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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똑똑한 노인

Joyfule 2025. 2. 25. 20:47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똑똑한 노인          

 

내가 묵는 실버타운에서 나이 아흔 살의 점잖게 생긴 노인이 있었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젊은 날 꽤 미남이었을 것 같다. 나이답지 않게 눈빛이 총명해 보인다. 그가 말한 대충의 과거는 이랬다. 서울태생의 그는 부유한 집 아들이었다. 명문 학교를 나온 그는 육이오 전쟁 당시 장교로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방송국 생활을 잠시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무역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했다. 우리나라가 아직 가난했을 당시 그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성공한 재미교포였다. 그는 당시 서울에 오면 사람들이 존경해 주면서 식당에서 설렁탕 값도 받지 않더라고 했다. 그는 나이를 먹고 고향인 한국에서 죽으려고 귀국해 동해 바닷가의 실버타운에 정착했다. 좋은 노인 같았다.

그가 온 이후 우연히 많은 미국교포들이 동해의 실버타운으로 역이민을 왔다. 먼저 온 그 노인은 나중에 역이민을 오는 미국교포들의 자연 스런 지도자가 된 것 같았다. 그 노인은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 역이민 온 다른 노인부부들을 초청해 차와 과일을 함께 즐기면서 따뜻한 인정으로 품는 모습이었다. 나도 그 노인의 집에 들려 오랜 인생을 살아온 덕담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인격을 갖춘 훌륭한 노인 같았다. 내 스스로 그 노인에게 다가가 저녁을 사면서 힘든 일이 있으시면 돕겠다고 자청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의 영향력 안에 있던 사람들의 공기가 냉냉해 지는 느낌이었다. 그보다 조금 늦게 미국에서 온 분이 이런 말을 했다.

“그분이 주민센터에 가서 나라에서 나오는 지원금을 타라고 코치를 하더라구요. 미국에 있는 재산을 한국정부에서 모르니까 돈 없는 노인이라고 신고하면 매달 돈을 준다고 알려 주더라구요. 그건 프라이드가 없는 행동 아닙니까? 미국에 재산이 있으면서 왜 나라를 속입니까? 또 우리가 미국에서 몇 십년을 사는 동안 한국에 기여한 게 뭐 있습니까? 그런 얄팍한 짓을 자기는 약다고 알려주는지 몰라도 옳지 않아요. 그건 친절이나 현명함이 아니죠.”

그 말을 해 주는 노인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하던 박사출신이었다. 나름대로 긍지를 가지고 있는 분이다.

그 노인을 좋게만 보았던 나의 기대가 어그러지는 순간이었다고 할까. 내가 과대평가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역이민을 온 또 다른 칠십대 후반의 여성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실버타운에 제대로 거동을 못하는 노인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세제까지 가지고 가서 청소를 해 줬어요. 우리들 지도자 노릇을 하는 그 분이 그걸 보더니 그 노인은 도와줘야 영양가 없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영양가라는 말에 그 인격을 다시 보게 됐어요. 사업으로 성공했다더니 늙어 죽을 때도 장사꾼 마인드를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 노인에게서 점점 떨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한 팔십대 노인은 그 사람이 자기를 차량 기사같이 취급하고 명령을 하는 게 언짢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년이 지나면서 노인사회를 장악하려고 하던 그 노인은 거꾸로 속칭 왕따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한번은 그가 나를 불러 그의 숙소로 갔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는 유튜브 화면에 나오는 한 성악가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내가 그 성악가를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아니 저 유명한 성악가를 모르다니?”

노인은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저 유명한 성악가를 모를 수가 있어요?”

노인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노인은 내게 주위의 소문에 대한 변명을 했다. 미국에서 온 다른 사람들은 질이 형편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기껏해야 야채를 팔거나 세탁소를 하거나 편의점을 하던 하층이었다는 것이다. 자기같이 고급 주택가에서 좋은 집을 쓰고 살고 성공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의 실버타운에 와서 생활해 보니 다른 한국노인들도 모두 수준이 낮아서 함께 하지 못하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의 인격의 바닥을 보는 느낌이었다. 실버타운에서는 척을 하면 생활하기 힘들다고 했다. 있는 척 배운 척 잘난 척하면 소외되게 되어 있었다. 어느새 그는 속칭 왕따가 됐다. 어느날 그가 억울하게 왕따가 됐다는 사실이 한 유튜브방송을 통해 나왔다. 실버타운 내의 문제점을 고발한 내용이었다.

관리사무실 측에서 그 방송에 대한 제보를 내가 했느냐는 문의가 왔다. 그 노인이 범인은 글을 쓰는 나일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별것 아니지만 엉뚱한 모략을 당한 셈이다. 그 노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 노인은 어느날 같이 골프를 치던 노인을 살인미수로 고소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이 날아와 맞았다는 것이다. 파크골프는 구르는 커다란 플라스틱 공이었다. 그의 주장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특이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평생을 그런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가 드러난 노인은 관리사무실에 실버타운의 비리를 알리는 유튜브 방송의 이탄 삼탄을 준비하고 있다고 협박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모순의 그 행동에 내가 쓴 누명이 저절로 풀리기도 했다. 실버타운은 또 다른 인간 시장인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전해 들은 것들이 다 헛소리이기를 바란다. 인생의 밤을 맞이한 그 영감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라는 기도를 했다. 초라하고 불쌍한 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