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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영혼의 눈

Joyfule 2023. 7. 11. 00:59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영혼의 눈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야트막한 산자락에 빼곡하게 들어선 다가구 주택들이 물폭탄을 맞고 있다. 미로 같은 산비탈 골목의 좁은 계단 아래 쪽으로 누런 흙탕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고 있다. 모든 게 흥건하게 젖어있다. 집도 도로도 차도 공중에 전깃줄이 무질서하게 엉겨 있는 비스듬한 전봇대도 젖어있다. 산자락 아래 있는 다가구 주택의 지하방으로 흙탕물이 침입하고 있다. 하수구의 물이 역류하면서 화장실의 변기가 입을 열고 구정물을 토해내고 있다. 내가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다가구주택 반지하 방에서 함께 살던 몇 명의 시각장애인들이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왔었다. 그 중 오십대쯤의 시각장애 여성이 내게 호소했다.

“저와 같이 안마를 하는 시각장애인 몇 명이 그동안 저축한 돈을 모으고 은행융자를 얻어 다가구주택 지하층을 분양받았어요. 그런데 비가 올 때마다 집안이 물바다가 되고 그 위로 살림살이들이 둥둥 떠다녔어요. 열심히 흙탕물을 퍼내고 청소를 했지만 당해 낼 수가 없어요. 여러번 연락해서 사정해도 건축업자는 꿈쩍도 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법에 호소를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부실 공사가 틀림없었다. 건축업자는 시각장애자들을 무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그들에게 평등을 말해주지만 잔인한 이면들이 있다. 그 얼마 전에 시각장애인들한테서 가슴 아픈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이 모여서 시위를 할 때였다. 경찰이 못이 박힌 각목들을 시각장애인 시위대가 가는 길에 몰래 놓는 바람에 다쳤다고 했다. 공권력도 인권의 사각지대에서는 잔인했다.

“사는 게 이렇게 힘이 드셔서 어떻게 하죠?”

내가 위로를 담아 말했다. 내게 말하는 시각장애여성의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나를 보지 않고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넘겼다. 깔끔한 성격 같았다. 그녀가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젊었을 때 고생에 비하면 이건 별 거 아니예요.”

그녀의 말에는 여유마저 느껴졌다. 독한 고통은 작은 고통을 지우는 것 같았다. 보이는 나는 그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녀의 삶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 물었다.

“그런 고생이 어떤 것이었나요?”

“세 살 때 엄마가 죽었어요. 엄마가 죽은 후 나는 열병을 앓고 눈이 안 보이게 됐죠. 저는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죽어지지 않고 살았어요. 커서 안마사가 되어 먹고 살았어요. 손님이 불러놓고 그냥 가버리면 택시비만 날아갔어요. 술 취한 분을 안마해주고 돈 한푼 받지 못하기도 했어요. 어떤 때는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기도 했어요. 안마 손님 중에는 문을 닫아걸고 강간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피를 흘리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길바닥을 더듬어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어요. ”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에게 세상은 지옥일 것 같았다. 그녀가 말을 계속했다.

“그래도 저를 사랑해주는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어요. 남편도 보지 못했어요. 그래도 산다는 게 좋았어요. 남편과 달동네에 셋방을 얻었어요. 방이라고 해도 창호지로 바람만 막게 되어 있어 겨울이면 방안이나 밖이나 춥기는 마찬가지였어요. 거기서 손으로 더듬어가며 아기 기저귀도 빨고 바느질도 했죠. 안마를 하겠다는 손님이 있으면 오도바이 뒷자리에 타고 안마를 하러 갔어요. 겨울에 오도바이 뒤에 앉아 가면 뼈속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안마를 하고 돌아와 연탄불로 데워진 따뜻한 온돌방에 누우면 행복했어요. 하나님 이렇게 따뜻한 방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했죠.”

그녀가 살아온 비결을 알 것 같았다. 그분이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보호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떤 행복을 추구할까 궁금해서 물었다.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제게 남은 소망이 있다면요 몇 푼 안 되지만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어요.”

“더 어려운 사람이라뇨?”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녀보다 더 힘든 사람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밥을 못먹는 사람들과 등록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에게 제가 모은 돈을 주고 싶어요.”

나는 속으로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녀 앞에서 감히 누가 자신의 절망을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그분과 함께 있으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개미도 파리도 다 가지고 있는 눈이 뭐가 중요하냐는 것이다. 자신은 영혼의 눈이 있다고 했다. 그 분과 함께 있으면 가난해도 어떤 고통이 다가와도 고통이 아니라고 했다.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한 빛이 그녀 주위에 감도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