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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도 독립운동 목회자

Joyfule 2009. 3. 3. 00:50

손정도 독립운동 목회자


1. 생애

손정도 목사의 자는 호건(浩乾)이며 호는 해석(海石)이다.
1882년 7월 평남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의 토착 유학자이며 부농인 가정에서 출생하셨다.6세 때 사숙에 입학하여 17세까지 한학을 공부하셨다(신학세계3호)23세 청년시절인 손정도는 1902년 겨울에 관리가 되기위한 시험을 치르러 평양으로 길을 떠나던 중 조씨 성을 가진 목사 댁에서 머무르게 되었는데 조목사가 서구의 문화와 기독교교리를 손정도에게 설명하는 동안 손정도는 심령이 변화되어 예수 믿기로 결단하였다. 이러한 신비체험이 있은 후 다음날 아침 조목사는 손정도의 상투를 짤랐고 손정도는 평양을 포기하고 평양주재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Z.Moor 1874-1963)목사와 함께 고향으로 가 사당을 부두는 활동등의 신앙적 결단을 보이고 증거하였다.

어느날 밤 집안 어른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 손정도는 눈덮힌 들판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손정도 목사의 신앙 메모에 의하면 그날밤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날밤 청년 손정도는 속옷바람으로 집을 나와 눈덮힌 산에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다 실신하였고 인근 주민들에 의해 구출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앙체험과 결단을 가진 손정도는 단신으로 평양으로 가 문요한 선교사 집에 머물면서 일하였고 문 선교사는 손정도를 1905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시켰으며,고학하면서 1908년에 숭실중학을 졸업하였다. 손정도는 13세때 2살 위인 박신잉과 결혼하였고 시집에서 견디지 못한 부인은 평양으로 남편을 찾아 왔으며 평양 기독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면서 남편의 학비를 도우며 자녀를 양육 지도하였다. (당시 자녀는 진실,성실,두 딸이 있었음).손정도는 숭실 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서울로 단신 유학길을 떠나 협성신학당(현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목회자로 훈련 받았으며 또한 서울지역 교회를 출입하면서 전덕기 목사 뿐 아니라 이승만,이동령,이시영,장지영,이준,노백린,조승한,이갑,최남선,이필주 등과 어울려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손정도는 1910년 협성신학당을 졸업하고 진남포교회를 맡아 목회하였다. 그의 목회는 곧 민족 독립운동이었다.

2. 만주 선교와 독립운동

그 당시 많은 애국지사들과 동포들이 일제의 학정에 못이겨 만주 등 해외로 이주해 감으로 만주선교사 파송의 시급함을 알아 만주선교를 하던 중 1911년 목사 안수를 받은 손정도 목사를 만주지역 선교사로 매연회에서 파송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만주의 안동, 길림을 비롯한 간도지방을 담당한 순회 전도자가 되었고 그의 전도활동은 사실상 독립운동이었다. 1912년 3월 5일 제5회 조선 예수교 감리회 연회 때도 손정도 목사를 만주 봉천북지방 할빈 남방에 파송키로 결정하였다. (제5회 조선 예수교 감리회 연회록 참조 p.16)

 

그러나 만주에서는 기독교 애국지사들을 제거키 위한 가쯔라수상 암살음모사건 때문에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가쯔라(1849-1913)는 제1차 내각 때 영.일동맹을 맺고 노일전쟁을 강행해 을사보호조약을 맺게 한 한국인의 원수이며 제2차 내각때 한일합병을 강행했던 사람이다.

손정도 목사는 러시아 방문길의 가쯔라 수상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일경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 출옥 후에도 건강이 악화되었다. 일본 경찰은 모의사실을 끝내 부인하는 손정도에게서 아무 협의를 캐지 못하고 풀어 주었으나 곧 손정도 목사가 황해도 금광을 습격하여 북간도의 한인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기를 대주려 하였다는 협의로 다시 체포되어 거주제한 1년이란 행정처분을 내려 전남 진도로 유배당했다. 손목사는 귀양살이 중에도 복음 전파와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본업]에 열중하였고 진도 주민들을 깨우쳤다.

1913년에 있은 감리회 제6회 연회에서는 1913년 6월 2일 연회 회기 중에 손정도씨와 그 가족을 위해 금년에는 30원씩 주기로 결의 하였을 뿐 아니라 중화민국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결의 선포하였으며,손정도 목사가 진도 유배를 끝내고 1914년 돌아 왔을 때 감리교회는 그를 잊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서울의 유명한 동대문교회 담임자로 파송하였던 것이다.

