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세원 목사·서정희 전도사의 인생 2막
- 있는 모습 그대로
- 여성조선
- 입력 2012.02.28 15:21
- 2012.02.28 15:38
수정 - 여성조선
다 가졌었고 다 잃었었다. 정상도 쳤고 바닥도 쳤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휘몰아치던 시절 동안 변하지 않은 한 가지는 두 사람이 늘 함께였다는 거다. 지난 2월 2일 서세원 씨가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부인 서정희 씨는 전도사로 함께 사역 중이라고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진 날은, 집행유예가 끝나고 모든 법적 효력이 소멸되는 날이었다. 두 사람 인생의 제2막이 열렸다.
2월 2일, 영화감독 서세원 씨가 목사 안수를 받고 청담동의 작은 교회를 개척했다는 소식이 한 케이블 채널을 통해 알려졌다. 부인인 서정희 씨는 전도사로 함께 사역 중이라고 했다. 그 후 인터넷 뉴스는 서세원·서정희 부부의 근황 보도에 많은 부분이 할애됐다. 서세원 씨가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알려진 선교단체, 부부가 건물주로 있던 청담동의 빌딩에는 연일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청담동의 작은 교회'라는 단서만 가지고, 두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강남구청부터 압구정동까지 작은 교회들을 수소문하던 기자는 문득 서정희 씨에게 직접 연락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들이 쏟아졌고, 그만큼의 악성 댓글이 쏟아지던 때였다. 기자의 연락이 반가울 리 없었겠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Free(무보수 사역)로 얻은 Free(자유)
"저희가 여기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건 지난 5월부터예요. 그때 서세원 씨는 전도사였어요. 신학은 그 전부터 하고 있었어요. 미국에서 한 학기 하고 휴학하고 다시 듣고 하면서 모든 과정을 마쳤어요. 그 후로 한국에 와서도 함께 학교를 다니면서 (신학) 공부를 했고요. 이게 지금 하고 있는 공부 자료예요(A4 용지를 묶은 프린트 물은 낱권으로 성경 66권 중 한 부분씩을 정리해둔 것이다. 안에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 직접 쓴 손글씨가 빼곡하다). 한 번 시작한 건 열심히 하는 성격이고요. 그래서 학교에서 미움받아요. 숙제를 너무 열심히 하니까.(웃음) 그래도 (공부하는 걸) 외부에 알리지 못한 건 끝까지 완주하지 못할까 걱정돼서였어요. 그렇다고 굳이 저희가 숨기고 다닌 건 아니고요. 쭉 아무 이야기가 없다가 갑자기 2월에 보도가 돼서 저희도 놀랐어요. 남편 집행유예가 딱 끝나는 날이 2월 5일이에요. 법적인 거는 금요일에 딱 끝났는데, 그날 인터넷에 쫙 퍼진 거예요."
개그맨이자 영화감독인 서세원 씨가 목사가 된 건 놀라운 소식이었다. 놀라움의 나날을 보내는 건 아내 서정희 씨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감사하기만 해요. 남편이 목사가 되고 제가 전도사가 되는 날을 어디 꿈이라도 꿔봤겠어요, 제가. 저는 새벽기도만 같이 한 번 해봤으면, 하고 기도했어요. 그러니까 같이 사역하고 예배하는 게 정말 기뻐요.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벽 풍경은 이랬다. 새벽 세 시 반에 먼저 일어난 서정희는 커피를 끓이고 차에 시동을 걸어놓는다. 아침이니 블랙커피보다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은 커피를 준비한다. 남편을 깨워 미리 챙겨 둔 옷을 입힌다. 한 걸음 뗄 때마다 툴툴거리는 걸 달래가며 차에 태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운전하는 남편에게 커피를 건네고, 교회에 도착해서 주차할 때까지 서정희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그래도 함께 새벽 예배를 드리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 무너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무너졌을지 모르지만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 복이라는 것은 물질이 아니었고, 명예나 이름도 아니었습니다. (…)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또 하나의 힘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제가 남편을 너무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서정희의 주님》 中
현재 부부가 사역하는 교회는 '솔라 그라티아'다.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다. 두 사람은 모든 사역을 무보수로 한다. 솔라 그라티아 교회는 소규모 공동체다. 앞으로도 규모를 키울 생각은 없다고 했다. 이들의 목적은 '선교'이기 때문이다. 사역이 필요한 곳이라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몸집은 가벼울수록 좋다. 그리고 선교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스스로 충당한다. 비행기 삯도 식비도 수고비도 받지 않는 게 두 사람이 세운 원칙이다.
