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기본교리.
성령의 약속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오순절회- Anthony D.Palma Th.D., 31년 동안 하나님의 성회 신학교를 비롯하여 아메리칸 인디안 바이블 칼레지,센트럴 바이블 칼레지, 에반젤 칼레지, 사우스이스턴 칼레지, 밸리 포지 크리스챤 칼레지 등 유수한 대학에서 가르쳤다.
오순절의 사건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대로 수 천년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절정을 이루었다. 새 언약을 세우심은 성령시대의 시작을 알리 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약속하셨다. " 또 새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 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36장 26절 27절)
하나님께서는 요엘을 통해서도 약속 하셨다. "그 후에 내가 내신을 만인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 (2장 28절 29절)
이 예언에 따라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시대의 새벽을 알리기 위해 강림하셨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 4세기 동안은 이스라엘은 의미있는 예언의 소리가 없었다. 모든 실질적인 목적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성령께서 눈에 보이게 역사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이 상황은 극적으로 변한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해 이 땅에 오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모 마리아에게 성령을 임하게 하사 약속을 이루셨다.(마태복음 1장 18절20절,누가복음 1장 35절)
성령이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역사하셨다 ! 어떤 관점에서는 성령에 의한 예수님의 동정녀 임신은 새 언약이 발효됨을 나타내는 표적이 었다. 예수님의 탄생 직전과 직후에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성령의 강림은 새 시대의 새벽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은 성령의 두 가지 일을 확실하게 구별한다. --- 거하심과 능력 주심. 성서신학자들은 자주 이것들은 성령 역사의 내재적인 측면과 능력적인 측면으로 간주 한다. 세례 요한은 그의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성령 충만함을 입었다.(누가복음 1장 15절, 41절) 성령이 사가랴 (누가복음 1장 67절)와 시므온 (누가복음 2장 25절)에게도 임하셨다. 누가는 안나가 선지자였다고 지적한다. (누가복음 2장 36절)
새 시대 -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오순절날 성령 충만 사건이 있기까지는 완수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과 사도들에게 성령 강림 사건 사이에도 성령은 요단강 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부터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고 계셨다.(마태복음 3장 16절) 성령은 예수님께서 그의 땅에서의 사명을 완수 하시는 동안 예수님을 통해 활동하시며, 예수님 위에 강림하신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성령을 거하게 하시고 권능을 주셨던 모든 신자들의 모범으로 봉사하셨다.
에스겔과 요엘의 예언으로 돌아가자. 에스겔을 통해 주신 약속은 새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거하심을 경험하게 되리라. 그들은 새 마음과, 새 영을 받게 되리라. 너희 안에 성령이 거하심으로 인해 너희는 똑바로 걸을 수 있으리라.
요엘을 통해 주신 약속은 다른 성질을 띄고 있다. 요엘의 예언에서 성령 충만은 예언, 꿈, 이상을 보는 성령 충만 받는 자의 극적 본성에 관한 것 이다. 요엘의 예언은 모세가 민수기 11장 29절에서 말한대로 "여호와께서 그 신을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 인 그의 희망과 비슷하다. 성령의 강림은 새 시대의 새벽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은 성령의 두 가지 일을 확실하게 구별한다. --- 거하심과 능력 주심. 성서신학자들은 자주 이것들은 성령 역사의 내재적인 측면과 능력적인 측면으로 간주한다. 전자는 부활과 성령의 계속적 거하심과 연관된다. 후자는 몇 가지 이상으로 의미되는 권능을 주는 것과 연관된다.
구약과 신약에서의 성령의 역사하심의 경험 사이에는 하나의 뚜렷한 다른 점이 나타나있다. 구약시대에 성령은 몇 안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졌고 대개는 예언의 목적으로 역사하셨다. 신약에서는 성령이 모든 신자에게 강림하신다. 사실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거하심 없이 신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로마서 8장 9절, 14 - 16절) 하나님의 뜻은 모든 신자들이 성령의 거하심과 능력 주심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성령의 이 두 작용은 새 약속과 연관이 된 한 성령 역사의 서로 다른 두 측면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 것 같다.
