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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여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Joyfule 2023. 6. 5. 09:49



 

 

 

    기독교 기본교리.

성령이여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김원배(목사:기장신학연구소 소장)

      눅 14:15-24롬 8:26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예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에서 대잔치가 파기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잔치를 마련한 주인이 노력을 안했거나 어떤 것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니 잔치를 마련한 주인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이 축하 잔치를 마련한 주인을 대노(大怒)하게 만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초청 받은 자들의 거절로 말미암아 잔치가 취소될 위험에 직면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본래적인 의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치가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 잔치는 정해진 시간에 아무런 착오 없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직 초청 받은 자만이 그 자리에 없을 뿐입니다. 초청한 주인이 화를 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주인의 이 분노야말로 우리들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분노함은 취소가 불가피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우리의 예상을 뒤엎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가지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논리를 깨고 전혀 다른 논리를 펴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논리입니다. 즉 사랑의 진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혁명입니다. 대노한 집주인은 그의 종에게 "어서 거리와 도시의 골목길로 가서 가난한자 불구자 절름발이와 장님을 불러오라"고 명령합니다.

      II

      왜 주인은 잔치를 취소하지 않고 가난한 자와 불행한 자를 잔치에 초대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들려주는 잔치비유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명예를 걸고 잔치를 여셨습니다. 그러나 초청 받은 자들의 핑계로 말미암아 잔치의 개최 여부가 의문에 부쳐지자 하나님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치는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것이 오늘 비유의 핵심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명예는 시간이 됐을 때 잔치가 열림으로써 보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주인의 분노는 하나님의 명예가 문제시됐을 때 하나님의 혁명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방식과 형태를 묘사해 줍니다. 하나님은 그의 명예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인간들 이 실패하는 현실 속에 관여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초청 받은 사람들의 반역에 직면하여 참으로 초청에 응할 자격이 없는 모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이 비유에 나타난 사람들의 모습을 더 자세히 검토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쉽게 갖가지 우상들에 의해 대치되어져 버리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신(神)으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형상에 따라 신들을 만들려하고 그리하여 주인 없는 세상을 우상신으로 채우려 합니다. 우상을 생산하는 성격은 오늘의 비유에서처럼 소유(Haben)라고 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만찬에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노라고 자부하던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극히 소유 지향적인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실제적인?) 욕심에 떨어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을 찾아야 하는데 결국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는 데로 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기주의적인 행위를 통하여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는 소유의 관계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밭, 소, 결혼과 같은 것에 의해 하나님이 대치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대상(對像)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유하겠다는 욕심과 더불어 우상 생산이 시작됩니다. 이로써 인간의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관계는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소유하려고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상 뿐입니다. 하나님은 소유하는 순간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을 물질화 함으로써 인간들의 사고와 행동도 물질화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제 인간들 에 의해서 생산된 우상들은 인간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간이 신을 소유하고자 했으나 사실상 우상에 의해 소유되어 버리 고 노예화 되어버리고 맙니다. 동시에 이러한 물화(物化)는 인간들의 소외-하나님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유에서 보는 것처럼 초청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유에 얽매여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III

      오늘 비유에 나오는 세 사람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류의 모습이면서 오늘의 세계를 대표하는 이데올로기들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의 생각으로는 밭을 샀던 사람은 흡사 인간의 죄성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잘못된 사회 구조만을 바꾸면 된다고 믿었던 동구권의 몰락한 사회주의의 모습과 비교하고 싶고, 소를 산 사람은 소를 통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산을 해서 혹은 소의 젖을 짜내 팔아 자본을 축적하면 된다고 믿는 이 시대 자본주의자들의 모습과 비교하고 싶고, 끝으로 결혼한 사람의 모습에서는 중세기에는 봉건체제와 오늘에 와서는 시민문화체제와 깊숙히 결합해 버린 기독교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비유는 이러한 우상들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진정한 초청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그의 선택받은 백성들의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 의 사랑은 변치 않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새로운 그의 백성을 선택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는 역사를 계속하시는 혁명의 형태로 전개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배반하는 역사 속에서도 오늘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은 새로운 백성들을 선택함으로써 그의 나라의 역사를 계속하시고자 합니다.

      그런데 새로 오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주역이 될 사람들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이 세상의 질서에서는 거의 버림을 받은 자들입니다. 절름발이, 불구자, 가난한 사람들이 새 나라를 엮어갈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에서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정의롭지 못한 구조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역사의 한 가운데 간섭하여 그의 명예로운 초청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파경에 이르게 된 구원 역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초청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그의 구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의 명예가 실추 될지도 모르는 위기를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꾸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유욕에 사로잡혀 구원섭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에게까지도 열려있는 새 미래와 희망을 창조하십니다. 새로 열린 세계에서는 지금까지 잘못된 가치와 구조 속에서 소외를 당하고 고난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의 기회가 놓여져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힘 센 사람들에 의해서 뿔뿔이 흩어졌던 가난한 사람들이 새로 열린 새 삶과 새 세계의 가능성 앞에서 다시 삶의 중심에로 초청 받습니다. 흩어진 힘없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으시는 이는 성령(聖靈)이십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신 성령은 모순과 부정으로 가득 찬세계의 한 가운데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새 삶과 새 역사의 탄생을 위하여 일하는 분이십니다. 세계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혁명을 일으키시는 성령은 실의와 절망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자유로운 구조를 형성하는 창조자이십니다.