3. 국내 목회활동

손정도 목사는 1년간 동대문 교회에서 목회하며 민족독립의 신앙을 고취 시키며 운동하시다가 1915년에는 감리교의 모교회이며 애국지사들이 드나들던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요새지인 정동교회 담임으로 부임하여 당시 김종우전도사(후에 감독됨)와 함께 목회를 1918년까지 하였다. 교인 수는 급증하여 1917년에는 교인 수가 2,283명을 헤아려 단일 교회중의 가장 큰 교회로 부흥하였고 설 자리가 없게되어 교회 중축공사도 하였으며 예배 풍경도 변화시켜 남녀를 구분하는 휘장도 없애 버렸고 교회안에 의자를 놓아 장안의 화젝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손정도 목사는 1918년에 장로 목사로 안수를 받고 이해 말 자진하여 신병을 치료할 겸 쉬겠다는 표면적 이유로 정동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제12회 미감리회연회가 서울 정동교회에서 모였는데 연회록을 보면 손정도 목사에 대해서 "당국의 압력으로 휴직 및 제명당한 연회원 손정도"라고 기록되었다. 이를 볼때 손정도 목사는 정동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당국에 극심한 사찰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참조1919년 제2회 연회록 p.234)

4.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과 만주에서의 활동

1919년 3.1운동 이후 애국지사들은 상해로 모였고 4.11일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이때 손정도 목사는 이광수와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을 제의하여 임시 의정원 의장을 지내며 임시정부에서 파싸움을 하는 일들을 수습키 위하여 활동하였으며 국내와 연결하여 독립군 무기기금 모금운동을 하였다. 또한 대한 애국부인회 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손정도 목사는 근 3년간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민족 대동단결과 독립운동 집결지 등을 형성키 위한 계획을 가지고 1921년 만주길림으로 갔다.

 

손정도 목사는 김구선생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1922년 10월 28일에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대한교육회(상해)를 1919년 11월 24일에 박은식과 함께 조직하였고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극동임시위원부를 상해에 1920년에 조직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으며, 1920년 이후에는 길림성을 중심으로 농민합작사를 설립하여 굳건한 독립운동 투쟁 기반과 민족의 대동단결을 하는데 총력을 다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길림에 한인교회를 개척하여 동포들을 신앙으로 뭉치게 하였고 억울한 사람을 해결해 주는 목회활동도 하였으며 필생의 사업으로 간도에서 약간 떨어진 액목현에 3천일경되는 농토를 구입하였다.

 

그는 여기서 만주에 흩어진 동포들을 한 곳에 정착시키고 독립운동을 기하려 하였다. 손목사는 교회에 학교도 세워 교육운동도 하였다. 그러나 정세는 만주도 안전한 곳이 못 되었다. 일제는 만주침략을 감행하려 하고 있었다. 손정도 목사는 최후까지 굽히지 않고 이를 정리하여 북경으로 가서 계속 투쟁하려 하였다.

 

그 당시 손목사의 가족들은 1929년 둘째 딸 성실의 신병과 유학으로 봉천에 있었고 손목사는 단신으로 길림에 남아 있었다.

손정도 목사는 1931년 2월 19일 길림에서 50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그가 바라고 기도하며 외치고 힘썼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가신 것이다. 공식적으로 지병인 위궤양으로 병사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며 1931년 2월 21일자 동아일보 신문에 간단한 별세 보도가 기재되어 있다. 손목사의 가족은 2남 3녀로써 부인 박신일 여사와 장녀 진실(在美),차녀 성실,장남 원일(해군 참모총장 및 국방부장관 지냈음),차남 원태(의학박사),3녀 인식(이대 교수,한국여성단체 협의회 회장,한국YWCA 회장)이시다.

5. 손정도 목사의 조직, 활동에 대한 요약

  1. 상해 임시정부 활동 -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하시면서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 중 한 분으로 참여하셨다. 특히 독립군 양성을 담당하셨고 독립군 무기를 지원하는 군자금을 위해 활동하셨다.
  2. 대한적십자회 - 1919년 10얼 1일 상해에서 조직할 때 상임 의원으로 활동 하시었다. 감리교 현순 목사,장로교 김병조 목사도 의원이었다.
  3. 흥사단극동임시위원부-미주에 있는 흥사단의 지부로 1920년에 안창호와 함께 설치하였다. 당시위원:안창호,손정도,이광수,차이석,주요한,이규서 등.
  4. 대한교육회 - 1919년 11월 24일 상해에서 조직하였다. 회장은 박은식이었고 손정도 목사는 서무로 활동 하시었다.
  5. 한국노병회-군인양성과 전비조성을 목적하여 조직된 단체이다. 본부는 상해에 두었고 조국광복에 공헌하기 위해 7개년 동안 1만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여 100만원 이상의 전비를 조성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이전에라도 독립전쟁을 개전할 때는 이사회 결의로 참가 출전한다고 했다.
  6. 농민합작사운동(앞에서 대략 설명하였으므로 생략함).
    1962.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 (노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