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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의 미서부 개척사

Joyfule 2011. 12. 16. 12:50

 

 

멕시코의 영토이었던 Yerba Buena 그것은 샌프란시스코의 옛이름이다

 

1840년 그 땅에 사는 인구 수는 400명이 넘지 않았다

골드러시가 시작되자 작은 해안마을은 금새 북적대며 수만 명의 도시로 정신 없이 탈바꿈 하기 시작하였고

중국에서 금산을 찾아 오는 이민의 물결은 1849년 첫 이민이
시작 된 이후
한번에 약 1000명 내지 2000명 정도의 이민자가 샌프란시스코 만으로
계속 쏟아져
들어 왔다

첫 이민선이 출항 한지 3,  1852년 까지 이민선은 샌프란시스코과 홍콩,
마카오를
오가며 광동 지역에서 총 2만 오천의 젊은 남자들로 이루어진 이민자를
17차에
나누어 실어 날랐다

장기간 배를 타고 온 그들이 잠시 머물며 배 멀미를 진정 시키고 짐을 정돈하며
다음 행선지로 이동할 채비를 하는 임시 거취 장소는
지금의 샌프란시스코 동북쪽 부두
근처 목재창고로 사용하던 브로드웨이 서쪽과
 
골드 스프링스 스트리트 근처 지역에
위치 하였다



사진에 보이는우측 하단으로 추정


1500명의 중국인들은 길이 150 미터에다 폭 50 미터가 좀 안 되는 적은 장소에
지어진 2동의 이층 건물에서는 그들이 좋아 하는 붉은 색의 휘장을 치고
환영의 자축을 벌였다 그리고 일부는 건물 옆에 지어진 텐트 속에서 뜬눈으로 잠을
못이루며 낯선 땅에서 살아나갈
각오를 하였다


1851년 샌프란시스코


곧이어
2개의 생필품 가게가 생기고 1개의 세탁소가 들어서자 그 적은 장소는
터질 것같이
북적대었다

이민자들은 광동성에 있는 항구 마카오나 홍콩을 떠나기 전에 맺은 계약대로
금광에 광부가 되거나 광산의 식당 요리사나 청소등 허드랫 일을 찾아 밖으로
떠나고 나면 뒤를 이어 들어오는 새로운 이민자들을 받아 들였다

이렇게 시작된 컬럼비아 지구에 위치하고 보충대 역할을 하여 주었던 목재 창고
야적창 텐트 촌이
최초의 차이나타운의 시발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앞머리는 대머리처럼 밀고 뒷머리를 꽈서 길게 늘어뜨린 변발의 아시안 청년들을
먼저 와서 자리 잡은 다수의 백인들은 흥미 있게 지켜 보며

"뒤통수에 돼지 꼬리를 달고 다니는 괴상한 녀석들흐흐" 하며 웃었다

 

 

중국인들의 타운은 확대 되어나갔고 부지런한 그들은 근처 땅에 채소를 재배
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 동안이라도 잠시를 쉬지 않았다

 

드디어 프란시스코 워싱톤과 브로드웨이 스테이트 스트리트 사이에 개의
중국 음식점과 개의 세탁소가 개업하였다

중국인들이 개업한 식당에는소고기 , 돼지고기, 돼지고기 삼겹살,닭고기
오리고기등 육류 요리에 바다에서 나오는
생선,  전복, 해삼, 해삼   각종 해산물에 
버섯과 죽순, 다섯 종류의 야채,  마른 과일  
별난 향신료를 섞어 쌀밥에
곁들여 먹는 기막히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것이다

백인들의 주식은 단순하게 고기, , 감자, 버터 정도였는데  중국인들이 만드는
별난 음식은 백인들의 입맛을 버려 놓는 것이다

중국 음식점의 고객은 백인 노동자들이었고 음식 값도 그들의 주머니 사정에 
어울리게 저렴하였다

맛있고 저렴한 가격의 중국음식..맛있는 소문은 빠르다..

