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行步 - 반숙자
사람의 숲
사람들 숲을 빠져나왔다. 오늘 플라자 뷔페에서 밝은 사회 클럽 회장 이취임식이 있었다. 다른 모임과는 달리 이 모임은 종소리로 시작해서 종소리로 끝나는 특이한 회의 순서에다가 명상시간이 있어서 잠시지만 눈을 감고 자신이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게 한다. 많은 회원들이 참석해서 사람들 숲은 싱싱한 열기로 웅성거렸다.
골목에는 안개가 낮게 진을 치고 있다. 겨울 날씨인데 봄밤처럼 포근하다. 거리의 상점에 밝힌 불들은 꿈꾸는 것처럼 아련하게 비친다.
일행과 헤어져 혼자서 시장통을 걸어간다. 작은 읍내의 시장통은 장날이 아니고는 일상용품을 파는 가게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정답게 늘어서 있다. 간판들도 고만고만해서 누구라도 문을 밀치고 들어가고 싶은 친밀감이 느껴진다.
나는 이 저녁 마음이 한없이 한가로워져서 할 일 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거리를 걷고 있다. 육십여 년 전에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이 길을 지나 학교에 갔고 교사가 되어서는 초등학생들을 인솔해서 이 거리를 지나다녔다. 그때 어른들은 거의가 다 세상을 떠났고 그때 어린이들이 지금 노년이 되어 느릿느릿 지나고 있다. 나무들에게는 천년의 숲이 있다지만 사람의 숲은 100년 가기가 어렵다.
1000원의 숲
채소전 골목 앞에 옛날에 대성당 빵집이 있던 자리에 3층 건물이 들어섰다. 무슨 병원, 무슨 약국이 성업 중이고 한구석에 "1000원의 행복"이라는 간이 간판이 보인다. 1000원의 행복이 뭘까 문을 밀쳤다.
주방용품부터 귀이개, 요지, 커피 잔, 냄비받침, 반찬통 등 자질구레한 물품들이 수백 가지 진열돼 있다. 모두가 천원이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있어도 고만 없어도 고만인 물건들을 팔고 있는 중년 여인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녹차를 한잔 따라주며 혼잣말처럼 "안개가 자옥하네요"한다.
나는 공범자의 은밀한 눈길을 건네며 녹차를 천천히 마셨다. 손님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일면식도 없는 주인과 객은 파는 일도 사는 일도 잊어버린듯 창밖의 안개를 바라보다가 천 원짜리 고무장갑을 사들고 가게를 나섰다.
조금 전보다 안개는 더 농밀해졌다. 가끔씩 지나는 사람들 모습이 실루엣처럼 보였다 사라졌다 한다. 나는 한복가게 앞에서 잠시 멈춰 어머니의 버선 한 켤레를 샀다. 올해 96세 되신 어머니의 기억은 안개 같아서 삼일 운동과 육이오 전쟁 사이를 숨바꼭질한다.
어디로 자꾸 걷고 싶다. 앞머리가 촉촉하게 젖어온다. 불빛 따스한 "사랑하는 사람들" 카페로 올라갈까, 수성교를 지나 음악이 좋은 "그대 그리고 나"찻집으로 올라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충북서림"으로 들어섰다. 주인이 상냥하게 반긴다. 주인은 나에게 문사 대접을 톡톡히 한다. 어떤 책을 사든지 20%를 할인해 주고, 이곳 작가들의 작품을 팔아주기도 한다. 시골이지만 이것도 하나의 문화라는 생각을 한다. "밤안개가 심하지요?"
주인의 말에 웃음으로 답하고 가대에 선다.
문학의 숲
시골서점의 가대에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 세상이 보인다. 거기서 보는 세상은 안개 숲이 아니라 지성의 숲에서 청정한 공기를 내뿜는다. 재테크부터 어린이 공부까지 일별하고는 장영희 교수가 쓴 "문학의 숲"을 집어들어 뒷장부터 읽어간다. 단행본일수록 뒷장부터 읽어가는 이유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더 정이 가는 나만의 버릇이다.
윌리엄 포크너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에서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는 말이 장영희 교수가 나에게 한 말이며 또한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준 비장의 언표라고 생각되었다.
내가 만일 문학의 숲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소리 없는 세상에서 내 영혼은 얼마나 황폐했으며 고립되고 무의미했을까. 목발을 짚고 평생을 넘어지고 일어서며 예까지 걸어온 장교수의 의지에 내 마음을 포개며 책을 가슴에 끌어안고 서점을 나선 것은 열시가 넘어서였다,
둑길을 걸었다. 가로등이 부옇게 졸고 있는 인적 드문 둑길에는 안개가 포진을 해서 양수 속에 있는 아기처럼 포근하다. 가다 멈추고 가로수에 맺힌 은방울들을 바라본다. 가지마다 잎눈마다 맺힌 영롱한 구슬들, 나도 문학 밖에 살 때에는 저 구슬들이 물방울로 보였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학의 언저리를 맴돌면서, 또 문학의 숲에 날아든 후로는 구슬이 나무의 눈물로 보였고 뿌리의 자맥질로 느껴졌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다.
나는 이 밤 아무도 함께 있지 않지만 공존의 실재를 느낀다. 문학. 하느님. 그리고 나. 안개는 無音무현의 현을 켜서 무음의 귀에 응답을 준다. 그러므로 "사랑하여라"라고
<계간문예, 2006.봄호>
*한자는 작가가 쓴데로 하였음. 참고: 작가는 귀에 보청기를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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