"지난 5년 동안 저희가 300회가 넘는 간증 집회를 다녔어요. 그때도 사례비는 받지 않았어요. 시간이 지나고 나니 간증(내 이야기)보다는 복음(성경 이야기)을 전하고 싶었고, 그게 신학을 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서세원 씨는 목사까지 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제가 계속 권했죠. 전도사일 때는 말씀은 서세원 씨가 전하고 축도는 다른 목사님이 하셨거든요. 목사 안수받고 교회 개척하고 동역하면서, 이제는 제가 좀 함부로 해요. 이젠 막 대드는 거야. 한 마디 하면 열 마디하고.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까 제가 갱년기이기도 하고, 이제 다 이루고 나니까 잘 보일 이유가 없잖아요. 목사님이 잘못하면 자기만 욕먹지 뭐.(웃음) 지금은 제가 품지 않아도 돼요. 자기가 다 섰으니까."
자신이 전한 말씀에 대해 일점일획이라도 다른 게 섞이면 냉정하게 이야기해주는 아내를 보며 서세원 목사는 "저 사람이 요즘 PD의 영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조정의 은사를 받았는지 나를 자꾸 조정하려고 한다"면서.
유일한 스폰서 우리 딸 동주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서동주(30)와 아들 서미로(27)가 있다. 큰딸 서동주는 어릴 적 미국 이모 집에 놀러갔다가 미국 학생들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고 반해 유학을 결정한다. 딸의 책 《동주 이야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잘 나와 있다.
'마냥 신나 있던 나와 동생을 앉혀놓고 아빠는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는 아직 어리지만 너희 의견을 존중해서 보내주기로 한 거다. 단, 조건이 있다. 아빠는 외화 낭비하는 꼴은 절대 못 보니, 가면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라면 지금이라도 가지 않겠다고 말해."
"알았어, 아빠. 대신 우리도 조건이 있어. 앞으로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성적표 보여 달라고만 하지 마."
뭔가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지만 아빠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이윽고.
"그래, 약속할게. 대신 너희도 약속 지켜라."
딸은 13세에 페이스쿨로 유학한 뒤 세인트폴스쿨을 거쳐 미술 전공으로 웰슬리대학에 입학, 수학에 흥미를 느껴 MIT 순수수학 전공으로 편입, 졸업 후에는 세계 1위 경영대학원인 와튼스쿨에 입학했다. 지금은 유학 중 만난 여섯 살 연상의 사업가와 결혼해(사위 역시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MBA를 마친 수재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생활하고 있다.
"값비싼 건 거의 다 판 거 같아요. 패물이나 명품들은 거의 다 처분했어요. 싼값에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요. 급한 돈은 융자를 받기도 해요. 융자받기가 어려운데, 교회 일에 필요할 땐 융자도 잘돼요.(웃음) 그리고 제일 좋은 공급처는 우리 딸이에요. 딸이 미국, 프라하, 중국을 오가며 살고 있는데 그때마다 우리를 초대하거든요. 근데 딸만 보겠다고 가는 건 좀 아니잖아요. 그럼 꼭 가서 사역할 일이 생겨요. 얼마 전에는 딸이 베이징에서 선정한 사진작가 10인에 선정됐는데, '엄마 혹시 돈 필요해?' 하면서 그 상금을 붙여줬어요. 그때 교회에 꼭 필요한 돈이 있었는데 시기가 딱 맞았죠."
물질만이 아니다. 잘 키운 딸과 아들은 부부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미로밴드'라는 이름으로 그룹 활동을 했던 아들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다니다 올해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다. 아들의 학비 역시 딸이 지원해주었다는 훈훈한 소식이다.
