까맣게 타 버리는 것이 야속했다.
그런데도
"야, 네 눈, 나하고 바꿨음 좋겠다."
하며 황소눈깔이라고 놀림 받는 터무니없이 크기만 한 내 눈을 칭찬해 주었다.
준이는 몸을 뒤로 젖힌 채 발장단치며 노래를 부르고 나는 발가락으로 물 속의 자갈을 빼글빼글 굴리고 있을 때였다.


준이가 별안가 나를 왈칵 잡아다녔다.
내가 미처 놀랄 새도 없이 귀를 짜개듯 날카로운 제트기의 금속성이 내 고막을 때려왔다.
난영이에게서 1킬로미터가 좀 못되게 흘러내린 계곡을 가로막으며 충주읍에서 안동, 김천으로 빠지는 대로가 걸려 있었다.
인민군이나 말들이 지나가기 때문에 이따금 '쌕쌕이'의 공습을 받곤 했었다.
준이와 나는 고꾸라지듯 패여진 바위 밑으로 뛰어들어갔다.
쌕쌕이의 기총 소사는 꼭 우리들 머리 위에서 쏘아대는 듯 들려졌다.
얼핏 눈을 드니 건너 산마루 위로 원을 그리듯 비행기가 부웅 떠오르다가 곤두박질로 내리꽂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큰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준과 나는 서로 부등켜 잡고 공포에 떨고 있었다.

공습이 멎고 비행기가 돌아간 것을 확인하자 우리는 꿈에서 깨이듯 감았던 팔을 풀며 부스스 일어나 나왔다.
안도의 숨을 쉬던 준의 얼굴이 먼저 빨개졌다.
나도 얼굴이 화끈 달았다. 뽕긋한 젖가슴이 파닥파닥 뛰고 있었다.

 

어머니께 꾸중을 들으면서도 나는 배추 뽑으러 가지 않았다.
사흘이 지났을 때 나는 박우물가에 앉아 감자를 벗기고 있었다.
나직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준이가 내 옆을 지나가며 <성불사의 밤>을 부르고 있었다.
준이가 우리 동리에 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보리쌀 닦는 아주머니들 때문인지 준이는 데면데면한 얼굴로 느릿느릿 가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점심때쯤 개울가에 앉아 빨래를 빨고 있었다.
뒷등에 누군가의 눈길이 닿는 듯이 느껴졌다.
준이가 그 희멀건 얼굴로 시침 뚝 떼고 서 있었다.
얼른 머리를 숙이고 빨래만 부비었다.
내 옆의 빨랫돌위에 흰 운동화를 꺾어 신은 준의 두 발이 성큼 올라섰다.
"너, 내일 딸기밭에 안 나오면 죽어, 내가 따져둘 게 있단 말이야."
준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치 거칠고 단호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준이는 성큼성쿰 돌다리를 건너더니 엉덩이에 힘을 주어 멋을 부리며 스척스척 아카시아 숲길로 걸어 들어갔다.

 

다음 날 나는 배추 뽑으러 갔다.
준이는 산딸기를 한 종구리 따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죽인다고 해서 미안해."
준이는 멋쩍게 고개를 꼬았다.
넝쿨들이 터널 속처럼 그늘을 이룬 바위 밑에 올라가 놀다 보니 너무 늦어졌다.
준이가 겉장은 떨어졌지만 삽화가 예쁜 동화책을 갖고 나왔던 것이다.
준이는 목화밭 이랑을 누비며 배추를 뽑고 나는 창칼로 다듬어 다래끼에 담고 있었다.
배추를 다듬다가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계곡 저쪽을 가로지르는 산등갱이 위에 마름모꼴로 편대 지은 쌕쌕이 네 대가 소리도 없이 쑤욱 올라왔다.
벌떡 일어서는데 그제야 귀를 째듯 폭음이 울려왔다.
숨을 곳을 찾을 겨를도 없었다.
준이와 나는 퉁기듯 풀섶에 박힌 커다란 바위 밑으로 굴러들었다.

그날의 폭격은 유독 자심한 것 같았다.
폭탄도 몇 갠가 떨어뜨려졌다. 폭음이 유달리 가깝게 들렸다.

폭격소리가 멎고 한참이 지나도록 준과 나는 두 귀를 막은 채 꿈쩍도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


얼마 만에야 나는 손을 내리며 일어섰다.
큰길 쪽에 보랏빛 포연이 자욱하게 하늘을 덮고 있었다.
넘어가는 해를 정면으로 마주한 위치여서 우리는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세수를 하려고 가늘게 흐르는 도랑물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얘, 너 딸기 깔구 앉아 있었구나."
뒤에서 준이가 소리질렀다.
무망결에 일어나 치마 뒷자락을 당겨 올렸다.
손바닥 크기만큼 딸기 즙이 매어 있었다.
"얘, 속치마. 속치마 좀 봐,"
속치마 뒷자락에는 손바닥 넓이보다 더 넓게 딸기물이 새빨갛게 매어 있었다.
나는 치마를 탁 놓으며 치마 뒷자락을 준이가 못 보도록 돌아섰다.
병풍처럼 바위를 배경으로 서 있는 준과 저절로 마주선 자세가 되었다.
준이 얼굴도 새빨개 있었다.
정작 빨개진 것인지 저녁 햇살, 황혼빛을 받아 빨갛게 보이는 것인지
검은 바위에서 붉게 피어난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부신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손을 뒤로 돌려 치맛자락을 흡싸며 비슬비슬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초조(初潮)였다.

 

들일 하시던 이웃 할아버지 윗입술에 파편이 박히어 동네가 어수선했다.
어머니는 경황없이
"피난 온 게 아니라 난리 마중을 왔구나."
다음날 새벽 우리 가족은 피난짐을 다시 챙겨 이고,지고 더 깊은 산골로 찾아 마을을 떠났다.
성도 주소도 모른 채 준에겐 온다간다 말도 못 건네고 가족들 뒤를 따라 나도 고개를 넘었다.

 

결혼하여 서울서 살며 거리에서 혹 얼굴이 희멀건 내 연배의 남자와 엇비끼게 되면 문득 뒤돌아볼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준과의 해후를 원치 않는다.
준이가 <어린 왕자>에 나오는 숫자를 좋아하거나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어른처럼 변해 버렸다면
패랭이꽃처럼 풋되고 눈부신 나의 영상이 깨어지는 아픔을 견디기 어렵겠기에 ......
가을 풀처럼 시들은 내 모습을 보이기가 두려웁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