게다가 모든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성령에 의해 권능을 받은 것 같다.(사도행전 1장 8절) 하나님의 뜻은 모든 신자들이 성령의 거하심과 능력 주심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성령의 이 두 작용은 새 약속과 연관이 된한 성령 역사의 서로 다른 두 측면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 것 같다.
사실 신약성경은 고넬료의 집에서 처럼 이 두가지 성령의 역사가 거의 동시에 경험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사도행전 10장 44 - 46절) 이 사람들 이 언제 중생하였는지 확실한 시점을 결정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그들이 믿고 성령 충만 받은 것은 베드로의 설교중인 것처럼 보인다.
이 두가지 경험은 신학적으로는 구별될 수 있으나 시간적으로는 분리될 필요가 없다. 중생과 성령 충만 사이에 시간 간격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중생을 주시 는 성령 역사의 기초적 면만을 경험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 이 중생으로 해서 성령은 그들 안에 거하시게 된다. (요한복음 14장 17절)
성령의 두 번째 역사에 대한 용어는 매우 다양하다. 오순절 신자들은 대개 성령 세례라고 정의 한다. 그들은 이렇게 부르는데 대한 확고한 성경 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세례 요한의 증거 (마태복음 3장 11절) 이외에도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다.(사도행전 1장 5절)
그러나 누가가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그 약속의 수행에 대해 기록할때 그는 "그들 모두는 성령 충만되었다." 라고 썼다. 그러므로 이 성령으로 충만되는 최초의 경험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경험에 대해 다른 곳에서 언급할 때 누가는 성령이 사람들 "위에 (upon) 온다,혹은 떨어진다"(사도행전 1장 8절, 8장 16절, 10장 44절, 11장 15절, 19장 6절)라고 표현했다. 가끔은 성령을 사람들에게 부어 준다라고 표현했다. (사도행전 2장 1718절, 10장 45절)
이 두번 째의 성령 체험을 어떻게 규정하건 간에 성령 충만 받은 자가 성령 충만 전에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얻지 못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성령이 거하지 않는 신자란 존재할 수 없어서 모순된 두 단어의 나 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라고 불리우는
"세례받다.", "충만되다.", "부으심을 받다."는 표현들은 신자가 완전히 성령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다른 것들 가운데, 이미 거하신 성령의 역사가 성령 충만의 경험으로 인해 고조되고 강해진다.
성령 충만 받는 역사를 경험하지 않는 신자들도 있을 수 있다. 성령 세례에 대한 경험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들은 문자 그대로 다루어져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단지 성경 기록자들이 그 경험의 의미를 독 자가 더 잘 이해 할 수 있도록 돕기위한 일환으로 만든것일 뿐이다.
"세례받다.", "충만되다.", "부으심을 받다."는 표현들은 신자가 완전히 성령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다른 것들 가운데, 이미 거하신 성령의 역사가 성령 충만의 경험으로 인해 고조되고 강해진다. 오순절 날의 성령 부으심은 요엘의 예언과 연관된다.(사도행전 2장16절 - 21절) 구약 시대에 성령이 남,녀에게 내리면 예언을 하게 되었듯이 요엘은 모든 육체에 영을 부으시면 그들은 예언을 하게 되리라고 말하였다.
