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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박헌근 장로 (순복음)

Joyfule 2009. 6. 28. 00:18

순교자 박헌근 장로 (순복음)

 

 

박헌근 장로(1914-1950)


순교자 박헌근 장로는 1914년 9월 3일에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봉산리 567번지에서 부친 밀양 박씨 민상(敏相)님과 모친 이영풍(李永豊)님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어렵게 살다가 10세에 부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까시에 거주하면서 도교시(東城區) 나마노마찌(生野町)에 있는 일본고등학교를 다니던 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인쇄회사에서 일하다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 이꼬마(生駒) 신학교에서 4년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 후 최예님씨와 결혼하였고

 

1942년도에는 귀국하여 대전 중동 제일장로교회의 창립과 동시에 집사로 임명받아 면류 청년회장과 주일학교 교사로서 아동들을 가르쳤다.

1948년 11월에는 순천경찰서 남쪽 남내동에 세워진 순천 오순절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그가 담임한 후 순천교회는 300명이 모이는 큰 교회가 되었다.

1950년 4월 9일에는 그 곳에서 박 장로가 주축이 되어 제1회 대한기독교 오순절대회가 열렸고 박 성산, 윤 성덕, 허 홍, 김 성환 목사 등과 박 귀임 전도사를 비롯하여 약 200명의 신자들이 모였다. 이 대회에서 박 성산 목사는 사회를 맡았고, 박 장로는 성회를 인도하였다. 기도와 성경 읽기에 열중하였던 그가 순천교회에 부임해 온지 2년 뒤 여름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피난하지 않고 교우가정 심방과 주일예배에 열성을 다하던 그는 공산군이 순천시를 점령하고 가진 행패를 다하기 시작하자 더욱 더 열심과 용기를 다하여 양들을 지키기에 심혈을 쏟고 있었다. 방언, 신유 등 오순절적 역사가 더욱 강하게 일어나는 가운데 교우가정을 비밀리 심방하고 다니던 그는 공산군 치안 대원에게 검거되어 순천경찰서에 감금당하였다. 신앙을 버리면 살려준다고 회유하는 공산군에게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며 전도하였다.

 

순천 오순절교회가 순천경찰서 인근에 있어서 그가 고문당하며 부르짖는 비명과 신음소리가 교우들에게까지 들렸다고 한다. 9월에 들어서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들의 행패는 더욱 심하여져서 박 장로에게 가하는 고문은 더욱 혹독해졌다. 그러던 중 유엔군의 인천 상륙과 서울 탈환으로 공산군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퇴각하던 공산군은 감금된 양민들을 대부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때 박 헌근 장로도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당시 같이 감금되었던 순천중앙병원 원장(최氏)에 따르면, 그는 가족들과 교우들이 보내준 김밥과 옷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감옥 안에서도 복음을 전해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피난 중에 잠시 그를 만났던 어느 교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신은 노모의 피난 권유를 뿌리치면서도 교인들에게는 얼마 안 남았으니 계속 잘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양들을 지키다가 노모와 처, 어린 자녀들을 두고 순교한 그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삶을 그대로 실천했던 숭고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남은 유족으로 두 딸이 있는데 차녀 박청자 권사는 광주 서현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4녀 박성실은 군산시 서수면 화등리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성교회의 정진일 담임목사의 사모로서 교회를 섬기며 박헌근 장로님의 순교신앙을 이어오고 있다.

 첫째 사위는 전남 강진읍 기독교 장로교회 장로로 있으며 제이차 사위는 전남 광주기술공업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은퇴하시고 사위는 전북방면과 서현장로교회 목사님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소천한 3녀 박성제는 충북 청천 순복음교회에 전도사 직분을 다하다가 40전에 소천한 딸도 있습니다. 순교하신 박헌근 후예들 첫딸 삼남매, 둘째딸 자녀 사남매, 막내딸 가족 4남매가 잘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가정을 이룩한 외손자 외손녀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