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피어날 때 - 김 설려
초록이 춤춘다. 빗속의 군무가 흥겹다. 싱싱함을 되찾은 가로수들의 율동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때로는 파도처럼, 때로는 뭉게구름처럼 강약을 되풀이하는 모양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열정적인 몸짓 같다. 게으른 봄비 탓에 대지는 메마르고 초록은 윤기를 잃어갔다. 이제 그 초록이 갈증을 풀고 환희의 춤을 춘다. 비바람 속에 강하게 되살아나는 초록이 새삼 반갑다.
지난해 겨울, 봄바다 더 짙은 황사를 만났다. 그것은 자연의 황색경보로 느껴져 다가올 봄이 걱정스러웠다. 금세기의 마지막 봄이 황사에 ane혀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다행히 신록의 봄은 왔으나 긴 겨울 가뭄 탓인가 꽃망울이 터져도 나무는 물오름이 더디어 희나리 같았다. 그 속에서 이어지는 꽃들의 잔치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올해도 변덕스런 기온 탓인지 봄의 전령 산수유와 5월 라일락이 안팎 사돈 인사하듯 어색하게 함께 꽃을 피웠다. 힘겹게 피어난 꽃들이 제법 굵은 빗줄기에 맥없이 져버린다. 꽃이 떨어진 빈자리는 쑥쑥 올라오는 푸른 잎사귀들로 이내 채워질 것이다. 화사한 꽃잎을 떨구는 비를 맞으며 초록 잎새는 생기를 되찾고 있으니까. 더욱 푸르러진 초록은 꽃과는 또 다른 건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겨우내 잠들었던 대지가 기지개를 켤 때, 살며시 깨어나는 자연의 눈빛으로 초록은 피기 시작한다. 이른 봄 여린 버들의 노랑인 듯 맑고 투명한 연두와 언 땅을 뚫고 돋아난 새싹들의 야무져 보이나 미숙한 초록, 모내기 끝낸 논에 가득 찬 어린모의 발랄한 초록, 초여름을 장식하는 선명한 녹색과 너무 짙어 검푸른 여름 산의 진록색까지 참으로 다양한 빛깔의 초록이 힘찬 생명력을 보여준다. 흔들리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도 초록은 변함없이 돋아나고 무성해진다. 언제부턴가 꽃보다 초록에 더 정이 가기 시작했다. 초록이 있는 한 자연은 살아 있다는 믿음과 함께.
우연이었을까 공상과학만화나 우주영화에 등장하는 미래의 세상에는 흙에 뿌리 내리고 자라는 나무와 풀이 없었다. 꽃만 어여쁘게 보이던 시절이 지나고 갖가지 초록이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나타난 순간부터, 자연의 푸르름이 없는 미래의 도시는 더 이상 꿈과 희망이 담긴 이상향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세상이 올까봐 두려웠다. 강한 생명력을 지닌 초록이 사라진 세상에서 버텨낼 자신이 없으니까.
그러기에 2000년의 봄을 태워 버린 강원도의 산불 소식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까맣게 타버린 산과 나무들. 그것은 자연의 주검이라고 표현되었다. 그런데 그 봄이 끝나기도 전에 자연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신문을 펼치는 순간 눈에 들어온 한 장의 사진은 희망이었다.
까만 잿더미 위에 뾰족하게 솟아있는 어린 싹. 큰 시련 속에서도 이어진 생명은 자연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 속에 새 싹을 쓰다듬어 보았다. ‘애썼다. 정말 애썼다. 그리고 고맙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떠한 환란도 이겨내는 자연을 대하니 어리석은 걱정을 잠재우며 초록으로 피어난 희망에 감사했다.
비 그치고 햇살이 나니 깨끗해진 잎새가 초롱초롱한 눈빛 되어 반짝인다. 비를 맞을수록 생기를 더해 가는 초록, 살아있는 자연의 눈빛이다. 초록이 풍성한 계절, 그 강한 생명력을 닮기 위해 푸르름을 가슴에 안는다.
(1998년 책과 인생으로 등단)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의 마지막 한마디는 “미안하다” (0) | 2015.03.26 |
---|---|
여름을 보내며 - 김동삼 (0) | 2015.03.25 |
예순이 되면 - 최민자 (0) | 2015.03.21 |
꼭 본인이 와야 합니다 - 오형칠 (0) | 2015.03.20 |
이 발 - 鄭 木 日 (0) | 2015.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