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뿌리 치유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히 12:1-4)
내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이 하나 있다. 하루 중 가장 복잡한 출근 시간에 우리 부부 역시 일하러 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아이가 길 한가운데로 달려나왔고 소형 트럭이 급히 왼쪽으로 틀었지만 그만 아이의 머리를 치고 말았다. 아이의 조그마한 몸은 트럭 밑에 깔렸고 옷은 찢겨져 트럭의 아랫부분에 걸려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조각처럼 인도에 서서 어느 누구도 그 분주한 찻길 한복판에 있는 아이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내 아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차에서 뛰쳐나가 그 복잡한 시간, 자동차들 사이를 지나 아이 옆으로 달려갔다.
"911에 전화하세요!" 라고 내가 사람들에게 외치는 동안 아내는 위험한 찻길 한가운데에 무릎을 꿇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숨소리도 미약했다. 죽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아이가 숨을 쉬도록 인공호흡을 했고 구급차가 올 때까지 안고 있었다.
아이는 실려갔고 우리는 다시 그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인도라는 안전한 공간에 서서 아이를 구하러 오지 않았을 때 아내는 아이를 돕느라 온통 피범벅이 되었지만 감사를 표하는 사람, 박수를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내에게 메달을 주기 위해 자신들의 어깨 위로 들어오릴고는 시내로 행진하는 일도 없었다. 기자가 와서 아내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지도 않았다. 피범벅이 된 옷과 더럽혀진 손만 보일 뿐이다.
오늘, 어쩌면 당신도 위험한 길거리에 있었던 내 아내와 같은 기분일지 모르겠다. 사역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음악 사역에 헌신하는 것은 가장 힘든 곳 중 하나에 거 있는 것이다. 음악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취향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내면을 표현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한 주 한 주 지나갈수록 당신의 영혼은 회중 앞에 노출된다. 영혼이 노출된 상태에서 당신의 마음은 상처받기 쉽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은사를 알아주고, 상까지 주기를 바라는가? 그러나 대부분은 박수도 없이 당신 홀로 남겨지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역중에 상처받는 경우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상처는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사람들이 찬양 사역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사역에 대해 비방을 들을 때도 있고, 때로는 드럼 소리의 크기, 곡 선택 아니면 연주 스타일 때문에 사람들과 충돌할 때도 있다.
사역을 하면서 마음이 상하몀 보통 그것은 쓴뿌리로 남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러운 것과 얽매이는 것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쓴뿌리는 효과적인 예배 사역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말들과 우리가 하는 모든 노래에 영향을 끼친다. 쓴부리를 지닌 채로 찬양을 선포하면서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없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약 3:9-12)
쓴뿌리라는 죄가 당신의 삶을 곤란에 빠뜨리고 예배 사역의 능력을 파괴하는가? 당신의 은사에 대해 비난하는 말들에 상처를 받아 분개라는 쇠사슬에 사로잡혀 있는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막 11:25)
다른 형제나 자매에 대해 강퍅한 마음을 가지면서 사역에 관해서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려 한다면 당신은 사역뿐만이 아니라, 쓴뿌리의 대상, 그리고 당신 자신에게도 피해를 주게 된다.
루이스 스메데스는 [용서의 기술] 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하는 것은 죄수를 풀어주는 것과 같은데, 우리가 풀어준 그 죄수가 바로 우리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후에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일이 여전히 너무 힘들다면 앞에서 읽은 바울의 도전을 다시 한번 보라. 또한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으라. 이사야 53장 3절은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하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말한다.
사역을 하면서 당하게 되는 어떠한 위험도 예수님이 당한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부드러운 마음을 계속 유지 하면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예수님은 우리가 반응할지 안 할지 확신이 없으면서도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오신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파멸해가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때 우리에게 오셨다. 그의 손은 피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앞의 경우와는 다르게 그 피 또한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피다.
이제 쓴뿌리라는, 우리를 옭아매는 장애물을 버려버릴 때다.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