"사실 저는 시집을 너무 일찍 왔잖아요. 스물한 살에 큰애 낳고, 스물다섯 전에 이미 출산을 끝냈으니까.(웃음) 애들 키우고 집 안 돌보는 게 제 전부였어요. 바깥일을 전혀 안 해서 사회성이 없어요. 생활 패턴도 집, 교회, 목욕탕이 전부니 얼굴이 안 좋으려야 안 좋을 수가 없고요. 근데 성경의 얼굴이 있어요. 해같이 빛나고 그 사람을 바라보면 내 영이 정화되는 거 같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 거지, 동안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저도 흰머리 염색하고 돋보기 끼고, 나이 50 넘으면 남들 하는 거 똑같이 해요. 또 제가 전도사 됐다고 입던 걸 안 입으면서 갑자기 검소하게 전도사님 옷 입고 나서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우리 성도님들이 옷 입는 거에 자유로워졌대요. 사모님이 예쁘다 그러고 칭찬해주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을 때는 이 땅의 모든 것이 예쁘게 보였기 때문이에요. 그걸 누가 취하느냐의 문제죠. 우리 목사님 옷 잘 입잖아요. 그런 것도 밖에 몰래 나가서 사는 것보다 정직하게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잘될 때도 협찬을 안 받았어요. 버는 만큼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은 연예인일때 보다 더 잘 입어야 한다. 믿는 자로서 더 멋지게 입어야 한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은 더 멋지셔야 합니다. 저는 옛날 거 입지만, 목사님은 가끔 사셔야 합니다.' 이렇게 부추겨요. 제일 중요한 건 내면의 정결함이에요. 집에서나 나와서나 교회에서나 우리가 똑같은 사람이면 더없이 좋겠고요."
- 딸 서동주가 그린 어릴 적 서세원·서정희 가족의 모습. 동생은 엄마 배 속에.있는 모습 그대로
"저는 잘될 때도 뭔지 모르게 위축돼 있었어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누굴 속이거나 한 일도 없는데 사람들이 안 좋게 보거나 사실과 다른 소문들이 많이 났으니까요. 성형 중독이라더라, 서세원이 도박에 빠졌다더라, 애들 학교는 기부금으로 보냈다더라, 뭐 그런. 그런데 지금은 반성을 해요. 저도 힘들 때는 다른 사람들 잘사는 것만 봐도 힘들더라고요. 제가 그동안 '나 잘하죠?' 이런 칭찬을 받고 싶어서 힘든 분들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닌가 싶었어요. 뒤의 스토리를 알면 돌 던질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 힘든 게 있고 스토리가 있고 그런 건데. 그런데 이젠 좀 선입견을 내려놓고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30년 산 주부로, 50년 산 자궁 없는 여자로. 제가 2004년에 자궁수술을 했고, 2006년에 가슴에서 종양을 발견해 2010년에 수술했거든요. 그러니까 가슴도 없고 자궁도 없고, 저는 여자가 아니랍니다.(웃음) 그런데 그런 걸 다 겪고도, 남편이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10년을 겪고도, 이렇게 웃으면서 살고 있어요."
그날, 예배에서 들은 서세원 목사의 설교는 이런 내용이었다.
광야(고난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원수의 공격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타이르고, 위로한다(호세아서 2장 14절 中). 만약 광야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목사가 되지 않았을 거고, 하나님을 몰랐을 거다. 당뇨가 심해져 위험했을 수도 있다. 하루에 세 시간씩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이곳이 나에게 은혜로구나.
대한민국에서 서세원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도 잘 알 것이다. 상처는 상처를 알아본다. 그가 하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는, 겪어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서정희 전도사가 왜 인터뷰 전에 먼저 예배에 와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말을 하기는 쉽다. 손가락질하기는 더 쉽다. 소문은 빠르고 인터넷은 더 빠르다. 인터뷰 두 시간, 예배 두 시간으로 두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서정희 전도사는 기자에게 "인터뷰보다 오늘의 만남이 더 중요하다. 내 앞의 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니까."라고 말했고, 서세원 목사는 예배의 끝에 거기 모인 서른 명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정성껏 기도해주었다. 지난 10년 동안 부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는 모른다. 다만 2012년 두 사람을 만난 그곳에는, 사랑이 있었다.
- 솔라 그라티아 교회의 주보. 매 주 서정희가 직접 만드는 Hand Made 작품이다.
2월 2일, 영화감독 서세원 씨가 목사 안수를 받고 청담동의 작은 교회를 개척했다는 소식이 한 케이블 채널을 통해 알려졌다. 부인인 서정희 씨는 전도사로 함께 사역 중이라고 했다. 그 후 인터넷 뉴스는 서세원·서정희 부부의 근황 보도에 많은 부분이 할애됐다. 서세원 씨가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알려진 선교단체, 부부가 건물주로 있던 청담동의 빌딩에는 연일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청담동의 작은 교회'라는 단서만 가지고, 두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강남구청부터 압구정동까지 작은 교회들을 수소문하던 기자는 문득 서정희 씨에게 직접 연락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들이 쏟아졌고, 그만큼의 악성 댓글이 쏟아지던 때였다. 기자의 연락이 반가울 리 없었겠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세 개 정도의 메시지를 연달아 보낸 다음 날, 답장이 왔다. '대상포진으로 치료받는 중이라 회복되면 연락드리겠다'는 내용이었다. 할머니가 대상포진을 앓았던 터라 한 번 걸리면 꼼짝 못하고 끙끙 앓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머리로 번진 대상포진은 해산의 고통에 비교될 만큼 아픔이 크다고 한다. 몇 번의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며칠 뒤, '주일 5시 예배에 오세요.'라며 교회 주소를 보내주었다. 당분간은 어렵겠거니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이른 연락이 고마웠다.
