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말 한마디

Joyfule 2023. 7. 13. 00:55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말 한마디



밤새 눈이 내려 은세계로 변했다. 바다를 향해 출렁거리며 내려가는 좌우의 낮은 구릉들이 순결한 흰 눈에 덮여있다. 그 위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겨울나무들이 하얀 눈꽃을 피워올리고 있다.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이 온 세상을 포근히 덮고 있다. 바닷가에서 살기가 지루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나는 매일 작품이 바뀌는 천국의 미술관에 있다. 어제저녁 황혼의 바다는 수정같이 맑았다. 바다 깊숙이에 있는 흰 모래와 드문드문 있는 검은 바위가 물결과 빛살에 출렁거리며 그대로 들여다 보였다. 멀리 수평선 위에 떠 있는 느긋한 화물선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한 폭의 풍경화였다. 

하나님의 작품들이 슬라이드 영상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 그림 속에서 갯내음이 섞인 바람이 나의 피부를 쓰다듬기도 한다. 그 분의 작품은 촉각과 후각으로도 느낀다. 아름다운 지구별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간다면 억울하지 않을까. 금고속에 들어가 여행을 하다가 별을 보지 못하고 그 영혼이 다른 곳으로 갈 것 같다. 이 바닷가 조용한 방에서 나는 작은 글을 쓴다. 소수의 독자를 상대로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작업은 행복하다. 어젯밤부터 기억의 서랍을 뒤지면서 어떤 걸 쓸까 기도했다. 하얀 모니터 속에서 커서가 뜸북뜸북 눈을 떴다 감으며 내가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방안에는 명상음악이 조용히 너울을 일으키고 있다. 갑자기 광활한 기억의 들판 아주 먼 저쪽에서 한마디 말이 아스라이 들려오고 있다. 초등학교 육학년이던 소년이 보이기 시작한다. 새벽 네시 교회의 차임벨이 울리는 속에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부비면서 공부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중학교 입시경쟁이 치열했다. 일류 국민학교에 다니는 부잣집 아이들은 전문과외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집에는 상주하는 개인 가정교사가 또 있어 아이들의 공부를 거들었다. 나는 혼자 일류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교과서를 달달 암기하고 전과까지 외웠다. 머리가 둔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가 열 번 보면 스무번 보겠다고 다짐했다. 아차 하는 실수 하나로 합격이 결정됐다. 다섯 과목 백육십오문제중 한 문제 이상 틀리면 불합격이었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문제들을 풀 때 글자마다 동그라미를 치면서 확인하고 음미했다. 종이장 같은 얇은 차이로 어려서부터 아예 인간의 품질을 선별하는 세상이었다. 과일이나 고기에 품질표시를 하듯 교복에 붙은 뱃지가 품질 표시였다.

당시는 합격자 발표를 라디오방송으로 했다. 아나운서는 툭툭 건너뛰면서 합격자 번호를 불렀다. 어느 순간 나의 수험번호가 나왔다. 인생에서 처음 맛보았던 짜릿함이다. 그때 나는 덤으로 인생의 귀한 선물을 하나 받았다.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헤어질 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네 태도를 지켜봤다. 앞으로 너는 뭘 해도 성공할 거다.”

그 한마디가 주술같이 나의 영혼 깊숙이 스며들어 배의 바닥짐 같이 평생 나의 중심을 지켜 주었다. 나는 될 사람이었다. 그 한마디는 고시에 도전했을 때도 내면에서 불씨 역할을 했다. 시험에서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나는 될 놈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합격하는 순간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인생의 두번째 짜릿함을 느꼈다. 어린 시절 정신에 최면을 걸어준 선생님의 한마디 덕이었다. 


말의 힘이라는 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검사 집에 들어가 강도를 하고 중형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교도소에서 만났던 그는 어린 시절 엄마나 누나로 부터 ‘안될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는데 진짜 그렇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탈주범 신창원을 변호할 때도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 구치소에서 그는 벌거벗은 윗통에 체인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지옥도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의외로 그는 자신의 불행을 초등학교때 선생의 말 한마디로 돌리고 있었다. 그는 선생님한테 월사금을 내지 않았다고 매를 맞기도 하고 저주같은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고 고백했다. 선생님이 따뜻한 말 한마디만 해 주었더라면 지금같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년범들에게 한마디라도 살리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한마디 격려가 사람을 피어나게 하고 한마디 저주가 한 인간을 악마로 만들기도 한다. 평생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어머니가 임종 하루 전이었다. 어머니가 병상에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들 앞으로 잘 될 거예요.”

어머니의 그 한마디가 쐐기같이 나의 영혼에 와서 박혔다.

어머니의 마지막 위대한 선물이었다. 성경을 보면 죽기 전 자식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축복해 주는 장면이 나온다. 세상에 비난과 저주의 말들이 미세먼지처럼 자욱하다. 축복과 사랑의 말들을 담은 시대의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