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순교자 박연서 목사 (감리교)

Joyfule 2009. 6. 27. 01:08

순교자 박연서 목사 (감리교)

 

 

박연서 목사(1893-1950)


박연서목사는 1893년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 청담이란 곳에서 박성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고향마을 청담을 사랑해 일생을 청담이란 아호를 사용했다. 어려서는 8년동안 한문을 읽었고 1908년 그의 나이 16세가 되던 해에 보성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10년 3월 개성보창학교를 거쳐 1917년 6월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백모에게 기름을 받았던 그는 다정다감한 성격에 예수까지 믿게되자 폭넓은 아량을 가진 젊은이로 성장했다.

 피어선 성경학교에 재학시절부터 서석, 철원, 화천, 연천 등지에서 목회했던 그는 1919년에 일어났던 ‘철원애국단’연락 책임자로 연루되어 원산 형무소와 서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뤘다. 그의 인간성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최석주의 "내가 본 인생백경 박연서"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루고 나온 박연서는 연천읍교회에 시무하다가 1923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바로 이듬해 장감연합공의회 소속 선교사가 되어 일본 관서지방 거주한 교포들의 신앙문제와 권익문제를 위해 파송되었다. 관서지방 선교사로 4년 활동하다가 귀국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철원,화천, 연천, 서석, 포천 등지에서 교역을 했다.

 

기독신보가 계획대로 일간지로 돌아설 수 없자 박목사는 손을 떼고 목회일선으로 복귀해 선교교회, 원산상중앙교회, 서울 남산교회 등지에서 1948년까지 목회에 정진하면서 감리사 혹은 교구장 등을 역임하면서 감리교 법을 일괄 손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50년 몸이 쇠약하여 자택에서 요양하다가 6.25사변이 터져 그해 8월 23일 내무서원들에게 끌려가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어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수감 20여일만인 1950년 9월 20일 58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63년 3.1절 국가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유가족으로는 부인 차사라 여사와의 사이에 2남 4녀가 있다. 아들 박은표장로는 경신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퇴임했다. 박연서 목사의 사위 도건일 목사는 현재 서울 창전동 서강 감리교회에서 32년째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 도건일 목사의 부인 박영조 사모는 박연서 목사의 4녀이다. 이와 같이 순교자 박연서 목사의 자녀손들은 선친의 순교정신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