괴상한 녀석들이 만든 음식이 입에서 살살 녹아..~호아

광산에서 광맥이 끊어지거나 계약이 만료되어 일자리를 떠나게 된  중국인들은
고향으로 돌아 가려고 처음 도착하였을 머물렀던 보충대 같은  차이나타운에
모여
들었다


그들이 다시 돌아 온 그 곳은 잠시 머무르고 떠날 보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2천명이 지내기에는 좁아터진 목재 창고 자리에 차지하여 한정 되었던 장소는
옆으로 블록이나넓게 확장되어 있고 두 동 뿐이 없던 건물 옆에도 새 건물이
지어 져 있었다 


발전하여 나가는 차이나 타운의 지도


새로 지어진 건물에는 전에는 없었던 각종 상점도 많이 들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떠나는 배는 정기적이 아니고 광동에서 들어 오면 다시 떠나는
부정기선이라
그들은 다음 배를 기다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만 하였다

 
당시 중국인 이민자 입국수속에 관한 신문기사에 삽입된 그림

한편

샌프란시스코 백인 장사꾼들은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밀려 들어 오는 중국 들을
보며 새로운 소비계층을 기대하였다

그리고
 광산에서 일하고 돈벌어 돌아 오는 중국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 술집, 아가씨,  갬블 테이블을 준비하고 노래를 불렀다



"머리통에
돼지꼬리 꽁지 늘어뜨린 괴상한 녀석들 도박을 좋아 한다는데.. 더구나 동안
여자 맛도 모르고 살아 녀석들

저들이 풀어 놓을 돈맛은 짭짤 할거야..흐흠"

그러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중국사람들은 벌써 주판을 두드리는데 손가락으로
계산을 하는 백인 장사 꾼들의
계산 방법은 중국인 보다 훨씬 뒤떨어진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정말 피땀 흘려 벌은 돈을 함부로 쓰고 싶지 않았다 고향에 기다리는
처자식 또는 부모 형제들과 삶을 만들 밑천으로 삼을 돈인데
배를 기다리며 놀고 있는 동안 이라도 푼이라도 벌려고 백인지역에서
허드레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돌아 다녔다

날품 팝니다 .. 쌉니다

그렇게 날품을 팔며 그들은 좋은 정보를 얻어 왔다

여보게 윗동네 새로 차린 살롱에 옆에다 세탁소 차리면 장사가 같으네..
우리
모아 돈을 합작하여 투자 하는 어떨까…”

그들은 사람을 대표로 가게를 차리고 가게에서 자고 먹으며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벌다 보니 가게를 차릴 돈이 모아지었고 투자 하였던 사람 중에 
다음 사람에게 가게를 차려 주었다

그렇게 계획대로 사업이 진행되어 모두가 가게를 가지게 되자 사람이 필요
하게
되었다

그들은 고향에 가서 살겠다는 애초에 계획을   포기하고 고향에 있는 가족을
데려 오기로 하였다

가게를 차리고 가족들을 불러 함께 일을 하면서 여럿이 동업 하던 식으로 돈이
모아 지면
사람에게 가게를 차려 주었다
일자리 창출도 자기네 식구들에 하여주는 셈이니 기존에 백인 다수 사회에서 중국인들의
사업은 기존 사회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백인들은 투자하여 중국인들 돈을 먹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호텔이나 술집 옆에
세탁소가 들어서고 식당이 들어서 오히려 그들에게 역으로 장사를 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차이나 타운 밖에서 물건을 사지 않았으니
백인들은 중국인들을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불어 닥칠 안티 중국인 사건의 시작이었다

 

저들은 땅에서 이민자가 아니다 저들은 나라의 돈을 자국으로 보내는
얌체 민족이다 , 사는 것도 어찌나 더러운지 저들이 사는 동네는 쥐가 끓어
흑사병에 걸릴 위험이
있으니 우리에게 전염되기 전에 모두 추방 시키자

그 여론의 결과는 없었다
수 만명으로 늘어난 차이니스 쿨리를 중국으로 돌려 보내는 비용도 엄청 나지만
그럴만한 배도 모자르고 더구나 인구가 늘어난 켈리포니아 주민에게 필요한 농산물을
재배 하는 농촌 지역에 일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무산
되었다



samkorea
 (2011.12.14 17:15)

당시 중국인들은 짐승 취급 받앗다,죽든 말든 소 돼지 처럼 여겁고 영어를 할수 없어서 백인들이 따지면 도망가기 일수 여서 영어로 yellow 라는 의미중에 하나는 비겁한 놈 겁 많은 놈 이라는 의미가 있다 . 동양인 하면 yellow 라는 의미는 사실 치욕스러운 의미다. 그걸 깬?민족이 일본 사무라이다.일본인들도 중국놈 처럼 했다가 19세기에 사무라이정신으로 백인놈들 목을 자르고 활복하는 모습에 일본아이들은 그 당시에도 특별?대우 했다. 고로 한국인들도 이제 강인한 정신을 소유하자 .
samkorea (2011.12.14 17:17)



요사이 때 놈들은 서해에서 완전 해적 질 한다 . 이순신 장군에 이제는 중국 해적을 상대로 대첩을 이루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