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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申錫九) 신비주의 민족운동가

Joyfule 2009. 3. 2. 01:58

신석구(申錫九) 신비주의 민족운동가

1. 서론

신석구(申錫九) 은재 신석구 목사는 1875년 5월 3일 충북 청주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신재기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엄격한 유교의 가풍속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는데,지혜가 총명하여 11세 때에는 향리 서당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한다. 그러나 15세때 선친의 상(喪)을 당하여,충격을 받았으며,당시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형세를 탄식하면서 고향을 떠나 방랑생활을 하였다

.

신석구는 10여년 동안 방랑생활을 하면서 비탄에 싸여 있을때, 친구 김진우씨의 전도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때가 29세 때인 1907년 7월 14일이며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한 즉시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신석구는 비탄과 울분 속에서 기독교 신앙생활을 시작하게된 동기를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나도 이 나라의 국민된 一分子이다. 그러면 나라가 亡할 지경에 망하지 않도록 힘쓰는 국민된 의무가 아닌가,그런즉 어찌하여 망치않게 할까? 의병을 일으켜볼까? 아니다. 병법을 모르는 나로서 더 막강의 병을 대적한다는 것은 다만 무고한 생명만 해할 따름이지 구국할 도리는 아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태무정한 까닭이니 이 망할 나라가 망치 않게 하려면 도가 있어야 되겠다.

신석구는 개인과 나라를 구원하는 길(道)를 기독교 신앙에서 찾은 것이다.

즉,

참으로 나라를 구원하려면 먼저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 그래서 잃어버린 국민을 찾아야겠다. 나 하나 회개하면 잃어버린 국민 하나를 찾는 것이다. 내가 믿고 전도하여 1인이 회개하면 또 하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국민을 다 찾으면 나라는 자연 구원되는 것이다.

신석구는 민족구국의 신앙으로 1908년 3월 29일 "개성 남부예배당"에서 왕영덕(A.W.Wasson)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를 더 깊이 알기 위해 경성협성신학교(현재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하였으며 쉬지않고 전도생활을 하였다. 그는 1908년7월 5일부터 개성남부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일했으며,1908년 2월 1일부터는 정식으로 전도사 직첩을 받고"개성북부교회"에 파송받아 전도자의 길을 가게 되었4다. 그후 홍천 구역장(1910-1914),가평 구역장(1914-1915)춘천지방 부흥사업(1915-1918)에 파송받아 목회와 전도에 힘썼으며,1917년에는 집사 목사안수(1917년 9월 24일)을 받았으며,1918년에는 서울 수표교 교회에 파송받아 목회하는 중에 3.1운동에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참여하였다.

2. 복음주의 신앙에 확고히 선 신석구목사

신석구목사는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기독교계에 입교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독교의 신앙이 그로 하여금 민족구원에 참여케한 것이다. 그는 성경을 깊히 묵상하며 기도의 생활을 하는 가운데 성서적 신앙,복음주의 신앙에 확고히 서게 되었고 이 신앙을 삶 속에 실천하기를 힘쓰신 분이시다.

신석구 목사가 "복음주의 신앙","개신교전통 신앙"에 확고히 서있었던 점은 1917년 "신학세계"지에 "신(信)으로 득구하는 도리를 논함"이란 논문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신석구 목사는 기독교의 기본교리인 "말씀으로 구원받음"에 대해 두가지 오해를 지적하여 밝히면서 "진정으로 믿음으로 구원얻는 도리"를 논하고 있다.

