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아버지의 마지막 한마디는 “미안하다”

Joyfule 2015. 3. 26. 12:18

 

 

 

아버지의 마지막 한마디는 “미안하다”

 

"임종 앞둔 아버지가 유언처럼 니 에미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8년이 지난 뒤다
어머니가 생전에 듣고팠던 미안하단 한마디 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나?

말은 칼과 다르다

사용하지 않아 안전한 게 아니라 사용하지 않아서 위험하게 된다

좋은 말은 늘 그렇다"

 
외국인이 본 한국 사람에 대한 글에서 사과를 주고받는 한국인들의 독특한 방식에 관해 읽은 적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잘못을 했을 때도 어지간한 일에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다가 어렵게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 상대방이 아니라고, 무엇이 미안하냐고 손을 강하게 흔든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더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미안하다고 말을 하고 나면

상대방이 미안하기는 무엇이 미안하냐고 함으로써 미안하게 한 잘못조차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이야기다.

쉽게 잘못을 저지르는 무례(無禮)와 그 못지않게 빠른 화해가 외국인에겐 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나 보다.

 

"니 에미한테는 미안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바로 말문을 닫을 무렵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15세 동갑내기로 만나 결혼하셨고, 50년을 함께 사시다가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고,

18년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시는 시각에야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내비치셨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데 그렇게도 긴 시간이 걸려야 했던 것일까.

그것도 어머니가 그렇게 듣고 싶어했던 그 말을 자손들에게 간접으로 유언처럼 하신단 말인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던 "미안하다"는 말은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받고 싶은 속내였을 것이다.

참고 살아줘서 고맙다는 이야기, 그래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어머니는 애타게 듣고 싶었던 것이리라.

내 상식으로 생각하면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은 억만 번 해도 모자랄 것이다.

 

누가 봐도 미안할 일을 아버지는 전 생애에 걸쳐 하셨고,

대궐 같은 집이 빚에 넘어가자 어머니는 고향 땅에서 누추한 꼴을 보이기는 죽어도 싫다며

밤 두 시에 트럭에 짐을 싣고 서울 변두리로 이사를 왔던 것이다.  

뽐내는 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기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한밤중에 트럭을 타고 손톱도 들어가지 않는 새벽어둠을 뚫고 비포장도로를 거칠게 흔들었을 때도

그 12시간을 단 한 순간도 눈물을 멈추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주 그 순간을 떠올리면서

"그때도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없는 흉측한 물건"이라고 아버지를 저주하곤 했다.  

그런 아버지가 숨을 놓으면서 "니 에미한테는 미안하다"고 하셨던 것이다.

아마도 죽기 전에는 꼭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인가 보다.  

그래 그렇게 쉬운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해야 했던 것일까.

어머니 외에도 아버지는 미안해할 사람들이 많았다.

 

아버지가 진 미안한 마음의 부채를 요즘 부쩍 내가 갚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아마도 내가 나이가 든 것인지, 내가 누구에게 미안할 때 미안하다는 말을 두 번 세 번 하게 된다.

한 번은 내가 하는 말이고, 한번은 아버지가 이 세상에 해야 하는 말이고,

한번은 어머니가 일생을 우시느라 못한 미안하다는 한마디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아버지 어머니가 못다 한 이 세상에 대한,

혹은 여러 사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다 갚아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 갈망이 있다.

어쩌면 나 자신 때문인지 모른다.

나도 아버지 어머니에게 실상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딸이었지만 미루고 미루기만 했다.

 

'부모님은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말은 나에게 그래서 천금 같은 말이다.

어쩌면 싸우지도 않고 고요한 경기도 광주 부모님의 묘역에 가면 늘 나는 소리내어 미안하다고 말하곤 한다.

배웠다면 배운 여자인 나도, 세대가 다른 나도 생전에 하지 못하고 그 황망한 침묵 앞에 무릎을 꿇고

소리를 내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 미안하다는 말이 도무지 무엇이기에 입안에 담고 우물쭈물하며 때를 기다리며 세월을 흘려보냈다는 이야기인가.

말하면 세상이 변하는, 그래 무슨 고매한 사상이거나 대단한 철학이거나 한 것인가.

우리는 너무 다정한 말에 인색했다.

반드시 필요한 한마디 일상용어에도 인색했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내 딸들에게는 미안하다고 적절한 순간에 말했는지.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때를 놓치지 않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는지.

이것이 지금 나에겐 문학에 기울이는 만큼 특별한 관심이며 노력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미안하다고 해야 고맙다고 하고, 그래야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키를 높이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국인의 특징은 늘 '속에는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는 있으니 염려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감정은 무거워지고 오해도 일어나서 사회의 편가르기는 그 뿌리가 성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가족도 사회도 국가도 이런 감정 은폐에서 비롯된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발전도, 어떤 국가 문제의 대응에도 화해가 가장 먼저 필요한 준비물이며 내적인 힘이리라.

그래서 우리에게 친절은 당연히 노력해야 할 현실적 과제다.

 

말은 칼과 다르다.

사용하지 않아서 안전한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아서 위험하게 되는 것이다.

좋은 말은 늘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