요엘은 또한 오순절 날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 성령이 임하신 것을 알 수 있는 다른 표식에 관해 말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언의 요 소를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요엘의 말을 인용하고 나서 그 자신의 말을 덧붙이기를 "그리고 그들은 예언을 하게 되리라." 고 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베드로는 예언이 성령의 부으심과 동반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사도들은 예언을 하였는가 ? 누가는 우리에게 그들이 방언을 하였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2장 4절) 오순절 전에는 성령의 충동에 의해 방언을 말한 기록이 전혀 없다. 방언을 하는 것과 예언을 하는것 을 우리는 어떻게 연관지을 것인가 ? 예언이 성령의 직접적인 충동에 의해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것은 정확히 본질적으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똑같다. --- 성령의 충동 아래 말을 하는 것 혹은 누가가 우리에게 말한 것 처럼 "성령이 그들에게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이다.(사도행전 2장 4절)
예언과 방언의 확실히 다른 점은 예언은 예언하는 사람이 구사할 줄 아는 언어로 하나 방언은 그가 구사할 수 없는 언어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언은 예언의 특별한 형태이다. 방언은 예언의 특별한 형태이다.성령 세례 받은 경험은 방언 말함을 수반한다!! 성령 세례를 받은 경험은 방언을 말하는 것을 수반하다. 이 점에서 많은 논쟁이 발생하며, 오순절 학자들은 매우 적절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두 세 문단만 살펴보면 달성된다.
사도행전 2장 4절에서 주어는 "모두"이다. (그리스어로는 pantes) 문법적으로 분석해 보면 하나의 주어가 두 개의 구에 다 작용되고 있어 그 문장 의 명확한 의도는 "모두 성령 충만되어 모두 방언을 하였다."라는 것이다. 만약 모두 다 성령 충만 받아서 그 중 몇이 방언을 하였다고 말하려 하였다면 누가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성령 충만 받은 자가 모두 방언은 하였다는 것이 확실하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셨다."고 하였다.(44절) 이방인들이 성령 충만 받음을 보고 놀란 베드로를 따르던 신자들은 "그들이 방언을 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었기 때문에 성령 부으심이 일어 났다는 것을 알았다.(46절)
46절은 " --- 하기 때문에" 혹은 "왜냐하면"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이스어 접속사 "gar"를 처음 사용하였다.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 정말 성령 충만되었음을 그들에게 확신 시킨것은 바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에서의 증거는 방언이 성령 세례의 필수적 수반자(隋伴者)임을 암시한다 "왜 방언을 해야하나?" 하는 질문이 간혹 제기된다. 3가지의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새 시대의 표적이다. 우리가 사도행전 2장의 관점에서 요엘의 예언을 읽을 때 이것이 확실해진다. 우리가 성령이 거하심과 능력 주심이 성령의 한 역사의 두 얼굴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개인적 측면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은 그 신자가 새 시대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방언을 말하는 것은 교회의 선교 의무를 강력하게 시사한다.복음의 교신수단이 언어이므로 방언을 하는 것은 선교를 쉽게 해 줄 것이다. 그렇다고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이 복음을 설교할 외국어 구사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들이 성령 충만 되었을 때 말하는 언어가 다양한 것은 교회의 선교 의무를 암시적으로 일깨워 줄 뿐이다. 신약 성경에 언급된 모든 성령의 나타남과 은사 중, 신자가 자기 자신을 계발하는 것과 연관된 것은 방언 뿐이다. 다른 모든 나타남과 은사는 교 회의 부흥에 관한 것이다.
셋째, 방언을 말하는 것은 신자가 그 자신을 영적으로 구별하는 수단이 된다.(고린도전서 14:4) 신약 성경에 언급된 모든 성령의 나타남과 은사중, 신자가 자기 자신을 계발하는 것과 연관된 것은 방언 뿐이다. 다른 모든 나타남과 은사는 교회의 부흥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계발되어질 수 있는 어떤 수단으로부터도 하나님의 자식들을 격리시켜 놓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고린도전서 12:30)라는 바울의 질문에 대해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모순이 되지 않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 14장에서 바울은 은사의 대중적인 측면과 협조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통역의 은사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회중에서만 방언을 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모 두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방언을 사적으로 연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성령의 한 역사의 두 측면 --- 중생과 성령 충만은 구약성경에서의 성령의 약속에 포함되어 있다.
각 각은 서로를 보완한다. 중생은 인간의 마음과 생활을 바꾸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성령 세례는 능력 주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모든 신자들은 성령의 중생의 역사를 경험한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 모두는 그의 능력 주심을 경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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