즉 두가지 오해는

첫째, 선하기만 하면 무관하다하여 믿지 않는 불신태도에 대해서이다. 기왕 범죄한 일이 있어도 개과천선만 하면 무관하다는 오해이다. 이에 대해 유교와 불교, 회교등의 교훈을 논하면서 어떠한 종교라도 또 어떠한 성인군자라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다"라고 하여 어떠한 인간도 죄의 형벌에서 면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둘째, 어떤 종교든 종교는 의당히 신봉할 것이니 예수만 믿을 것은 아니란 점에 대해 "道가 어찌 다 선하리요"라고 묻고 "道,사이비 道등이 있음을 예증했다. 그리고 참도(道)인지는 그 결과를 봐야 하는데 모든 도(道)는 죄를 알게 할 뿐 구원이 없음을 밝히고,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무죄,무한공로 대속주의이심을 밝히고 있다. 신석구 목사는 죄에서 구원얻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한데 그 구원을 이루는 길은 회개,속죄,중생임을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과 그리스도를 연관하여 논하고 있다.

3. 3.1운동과 민족 구국신앙의 신석구 목사

신석구 목사는 오화영목사로부터 1919년 2월 20일경 조선 독립 계획에 대하여 뜨고 찬성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받았다. 이때 신석구는 "나는 나의 몸을 하나님께 맡겼으니 하나님이 좋다고 하면 찬성하겠다."하고 4-5일간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였다. 그후 매일 새벽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던 것이다.그는 두가지 문제로 고민하며,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하였다.

 

첫째,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할까.

둘째,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상용키 난(難)한데 그들과 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중 2월 27일 새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4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罪)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신석구 목사는 이 계시에 뜻을 결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따라 확고히 섰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터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구를 수천 혹 수백의 심중(心中)에 민족정신을 심는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삼남매 심중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주리니 이만하여도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1919년 2월 27일 기독교측 대표들이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때 신석구 목사도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 모일 때도 참여하여 독립선언후 체포되었다. 법정의 심문에서도 신앙위에선 신석구목사는 당당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서대문 감옥 검사 심문 중에서
 검사: 피고는 조선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
 답  : 그렇다. 될 줄로 생각한다.
 검사: 장래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 그렇다.나는 한일합방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 까지는 할
       생각이다.
 1919년 5월 5일 경성지방 법원 예심심문 중에서
 판사: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
 답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신석구 목사는 2년 반의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감옥생활은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는 신앙 체험의 생활이였고 신앙을 돈독히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세간(世間)의 모든 복잡한 사념을 다 포기하고 다만 기도하는 중 영혼을 예배하고 앉아 있으니까 감방이 나에게는 천당같이 아름다우며 자나깨나 주님께서 늘 내 우편에 계심을 든든히 믿으며 말할 수 없는 환희 중에 잡겨 지냈다." 고 했다.

신석구는 목사는 감방생활 중에 주와 함께 하는 기쁨도 체험하였으며, 기도하는 중 병도 완쾌하여 건강하여진 기적도 체험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렸으며,기도 중에 환상도 보았다. 신석구 목사는 이러한 신비한 체험에서 첫째 남을 섬기는 목회를 해야 함과,둘째 내가 먼저 사랑을 주는 목회를 해야 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1921년 11월 4일 출옥 후에는 목회에 임하였다. 즉 원산 상리교회(1921-1925),고성구역장91925-1926),춘천읍교회(1926-1927),가평구역장(1927-1928),경성지방 부흥사업(1928-1929),철원동구역장(1929-1930),한포교회(1930-1931),이안지방 감리사(1931-1934),천안지방 감리사 및 천안교회 목사(1935-1938)이였다.

 

천안교회의 목회 중에는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일으켜 믿음을 지키도록 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중형을 받아 중한 병을 얻고 석방되셨다.

그후 1939년 일제의 신사(神士)가 없는 평남 용강군 신유리교회,유사리교회,문애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공산당과 투쟁하다 "기독교 민주당 비밀결사사건"으로 1949년 4월 19일 북괴 중앙정치보위부에 검거되어 "반동비밀결사"를 영도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언도를 받았다가 독립운동공훈이 참작되어 징역 10년언도를 받았으나 6.25동란 중인 1950년 10월 10일 76세 때 총살형으로 순교하였다.

1963.3.1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복장)을 추서함. (노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