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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르의 여인 - 알퐁스 도데

Joyfule 2005. 8. 1. 07:11
 
  아를르의 여인 - 알퐁스 도데 
 

[소개]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에서 한 젊은이가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비극. 
요란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농촌에서 인간의 정념이 빚어내는 
서글픈 사연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작가 소개]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 : 프랑스의 작가. 
주로 프랑스 남부 지방의 인물과 생활을 익살스럽고 정감 있게 묘사했다. 
그의 장편소설 
"동생 프로몽과 형 리슬레르(Fromont jeune et Risler aine)"
(1874)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받았다. 
<마지막 수업> 등 정서적인 작품들로 꾸준히 사랑을 받는 작가이다.

아를르의 여인 - 알퐁스 도데  
1.어떤 농가에 얽힌 사연
내 방앗간에서 내려와 마을로 가노라면 
길가에 서 있는 어떤 농가를 지나게 된다. 
그 집은 넓은 정원에 팽나무가 심어져 있고, 
어느 모로 보나 전형적인 프로방스 지방 소지주의 집이다. 
붉은 기와를 얹었고, 넓은 갈색 벽에는 창문이 여기저기 열려 있었다. 
창문보다 더욱 높이 올라간 곳에는 
바람개비와 짚더미를 실어 올리는 활차(滑車)가 있었다. 
그리고 건초더미가 삐어져 나와 있었다...
왜 이 집이 내 마음을 잡아당기는 것일까? 
어째서 그 닫힌 출입문이 내 가슴을 쥐어뜯는 것일까? 
무어라고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이 집은 
나를 뭔가 오싹하게 만드는 점이 있었다. 
주위도 무척 조용하기만 했다... 
집 앞을 지나가도 개가 짖지 않고 
암탉은 우는 소리도 내지 않고 솟구쳐 날아오르곤 했다...
집안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만약 창마다 흰 커튼이 드리워져 있지 않고, 지붕 위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다면 아마 텅 빈 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제 정오 종소리가 울릴 무렵, 
나는 마을에서 돌아오는 길에 눈부신 햇살을 피하려고 
이 농가의 울타리 곁 팽나무 그늘 밑으로 바싹 붙어서 걷고 있었다
그 집 앞 길에서는 남자들이 말없이 짐마차에 
건초더미를 거의 다 실은 모양이었다.
출입구는 열려 있었다. 
그곳을 지나며 슬쩍 보았더니 뜰 안쪽에 
머리가 새하얗게 센 키 큰 노인이 보였다. 
노인은 두 손으로 턱을 고인 채 돌로 만든 커다란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있었다. 
노인은 머리가 짧은 저고리에 낡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사나이 중 하나가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쉿! 우리 주인 영감이지요... 
아들에게 그런 불행한 일이 있은 뒤부터 언제나 저 모양이랍니다."
그때, 상복(喪服)을 입은 여자와 작은 소년 하나가 
책갈피를 금색으로 물들인 두꺼운 성경을 손에 들고 
우리들의 옆을 스쳐 지나가 집안으로 들어갔다.
사나이가 다시 말했다.
"... 미사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주인 마님과 둘째 아드님이지요. 
맏아들이 자살한 뒤로는 매일같이 미사에 나가지요... 
그래요, 주인 어른께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소? 
우리 주인 어른이 입고 있는 옷도 죽은 장남의 것이랍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그 옷을 벗기려고 해도 막무가내라니, 어이, 이랴 쯧쯧!"
마차는 덜컹 흔들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듣고 싶었다. 
그래서 마차 위 사나이에게 부탁하여 건초 더미를 실은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그 마차 위 건초더미에 파묻혀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던 것이다...
아들의 이름은 장이라고 했다. 
스무 살이나 먹은 훌륭한 농부였지만 또 얼굴이 소녀처럼 예쁜 남자였다. 
몸이 건장하고 얼굴 표정은 밝았다. 
굉장한 호남자여서 모든 여자들이 그를 노렸지만, 
본인은 어떤 한 여자에게만 마음을 두고 있었다. 
- 빌로도와 레이스로 몸을 치장한 아를르의 어떤 젊은 여자였다.
그는 오래 전에 아를르의 리스거리에서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집에서는 처음에 두 사람의 관계를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여자가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있었던데다 
여자의 부모도 이 고장 토박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말하곤 했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지 못한다면 나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그래서 가족들도 어떻게 말릴 방법을 찾지 못하고 추수가 끝나면 
두 사람을 결혼시킨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 저녁, 
집의 뜰에서 온 가족이 저녁 식사를 막 끝냈을 때였다. 
그 식사는 마치 결혼식 피로연이나 마찬가지였다. 
약혼녀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 없었지만 
가족들은 모두들 진심으로 그 여자를 위해 축배를 들었다...
바로 그때에 어떤 사나이가 문 앞에 나타났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에스떼브 영감님, 그 영감님 한 분에게만 할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에스떼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2. 부정한 여자 
"영감님."
그 사나이는 말했다.
"영감님은 지금 부정한 여자를 며느리로 삼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지난 2년 동안 나의 정부(情婦)였습니다. 
내 얘기를 증명할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바로 이 편지가 그것입니다...! 
여자의 부모들도 모두 다 우리의 결혼을 승낙했습니다. 
나에게 그년을 주겠다고 약속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영감님의 아들이 그년에게 청혼한 뒤부터는 
그년의 부모도 그년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런 과거가 있는 계집이 설마 다른 남자와 결혼해 
그 사람의 아내가 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왔어요."
"좋소!"
에스떼브 영감은 편지에 눈길을 주었다.
"안에 들어가 포도주나 한 잔 하시면서 목이라도 축입시다."
사나이는 말했다.
"싫습니다. 난 원통해서 술이고 뭐고 마실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버지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돌아와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그날 저녁 식사는 아무일 없다는 듯이 무사히 끝났다...
그날 밤, 에스떼브 영감과 큰아들은 함께 들로 나갔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밖에 있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그때까지 자지 않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지주영감은 아들을 어머니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면서 말했다.
"애한테 키스를 해주구려! 딱하고 가엾은 놈이야..."
장은 이제 아를르의 여인에 대한 일은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와 조금도 다름없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것이라는 것을 안 뒤부터 
오히려 전보다도 더욱 사랑하게 된 것이다.
다만 자존심이 강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이 그를 죽게 한 씨앗이었다. 가엾게도! 
장은 가끔 방구석에서 혼자 꼼짝도 않고 하루종일 앉아 있곤 했다. 
또 어떤 때에는 정신없이 밭에 나가 일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럴 때 그는 품팔이꾼 열 사람씩이 달라붙어야 해낼 수 있는 일을 
혼자서 해치우곤 했다. 
저녁이 되면 아를르의 길거리로 나가 마을의 높고 긴 종루가 
서쪽 하늘에 희미하게 보일 때까지 하염없이 걷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갔다가 그는 다시 돌아왔다. 
더 멀리 가는 법은 절대 없었다.
그가 이렇게 늘 슬픔에 잠겨 외롭게 지내는 것을 보고 
가족들은 모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안절부절했다. 
무슨 좋지 못한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모두들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가 눈에 눈물을 가득히 머금고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말했다.
"그래, 좋아, 장! 그렇게도 그 여자가 좋다면 아내로 맞아들여도 좋다."
부친은 치욕스러워서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장은 고개를 흔들더니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날부터 그는 부모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생활 태도를 바꾸고 
일부러 명랑한 태도를 꾸몄다. 
무도회나 술집, 그리고 
소들에게 낙인을 찍은 후 으레 열리는 마을 잔치에도 모습을 나타냈다.
퐁비에유의 축제에서 파랑돌 춤을 앞장서서 이끌기도 했다.
부친은 "저 녀석이 이젠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모양이야" 하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전보다도 더 자세하게 아들의 태도를 살피곤 했다... 
장은 누에 치는 곳 바로 옆방에서 동생과 함께 자고 있었다. 
그래서 늙은 어머니는 두 아들이 자는 바로 옆방에 
자기 침대를 옮겨 놓고 잤다 
밤중에 누에를 돌보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다는 핑계를 댔다.