그리고 찾아간 교회는 주소를 몰랐다면 찾을 수 없었을 곳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먼저 도착한 성도들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서세원 목사의 모습이 보였다. 예배 처소로 쓰이는 공간은 아담했다. 서른 개 정도의 의자가 있고, 왼편 앞에는 신디사이저 한 대, 높지 않은 강단에는 흰색 앉은뱅이 초들이 줄지어 있었다. 관찰을 멈추자 찬양이 시작됐다. 서정희 전도사는 오른쪽 맨 앞에 앉아 예배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찬양리더, 설교자를 도왔다. 이윽고 설교를 위해 서세원 목사가 강단에 섰다. 말씀과 기도 찬양과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5일 후, 솔라 그라티아 교회에서 서정희 씨를 만났다.
"저희가 여기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건 지난 5월부터예요. 그때 서세원 씨는 전도사였어요. 신학은 그 전부터 하고 있었어요. 미국에서 한 학기 하고 휴학하고 다시 듣고 하면서 모든 과정을 마쳤어요. 그 후로 한국에 와서도 함께 학교를 다니면서 (신학) 공부를 했고요. 이게 지금 하고 있는 공부 자료예요(A4 용지를 묶은 프린트 물은 낱권으로 성경 66권 중 한 부분씩을 정리해둔 것이다. 안에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 직접 쓴 손글씨가 빼곡하다). 한 번 시작한 건 열심히 하는 성격이고요. 그래서 학교에서 미움받아요. 숙제를 너무 열심히 하니까.(웃음) 그래도 (공부하는 걸) 외부에 알리지 못한 건 끝까지 완주하지 못할까 걱정돼서였어요. 그렇다고 굳이 저희가 숨기고 다닌 건 아니고요. 쭉 아무 이야기가 없다가 갑자기 2월에 보도가 돼서 저희도 놀랐어요. 남편 집행유예가 딱 끝나는 날이 2월 5일이에요. 법적인 거는 금요일에 딱 끝났는데, 그날 인터넷에 쫙 퍼진 거예요."
개그맨이자 영화감독인 서세원 씨가 목사가 된 건 놀라운 소식이었다. 놀라움의 나날을 보내는 건 아내 서정희 씨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감사하기만 해요. 남편이 목사가 되고 제가 전도사가 되는 날을 어디 꿈이라도 꿔봤겠어요, 제가. 저는 새벽기도만 같이 한 번 해봤으면, 하고 기도했어요. 그러니까 같이 사역하고 예배하는 게 정말 기뻐요.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벽 풍경은 이랬다. 새벽 세 시 반에 먼저 일어난 서정희는 커피를 끓이고 차에 시동을 걸어놓는다. 아침이니 블랙커피보다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은 커피를 준비한다. 남편을 깨워 미리 챙겨 둔 옷을 입힌다. 한 걸음 뗄 때마다 툴툴거리는 걸 달래가며 차에 태운다. 졸린 눈을 비비며 운전하는 남편에게 커피를 건네고, 교회에 도착해서 주차할 때까지 서정희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그래도 함께 새벽 예배를 드리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예전에 저는 새벽에 일어나 예배를 가려다가도 남편이 '어디 가. 들어와!' 그러면 짐 놓고 들어갔어요. 교회에 못 가게 하면 집에 있다가 남편이 촬영가면 가고요. 남편이 교회에 다니지 않아 힘들어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요. 울면서 기도하는 자매님한테는 '가정을 더 잘 돌보세요.' 그래요. 아이도 더 잘 돌보고 놀러 가자 그러면 얼른 맛있는 거 싸서 나가고, 그럼 감동되는 순간이 올 거예요.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서세원·서정희 부부는 2005년 12월 24일에 집사 안수를 받았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들이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다. 2002년 서세원이 제작한 영화 < 조폭 마누라 > 는 크게 흥행했고, 큰 성공을 가져다줬다. 당시 그가 진행하던 < 서세원 쇼 > 는 톱스타만 출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토크 프로그램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미다스의 손'이라 부르며 치켜세웠고, 주변엔 사람이 몰렸다. 그러나 소속 연예인 홍보와 세금 관련 문제로 수사가 시작됐고, 2003년 10월에 구속됐다. 정상에서 한 걸음 내딛자 낭떠러지였다. 서세원은 《서정희의 She is at Home》 책 서문에서 구치소에 있는 동안 '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아내다. 그동안 함께해준 아내,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준 아내. 지난 25년 동안 잘못했다면 앞으로 25년은 아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조건, 끝까지 함께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 무너졌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무너졌을지 모르지만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 복이라는 것은 물질이 아니었고, 명예나 이름도 아니었습니다. (…)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또 하나의 힘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제가 남편을 너무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서정희의 주님》 中
현재 부부가 사역하는 교회는 '솔라 그라티아'다.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다. 두 사람은 모든 사역을 무보수로 한다. 솔라 그라티아 교회는 소규모 공동체다. 앞으로도 규모를 키울 생각은 없다고 했다. 이들의 목적은 '선교'이기 때문이다. 사역이 필요한 곳이라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몸집은 가벼울수록 좋다. 그리고 선교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스스로 충당한다. 비행기 삯도 식비도 수고비도 받지 않는 게 두 사람이 세운 원칙이다.
