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자전]
4막 53장, 연극은 끝나고
문경희
시원섭섭하다. ‘미끄덩’ 오래 전 한생명이 내 안을 박차고 나가던 순간, 아릿하게 전신을 꿰던 야릇한 상실감 같다 할까. 기쁨이다가, 두려움이다가, 안도였다가, 근심이었다가, 그 모두가 어우러진 우울이었다가, 다시 날아갈 듯 홀가분함이었다가……. 자지러지는 울음으로 세상에 첫 신고식을 치르는 핏덩이를 받아 들었을 때처럼 종잡을 수 없는 기류가 나를 휘몰아친다. 급작스레 만져지는 내 안의 동공을 쓸어내리며 훗배처럼 나를 앓던 먼 그날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왜일까. 요 며칠 습관처럼 오래된 샹송, ‘기차는 떠나고’를 거푸 찾아 듣는다. 이별의 애절함보다는 엘렌느라는 여가수의 허스키한 비음이 기억에 남던 곡이다. 경쾌한 음률을 따라 흥얼거리다 보면 그를 보낸 허허함도 다소는 가셔진다. 멀어지는 기차의 꽁무니를 바라보고 선 여행자처럼 담담하게 그의 뒷모습에 안녕을 고할 용기도 생겨난다.
그를 만난 것이 언제였더라. 장딴지로 물이 오르고 하나 둘 친구들의 가슴팍이 살구만큼 봉긋해지던 무렵이었을까. 생기지도 않은 가슴이 부끄러워 동네 양품점에서 레이스가 달린 하얀 브래지어를 만지작거리던 그때였을까. 아니다. 어쩌면, 어느 날 문득 아랫배가 뻐근해지며 달거리가 시작되던 열일곱의 늦가을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생명의 물꼬가 요동치는 봄날처럼, 그때는 내 안의 나도 꽤나 부산스러웠다. 불쑥불쑥, 오만가지 형체 없는 감정들이 회오리처럼 솟구쳐 올랐다.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어찌 그리 많던지. 입시라는 철옹성을 넘기 위해 육신은 붙박이처럼 하루의 절반 이상을 책상에 묶여야 했지만 정신은 단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한 적이 없었다. 안과 밖의 극명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무게 중심을 잃지 않았던 것은 그가 조근조근 일러 주던 내일이라는 미지의 시간에 대한 청사진 때문이었을 게다. 창백해진 시간에 희망을 수혈 받기 위해 틈만 나면 그를 들락거렸다. 그의 가슴팍에 입 큰 빨대를 꽂고 야금야금 들이켜는 푸른 내일은 비루한 오늘을 견뎌내야 하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의 귀를 빌려 풋내 나는 연정을 속살거리면서도 그땐 그가 나의 무엇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얼룩덜룩 천장을 도배해 놓곤 하던 쥐 오줌처럼 연습장 한 귀퉁이에 찔끔 흘려 놓은 자투리 글귀들로 하여 그를 내 곁에 붙들어 두었을 뿐, 돌아보면 장승처럼 멀뚱하게 서 있는 그에게 크고 작은 속내를 풀어 놓으며 내 사춘기가 흘러갔지 싶다.
그와 본격적으로 가까워진 건 대학 시절이었다. 꿈꾸던 내일이 오늘로 다가왔지만 여전히 나의 두 발은 정박 중이었다. 날렵한 닻을 올리고 표표히 현실을 박차고 나서리라 하던 작정은 시간이 갈수록 자라목처럼 움츠러들었다. 대학이 자유의 다른 이름일거라 믿었건만 나의 반경은 남루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절망스러웠다. 그렇고 그런 일상 속에서 꿈도 희망도 캐지 못하는 하루들이 괜한 피해 의식과 의기소침을 불러왔다. 불안은 불안을 키웠다. 정체성의 혼란도 여전한 가난도 허수아비처럼 그 속을 멀뚱하게 지키고 선 나 자신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절절한 연서처럼, 그에게 나를 보내는 일을 거를 수 없었을 만치 내 안의 앙금이 무겁던 시절이었다.
