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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월리엄캐리 下.

Joyfule 2007. 9. 19. 03:45

선교사 월리엄캐리 下.

 

Ⅱ.위대한 시도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그는 인도영혼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안고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러자 그 길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났습니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 였습니다. 아버지는 캐리의 말을 듣고 딱 한마디 했습니다. '미친놈'. 둘째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의 아내도 촌사람 곧 촌녀 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공주병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는 아기캐리한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그녀는 캐리에게 '여보, 인도는 절대로 안돼요, 제발 우리 아기들도 좀 생각해 주세요...엉엉엉'. 여자가 눈물을 흘릴 때, 갈대와 같은 남자의 마음은 얼마나 흔들리기가 쉽습니까? 그러나 캐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그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이제 돌이킬 수가 없소.' 캐리는 사랑하는 가족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셋째는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하비레인 교회의 성도들은 캐리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잃는다는 생각으로 교회의 장래를 위해 절대로 목사님을 보내지 않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간절히 기도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캐리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그는 사랑하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들이 인도땅에 도착했을 때, 인도는 선교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힌두과부들은 사티(Sati)라는 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함께 불에 타야했고, 갠지스 강가에Gunga mai kai jai (갠지스강의 여신이여 영광을 받으소서)'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가 득실한 강에 던지는, 그런 미신이 가득한 나라였습니다. 또, 당시 인도는 동인도 회사의 점령아래 있었고, 선교를 절대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캐리는 추방을 면하기위해 내륙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은 말라리아 창궐한 곳이었습니다. 아내 도로시와 큰아이 2명은 이질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한 아들을 잃게 되었고, 아내는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열대기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고난이 되었습니다. 캐리는 멋지게 선교를 하려던 이상적인 꿈이 , 산산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캐리는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며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을때, 나의 모든 근심을 내어맡길수 있었습니다. 내가 설사 이곳에서 생명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나에게 이 고귀한 사명이 맡겨진 사실만으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습니다.'

캐리는 자비량 선교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결코 본국의 선교회를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인디고 공장의 감독으로 취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캐리는 충분한 선교비를 벌면서 선교의 기초가 되는 인도어 정복에 온힘을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1년후부터 그의 위대한 시도가 구체화 되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캐리는 성경번역과 더불어 말씀을 전파하고 또 여러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벵갈에서 7년간 땀흘렸지만 단 한명의 인도인 개종자가 없었습니다. 큰 아픔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인도 회사의 추방령으로 캐리는 선교기지를 덴마크 영내인 세람포르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캐리가 인도에서 흘린 모든 눈물과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쉬나 팔이라는 첫 번째 개종자가 탄생했습니다. 그가 카스트제도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2천명의 군중이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나 그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고 수천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승리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세람포르 역사가 흥왕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합심동역에 있었습니다. 캐리와 워드와 마쉬만, 그들은 세람포르의 삼총사라 불리웠는데,23년간 팀을 이루어 서로간의 긴밀한 사랑의 교제로 힘을 얻으며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대형화재로 인해 수년간 작업하여 완역한 성경원고와 두권의 문법책,다국어 사전들이 소실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캐리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삼총사는 팀웍을 새로이 갖추고 다시 도전했습니다. 캐리는 편지에 '잃어버린 것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길을 두번 가는 것이 비록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 처음보다 훨씬 더 충실한 결과를 낳아 더 유익이 될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벌써 다시 시작했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낙망치 않고 도전하여 결국 수 많은 인도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했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이처럼 그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함으로 인도선교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캐리는1834년 73세의 일기로 그토록 사랑했던 인도땅에 묻혔습니다. 윌리암캐리는 그의 그칠줄 모르는 열정과 도전 spirit으로 18세기 침체된 영국을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댕긴 위대한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그의 믿음으로 근대선교역사가 시작되었고 19세기 선교황금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그 자신이 인도의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 근대 선교의 문을 활짝 연 근대선교의 아버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