"지난 5년 동안 저희가 300회가 넘는 간증 집회를 다녔어요. 그때도 사례비는 받지 않았어요. 시간이 지나고 나니 간증(내 이야기)보다는 복음(성경 이야기)을 전하고 싶었고, 그게 신학을 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서세원 씨는 목사까지 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제가 계속 권했죠. 전도사일 때는 말씀은 서세원 씨가 전하고 축도는 다른 목사님이 하셨거든요. 목사 안수받고 교회 개척하고 동역하면서, 이제는 제가 좀 함부로 해요. 이젠 막 대드는 거야. 한 마디 하면 열 마디하고.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까 제가 갱년기이기도 하고, 이제 다 이루고 나니까 잘 보일 이유가 없잖아요. 목사님이 잘못하면 자기만 욕먹지 뭐.(웃음) 지금은 제가 품지 않아도 돼요. 자기가 다 섰으니까."
자신이 전한 말씀에 대해 일점일획이라도 다른 게 섞이면 냉정하게 이야기해주는 아내를 보며 서세원 목사는 "저 사람이 요즘 PD의 영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조정의 은사를 받았는지 나를 자꾸 조정하려고 한다"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서동주(30)와 아들 서미로(27)가 있다. 큰딸 서동주는 어릴 적 미국 이모 집에 놀러갔다가 미국 학생들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고 반해 유학을 결정한다. 딸의 책 《동주 이야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잘 나와 있다.
'마냥 신나 있던 나와 동생을 앉혀놓고 아빠는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는 아직 어리지만 너희 의견을 존중해서 보내주기로 한 거다. 단, 조건이 있다. 아빠는 외화 낭비하는 꼴은 절대 못 보니, 가면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라면 지금이라도 가지 않겠다고 말해."
"알았어, 아빠. 대신 우리도 조건이 있어. 앞으로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성적표 보여 달라고만 하지 마."
뭔가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지만 아빠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이윽고.
"그래, 약속할게. 대신 너희도 약속 지켜라."
딸은 13세에 페이스쿨로 유학한 뒤 세인트폴스쿨을 거쳐 미술 전공으로 웰슬리대학에 입학, 수학에 흥미를 느껴 MIT 순수수학 전공으로 편입, 졸업 후에는 세계 1위 경영대학원인 와튼스쿨에 입학했다. 지금은 유학 중 만난 여섯 살 연상의 사업가와 결혼해(사위 역시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MBA를 마친 수재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생활하고 있다.
"값비싼 건 거의 다 판 거 같아요. 패물이나 명품들은 거의 다 처분했어요. 싼값에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요. 급한 돈은 융자를 받기도 해요. 융자받기가 어려운데, 교회 일에 필요할 땐 융자도 잘돼요.(웃음) 그리고 제일 좋은 공급처는 우리 딸이에요. 딸이 미국, 프라하, 중국을 오가며 살고 있는데 그때마다 우리를 초대하거든요. 근데 딸만 보겠다고 가는 건 좀 아니잖아요. 그럼 꼭 가서 사역할 일이 생겨요. 얼마 전에는 딸이 베이징에서 선정한 사진작가 10인에 선정됐는데, '엄마 혹시 돈 필요해?' 하면서 그 상금을 붙여줬어요. 그때 교회에 꼭 필요한 돈이 있었는데 시기가 딱 맞았죠."
