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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소리 - 오순자

Joyfule 2015. 4. 3. 08:21

 

   시계 소리 - 오순자

 

 

 

얽혀있던 소리들이 잠들 때까지 그것은 숨죽이고 있다가 서서히 내게로 다가온다. 내 귓전에 다다를 때에는 커다란 원이 된 것처럼 증폭되어, 마치 무엇인가를 재촉하듯. 한낮의 순간적인 정적이나 대화의 사이사이에 침묵이 흐를 때도 갑자기 다가왔다가 사라지면서 의미심장한 묵시의 여운을 남긴다.

 

 시계는 한쪽 벽에 붙어서 쉴 새 없이 작은 소리를 내면서 시간을 규칙적으로 잘라서 모두에게 같은 분량으로 나누어 준다. 그것은 무한을 유한 속에 가두는 독재자의 비밀 기관원 같기도 하고, 한정된 생명의 연료가 소모되고 있음을 알려 주는 연료탱크의 계기판 같기도 하다. 자신의 끝없는 반복에 한이 맺힌 듯, 각 생명에게 반복을 불허하며, 새롭지 않은 것은 용서 없이 소멸시켜 버린다. 그것은 깊은 통찰력으로 생명의 근원에서 솟는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들이 창조해 놓은 새로운 질서의 증거물만을 보존해 간다.

 

 한참 패기에 넘쳐있던 시절에 나는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턱없는 자신감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살아온 시간들은 그것은 신들의 영역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자기의 자식을 낳으면 잡아먹었고, 어머니의 지략으로 살아난 제우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그 배에서 열한 명의 형과 누나들을 살려내어 올림포스의 열두 신이 된다. 이 신화에서 현명한 그리스 사람들은 아무도 시간의 파괴에서 살아남을 수 없고, 시간을 이긴 자는 신 밖에 없다는 이 평범한 진리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며칠 전에 지중해 연안에 있는 신들의 땅인 그리스, 터키, 이집트를 방문하고 돌아 왔다. 그리스에 관해서는 상당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대리석 작품에 매료되었고, 예술가들의 섬세한 손놀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작품들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해 놓은 것들이었는데, 대부분이 크로노스의 심술을 피해가지 못해서 돌출된 부분들이 떨어져나가 보는 이들이 상상력으로 그 부분을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사 오천여 년 전에 건축된 신전의 우람한 기둥들을 보고, 나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크로노스도 수천 년 동안 삼키지 못한 그것들을 아무런 도구도 갖지 않은 고대 이집트인 들이 세웠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개개인들의 힘을 보태어 완성 한 것이라기보다는, 신들의 영험을 빌려 수만 명의 힘이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건축물에서는 그리스의 조각 작품에서 느꼈던 개개 장인들의 손길을 유추해 내기가 힘들었다. 외세의 침략으로 신들의 이름이 바뀔 때마다 짓이겨 놓은 얼굴이나 종교적인 상징물들의 흔적들도, 그 웅장한 아름다움을 손상시키지 못했다. 그것들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적인 힘, 시간을 뛰어 넘는 신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을 갖는다. 나는 이 느낌을 좋아한다. 여행은 거의 나를 충격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에 내 지도 속에 색다른 땅이 추가되어 영토가 넓어진 느낌이 든다. 또한 사물을 보는 시각도 달라져서 의식의 틀도 변화된 것을 느낀다. 오늘 내가 어제의 모습과 같다면, 나는 하루 동안 죽어 있었고, 그때에 시계소리는 나의 죽음을 통고해 주면서, 깨어나기를 재촉한다. 그리고 나는 용기를 내어 새로운 땅을 찾아 발걸음을 내디딘다.


 

 나의 외조부께서는 대동아전쟁의 전화(戰禍)를 피해 노년에 농촌으로 이주하셔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까지 그곳에 사셨다. 그는 그곳 생활에 적응을 못하시고 천식으로 고생하심에도 담배만 태우시며, 거의 사람을 만나는 일도 없으셨다. 나는 어린 시절에 그곳에 가서 옛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천자문을 익히며, 사라져 가는 한 문화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할아버지 방에는 한지로 된 목판본의 낡은 책이 가득찬 나무 궤와 하루 한 번씩 의자를 놓고 올라가 태엽을 감아 주어야 하는 괘종시계가 있었는데, 어쩌다 건드려 수직에서 어긋나면, 추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멎어 버렸다. 깊은 밤에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나면 종소리처럼 방 가득히 울리는 시계소리와 할아버지의 기침소리를 듣고, 괜히 울적해져 집 생각을 하며 울곤 했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잠드신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한 자연인이 일제 말기와 6?25 등 격변기를 살아가는 동안에 가치관의 혼란으로 적응력을 잃으시고, 앞을 바라보실 수 없이 시계소리와 함께 쌓여 있는 시간과 마주하고 계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도 어느덧 축적된 시간의 더미위에 올라앉아 있고, 헛되이 지나가버린 세월에 대한 아쉬움으로 가슴이 저릴 때, 캄캄한 밤에 할아버지 방에서 듣던 시계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잃어버린 시간에 매달리시던 할아버지의 적막함을 내 안에서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그 소리는 내가 일상사 속에 파묻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내 시간이 죽어 있을 때에, 그곳에서 걸어 나와 푸른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시계가 쌓아 놓은 무더기 속에 나를 묻어 버리고, 내 몸 밖에서 다시 태어나 시계가 자르지 못하는 시간 속에 사는 꿈을 갖도록 나를 일깨운다.

 

 그래서 나는 예고 없이 다가오는 시계소리를 사랑한다. 심지에 불이 당겨지듯 가끔 선명하게 타올랐다가 희미해지기는 하나 그 소리는 나의 나이를 잊게 만든다. 그 소리에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을 때에 나는 죽어 있을 것이다. 그 소리가 들리면, 내가 앉아있는 자리를 살피고, 황급히 부지런해지는데, 그런 나의 모습에 안심한다.

 

 우리를 쫓는 시계는 지평선에서 멎는다. 그것은 지평선까지의 감시원일 뿐이다. 그러나 그 감시원은 우리가 새롭게 살아갈 것을 채근하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긍지를 갖게 만든다. 결국 우리의 삶은 시계가 자르는 시간 속에 살면서 시계가 자르지 못하는 세계로 들어가는 동화 같은 꿈을 가지고 사는 끝없는 투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