막연한 희망과 막연한 절망으로 나를 걸어 잠그며 그에게 탐닉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의 행간 속에서 끝없이 무너졌고 또 일어섰다. 일언반구 희망의 속삭임이 없이도 위로가 되던 그였다. 아니, 외려 세상의 그렇고 그런 잣대와 기대치를 읊어가며 나의 분발을 촉구하지 않는 그의 침묵이 나를 살게 하는 피난처였다는 것이 맞겠다. 그는 그렇게 나의 무엇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제법 파란만장하다 연정도 없이 어느새 정인이 되어 버렸는가 하면 끝이며 더는 없을 거라고 냉정하게 절교를 선언했던 적도 있었다.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하얗게 밤을 새우기도 했고 혼곤하게 빠져든 꿈속에서 그를 만나 열광했던 적도 없지 않다. 결국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 처럼 희끗해진 모습으로 마주하기까지 미로처럼 그를 헤매었던 셈이다.
두어 달 전, 그와의 뜨거웠던 역사를 개봉했다. 딴에는 출산이라는 낯간지러운 꼬리표를 붙였으나 세간으로 번듯한 그, 또는 그녀들의 단단한 결실에 비할 수 있으랴. 다만, 그간 시간으로 쌓아 온 정리를 봐서라도 이제는 그가 나의 진정한 무엇임을 세상에 고하는 것이 그리는 절대 아군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 싶었다.
만남과 이별과 재회, 거창한 연애소설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던 그와의 파노라마를 자꾸만 되새김질하게 되는 것은 그를 떠나보내기 위한 수순일까. 엘렌느가 노래하는 기차처럼 나는 지금 희망을 남겨 둔 채 이별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별은 결단코 다시 만남을 전제하는 것이라 우기고 싶은 것일까.
그를 떠나보내고 한동안 답도 없는 질문을 속사포처럼 쏘아 댔다. 어떤 식으로든 그의 부재를 정의하지 않고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가 돌아온다 한들 선뜻 맞이할 수 없을 듯했다. 마디를 짓는 대나무처럼 다시 시작을 위한 나만의 의식이 필요했던 셈이다.
그런들 해답은 지극히 단순한 곳에서 우연처럼 만나질 때가 많다. 등잔 밑이 어둠다는 고사를 떠올리게 만들거나 삭은 고무줄 끊어지듯 매가리 없이 농익은 감 지듯 허무하게 정답이 손에 툭 떨어져 버리기도 한다.
골머리를 앓아 가며 공식을 꿰어 맞추고 행간을 캐는 일이 외려 답에서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치듯 졸저를 건네받은 지인 한 분이 명쾌한 정의를 내려 주었다. 당신의 ‘4막53장’ 크게, 그리고 멀리 보라는 지인의 한마디는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채 내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향해 던지는 일침과도 같았다. 편편이 나름의 명분을 붙여 구성을 해 놓았지만 4부에 걸친 53편이라는 숫자 자체에는 무신경했던 차였다. 그 와중에 건진 지인의 말은 뜬금없는 갈증을 속 시원하게 해갈해 주는 한 바가지 청량수와도 같았다. 그에 의하면 내가 세상에서 물러나는 날까지 아니, 그 이후에라도 존재할 연극 한 편이 드디어 막을 내린 셈이다. 커튼콜을 하듯 관객 앞에 다시 선 나는 잠시 나의 연출자이자 배우였다.
현재는 늘 과거가 되고 난 후에야 제대로 보이는 법이다. 멀어진 그의 등을 바라보는 이 순간, 그라는 반경 속에서 울고 웃었던 지난 시간이 강물처럼 유유히 머릿속을 흐른다. 더러 못마땅한 구석이 왜 없으랴. 그러나 이제는 안다. 못나고 아픈 손가락일수록 더 살갑게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을. 나를 나로 인증해 주는 것은 바로 그 어설픈 손가락이라는 것도 여전한 아군으로서 그가 내게 남겨 준 선물이랄까.
다시 기차는 올 것이다. 멀거나 혹은 가깝거나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나의 여정도 계속될 것이다. 습자지처럼 드리운 타성의 더께를 걷어내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내가 될 수 있을는지.
길은 멀어도 길이 데려다 주는 세상은 희열이었노라고 오래 전 그가 처음으로 나를 찾았던 어느 날처럼 어디선가 더없이 살가운 얼굴로 내게 다가오고 있을 그를 향해 부지런히 나를 타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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