물질만이 아니다. 잘 키운 딸과 아들은 부부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미로밴드'라는 이름으로 그룹 활동을 했던 아들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다니다 올해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다. 아들의 학비 역시 딸이 지원해주었다는 훈훈한 소식이다.
"사실 저는 시집을 너무 일찍 왔잖아요. 스물한 살에 큰애 낳고, 스물다섯 전에 이미 출산을 끝냈으니까.(웃음) 애들 키우고 집 안 돌보는 게 제 전부였어요. 바깥일을 전혀 안 해서 사회성이 없어요. 생활 패턴도 집, 교회, 목욕탕이 전부니 얼굴이 안 좋으려야 안 좋을 수가 없고요. 근데 성경의 얼굴이 있어요. 해같이 빛나고 그 사람을 바라보면 내 영이 정화되는 거 같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한 거지, 동안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저도 흰머리 염색하고 돋보기 끼고, 나이 50 넘으면 남들 하는 거 똑같이 해요. 또 제가 전도사 됐다고 입던 걸 안 입으면서 갑자기 검소하게 전도사님 옷 입고 나서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우리 성도님들이 옷 입는 거에 자유로워졌대요. 사모님이 예쁘다 그러고 칭찬해주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을 때는 이 땅의 모든 것이 예쁘게 보였기 때문이에요. 그걸 누가 취하느냐의 문제죠. 우리 목사님 옷 잘 입잖아요. 그런 것도 밖에 몰래 나가서 사는 것보다 정직하게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잘될 때도 협찬을 안 받았어요. 버는 만큼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은 연예인일때 보다 더 잘 입어야 한다. 믿는 자로서 더 멋지게 입어야 한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은 더 멋지셔야 합니다. 저는 옛날 거 입지만, 목사님은 가끔 사셔야 합니다.' 이렇게 부추겨요. 제일 중요한 건 내면의 정결함이에요. 집에서나 나와서나 교회에서나 우리가 똑같은 사람이면 더없이 좋겠고요."
"저는 잘될 때도 뭔지 모르게 위축돼 있었어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누굴 속이거나 한 일도 없는데 사람들이 안 좋게 보거나 사실과 다른 소문들이 많이 났으니까요. 성형 중독이라더라, 서세원이 도박에 빠졌다더라, 애들 학교는 기부금으로 보냈다더라, 뭐 그런. 그런데 지금은 반성을 해요. 저도 힘들 때는 다른 사람들 잘사는 것만 봐도 힘들더라고요. 제가 그동안 '나 잘하죠?' 이런 칭찬을 받고 싶어서 힘든 분들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닌가 싶었어요. 뒤의 스토리를 알면 돌 던질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 힘든 게 있고 스토리가 있고 그런 건데. 그런데 이젠 좀 선입견을 내려놓고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30년 산 주부로, 50년 산 자궁 없는 여자로. 제가 2004년에 자궁수술을 했고, 2006년에 가슴에서 종양을 발견해 2010년에 수술했거든요. 그러니까 가슴도 없고 자궁도 없고, 저는 여자가 아니랍니다.(웃음) 그런데 그런 걸 다 겪고도, 남편이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10년을 겪고도, 이렇게 웃으면서 살고 있어요."
그날, 예배에서 들은 서세원 목사의 설교는 이런 내용이었다.
광야(고난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원수의 공격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타이르고, 위로한다(호세아서 2장 14절 中). 만약 광야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목사가 되지 않았을 거고, 하나님을 몰랐을 거다. 당뇨가 심해져 위험했을 수도 있다. 하루에 세 시간씩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이곳이 나에게 은혜로구나.
대한민국에서 서세원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도 잘 알 것이다. 상처는 상처를 알아본다. 그가 하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는, 겪어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서정희 전도사가 왜 인터뷰 전에 먼저 예배에 와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말을 하기는 쉽다. 손가락질하기는 더 쉽다. 소문은 빠르고 인터넷은 더 빠르다. 인터뷰 두 시간, 예배 두 시간으로 두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서정희 전도사는 기자에게 "인터뷰보다 오늘의 만남이 더 중요하다. 내 앞의 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니까."라고 말했고, 서세원 목사는 예배의 끝에 거기 모인 서른 명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정성껏 기도해주었다. 지난 10년 동안 부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는 모른다. 다만 2012년 두 사람을 만난 그곳에는, 사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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