3. 성 엘르와의 축제 
소지주들의 수호신인 성 엘르와의 축제가 코앞에 닥쳐왔다.
이날은 농가들 모두에게 무척 즐거운 날이었다... 
모두들 샤또오뇌프 술을 실컷 마실 수 있고 
포도 시럽도 마음껏 먹을 정도로 풍성하게 나온다. 
밀 타작 마당에서는 폭죽이 터지고 모닥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며, 
팽나무에는 온통 형형색색의 등불을 걸어 놓는다...
성 엘르와 만세! 모두들 지쳐 쓰러질 때까지 파랑돌 춤을 춘다. 
동생은 새로 만든 작업복을 불에 태우며 놀았다
장 스스로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어머니에게도 춤을 추자고 했다. 
어머니는 기분이 유쾌해져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밤이 깊어지자 모두들 잠자리로 들어갔다. 
누구나 졸려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만은 잠들지 않았다. 
나중에 동생이 한 얘기를 들어보면 
장은 밤에 일어나 앉아 혼자서 울었다는 것이다
아아! 정말 그는 무척이나 괴로웠던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날이 샐 무렵. 
어머니는 누군가 자기 침실 앞을 지나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소리쳤다.
"장이냐?"
장은 그러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당황한 어머니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지금 어딜 가는 거냐?"
그는 이미 다락방에 올라가 있었다. 어머니가 그 뒤를 쫓았다.
"무슨 일이야? 도대체 뭘 하는 거야?"
그는 문을 닫고 안에서 빗장을 질렀다.
"장, 우리 장아, 대답을 하려므나.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그녀는 손을 떨면서, 
늙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문고리를 더듬어 찾았다
그때 창문이 열리면서 뜰에 깐 포석 위로 무언가 
털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그 가엾은 젊은이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 여자를 도저히 잊을 수 없다... 
이럴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자.'
아! 우리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애정이라는 것! 
아무리 상대를 경멸하려 해도 애정을 단념할 수 없다는 것은 
정녕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서로 만나 수군거렸다.
엊저녁 에스떼브 영감님 집에서 누가 그렇게 큰 소리로 울었느냐고.
그것은 뜰에서, 이슬과 피에 범벅이 된 포석 위에서 
가슴을 풀어헤친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두 손에 껴안고 
뼈를 깎는 것처럼 서글프게 운 바로 그 소리였다.
<끝>
♬ 비제의 아를르의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