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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한경희 목사 (장로교)

Joyfule 2009. 8. 15. 00:33

 

순교자 한경희 목사 (장로교)

 

한경희 목사(1881-1935?)


한경희는 1881년 평북 의주에서 부호로 권세를 부리던 한승주의 3남으로 태어났다.

7세시에 부친사망 후 가세가 기울어지자 형제들이 사업에 어느정도 성공 기반을 잡는 듯 하더니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모조리 잃어버리고 퇴락을 했다.

 

갑자기 평민으로 전락되자 형제들은 유명한 싸움꾼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서양전도인만 보면 행패를 부리고 싶어 안달이났던 그는 23세때 예수믿는 친구가 하루밤 함께 자다가 두고간 구세론이란 책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형제들의 반대와 구타에도 불구하고 믿은지 3년만에 세례를 받았고 3개의 교회를 개척한 열성파였지만 교역자로 부족함을 느끼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7회로 졸업하고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노회 파송을 받아 외지 선교사가 되어 길림성으로 간 것이다.

 

길림교회에 정착해서 선교와 동시에 조선족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특히 조선인의 생활 지위문제에 착안하여 잘사는 것이 힘이라고 믿고 농무 상무 조합을 만들어 저축생활을 권장했고 중국관헌들과 교섭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농지 마련 등 실생활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교육을 통한 그의 민족의식고취는 조선족 동포들에게는 구세주의 목소리로 들렸으나 일인 통치자들에겐 반골 독립투사로 비쳐졌다. 남만노회장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을때 몇차레의 마적의 습격을 받고 살림을 탈취당했고 5회나 일경의 심사를 받아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되 3년간의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형무소에서 출소해 1935년 정월 초하루를 맞아 가정예배 겸 송별 예배를 인도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오소리강에 이르렀을 때 공산 비적 50여명이 나타났다. 마침 한목사를 마중하러 김창근영수가 합휴해 있었다. 그들의 행랑을 뒤졌으나 미싯가루 두봉지와 신의주 교회에서 여비를 준 돈 몇푼이 전부였다. "왜 이렇게 선교사로 간다는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거요."하면서 그 둘을 실신하도록 때리고 오소리강 얼음 구멍 속에 밀어넣고 공산 비적들은 왔던 길을 말을 타고 유유히 사라졌으니 한경희 나이 5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