      IV

      신학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성령론적 공시적 해석학(Pneumatological - synchronical Hermeneutics)"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까지 서구 신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만 발전시켜 온 한계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요 대안입니다. 서구 신학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성령의 역할을 의붓자식처럼 취급해 온 나머지 세계 역사 속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를 드러냈으며 성서 해석의 교리화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이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동역자로 부름 받는 사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우리들은 성서를 새롭게 읽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체를 새롭게 파악하도록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성령에 해당하는 '루아하'라는 말은 구약성서에 378번이나 나오고 신약성서에는 '프뉴마'와 '파라클레이토스'라는 말로 표기되고 있습니다.이 영(靈)은 믿는 자들을 하나님과 그리스도, 더 나아가 이웃과 세계로 결합시켜 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기도 한 이 영은 그의 활동영역이 넓기 때문에 다양한 형식으로 체험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죽은 자들이 새 생명을 얻고 세계는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머무는 사람은 예언자가 되고 역사에 임할 때 이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해방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이 영이 임할 때 어린이들과 청년들, 여인과 노인들이 꿈을 꾸고 비전을 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요엘 2:28). 이 영은 진리의 영으로서 죽음과 죄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종국적으로 이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는 역사의 원동력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이 영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우리 모두는 초청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살이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허무한 것들에 얽매어(롬8:20)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고 있는 우리와 지금도 함께 하시며, 함께 탄식하고 울며 기도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성령과 함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여 오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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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기본교리.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

(그로간, G.W. GROGAN)

      사도행전은 특히 성령의 사역이 부각되고 있는 책이다. 실로 성령의 사역이 본서를 지배하고 있다. 본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행전"으로 불리우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인격체이신 제3위 하나님 성령

      성령이 인격체이신 사실이 본서에서 분명해진다. 이는 그가 인격체만 할 수 있는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친히 말씀하셨고(1:16,8:29,10:19 등)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셨다(2:4,4:8,31등).그는 증거하셨고(5:32).그리스도의 일꾼들을 파송하셨으며(13:4),사도들을 교회의 직분에 세우기도 하셨다(20:28).그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계시며(15:28)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분명히 받아들여지셨다(5:3,9).

      그리스도의 사자

      사도행전 1:1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통해서 그의 사역을 계속하 셨음을 암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 자들에게 주신 선물이며 (2:23)."예수의 영"으로 불리우신다(16:7).그는 또 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으로도 불리우신다(1:4).

      교회의 창설자

      현재 우리는 아는 교회는 오순절날에 창설되었다.바람과 불(2:2-3)은 한나님의 임재의 대한 구약성경의 상징들이다(출19:18,왕상 19:11-12을 보라). 방언의 은사(2:4-13)는 갖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 서게 될 교회의 궁극적인 보편성을 상징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선정하여 베푸신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령께서는 사랑과 연합의 교제를 창조하셨고(2:43-46) 또 기독교 메시지의 응하는 사람들에게 임하실 것이 약속되었다(2:36,5:32도 역시 보라).

      확장되어가는 교회를 하나로 묶는 힘

      누가는 실제로 성령의 사역을 통한 복음의 진보와 그 결과적인 확산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오순절날의 교회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 (따라서 그들은 마치 유대인인 것처럼 계수되고 있다.2:10) 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대인들은 혼합된 인종과 분리된 종교의 문제로 인하여 사마리아인들 을 증오하였으나 사도행전 8:14-17에서 성령은 사마리아 신자들에게도 임하신다. 이 일이 (유대인)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한 후에야 일어난 것은 사도 들 편에서의 그들에 대한 사랑과 교제의 자세를 암시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요4:22)는 사실을 확증해주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은 사도행전 10:44-48(11:1-18도 역시 보라)에서 베드로의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전파를 통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순절날의 현상이 다시 나타났을 때 무너졌다.

      서영에 대한 약속이 처음으로 제시된 것은 세례요한을 통해서였다(마3:11-12 행1:511:16을 보라).그러므로 누가는 일단의 요한의 제자들도 역시 성령을 받게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19:1-7). 이 구절들은 성령께서 이 각각의 무리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으시고 이탈을 막으셨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증인들 배후의 권능

      성령이 교회에 선물로 주어진 것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8,4:33과 비교하여 보라).교회는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이방인들을 복음화할 선교사로 파송하였다(13:1-4).

      그것은 앞서 베드로에게 지시하여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경우와 같았다(10:19이하,8:29,16:6-7과도 역시 비교하여 보라).성령의 충만을 입은 그들은 능력있게 말하였고(4:8,31,6:10) 새교회의 생명과 증거의 여러 다양한 국면들 담대히 소개하였다(6:3,5,11:22-24).성령께서 사람들에게 말과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타낼 능력을 주셨다.

      교회의 생명

      하나님의 영은 각처 교회의 내적 생명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9:31).교회의 감독자(장로)들을 세우셔서 파수꾼으로 삼으신 이가 바로 성령이셨다(20:28).새 시대는 교회의 설립과 육성(15:32)및 장차 올 일들에 대한 예언(11:28,21:4) 에 관심을 갖는 예언의 시대(2:17-18)가 될 것이었다. 교회의 회의는 성령의 지도를 추구하였고 또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으로 믿었다(15:28).

      이와 같이 사도행전은 성령의 인격과 역할을 계시함에 있어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본서는 또한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 되는 완성 혹은 성취를 기록한 책이다.

      구약의 예언들과 성령에 대한 주 예수의 약속들은 오순절날에 온전히 성취되었다. 예수께서 전파하셨고 또 서신서들에 명백히 증거된 새 시대, 곧 성령의 시대는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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