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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비가 오면 빗길을,눈이 오면 눈길을

Joyfule 2023. 7. 6. 13:31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비가 오면 빗길을,눈이 오면 눈길을



변호사시험에 실패해 고통을 호소하는 글을 봤다. 삼십대 중반인데도 빚만 늘어가고 은퇴한 아버지는 노동일을 한다고 했다. 앞이 캄캄하고 절실한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경험상 그런 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은 “나도 그랬다”였다.

이십대 말 나의 불행을 조금 꺼낸다. 중풍인 아버지와 어머니,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 아내와 아이가 내 어깨에 매달린 가족이었다. 고시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살아오면서 가난의 밤, 좌절의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내 속에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아프다고 울면서 따뜻하게 위로해 줄 누군가를 찾는 아이가.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나는 눈 덮인 텅 빈 겨울 들판에 혼자 서 있었다. 외롭고 불행했다. 내가 아무리 아프다고 해도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이해하려고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비웃고 얕보는 것 같았다.

비참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먼지 같은 내 존재를 자각했다. 간절히 기도했다. 몸은 진창에 있어도 영혼만은 살려달라고. 하늘에 계신 그 분은 나를 마지막까지 몰아친 다음에야 불쌍 했는지 줄 하나를 내려보냈다. 그 분의 방식이었다. 나는 그 줄을 잡고 간신히 절벽을 기어올랐다. 인간의 심리란 묘했다. 다시 절벽 아래로 밀어뜨리고 싶어 하는 심리를 가진 사람도 있다. 미꾸라지가 개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아예 콘크리트를 붓는 심리 같다고나 할까. 그런 게 있었다. 세상에서 정의가 강물같이 흘러야 한다고 하지만 그건 공허한 관념이고 위선적인 이상일 뿐이다. 실제로 흐르는 현실의 구정물에서는 악취가 났다. 힘이 없으면 짓밟히고 눌리는 게 세상이다. 예수의 죽음의 원인은 질투였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는 패배자였다. 십자가는 그것들의 은유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악마의 힘이 더 강한 것 같았다. 정당한 노력의 댓가를 받지 못하고 빼앗긴 적도 있었다. 억울함에 오열하기도 했다. 세상은 불공정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런 불공정을 인정해야만 살 수 있었다. 왜 그래요? 하고 따지기 시작하면 불행의 늪이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다. 불공정을 인정하고 불행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데 인생의 열쇠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찾아온 불행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해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밖에. 나는 지독히 재수가 없는 놈이기도 했다. 눈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의사는 천 명중 한명의 비율로 실수내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천명중 한 명이 나였다. 왜 하필이면 나지?하고 분노가 일었다. 글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내게 눈은 모든 것이었다. 그러다가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아니어야지?라고. 불행이 나만 피해갈 이유가 없었다. 받아들이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한쪽 눈이 성하다는 사실에 감사까지 나왔다. 평생 가슴에 맺히는 억울한 판결을 받은 적도 있다. 명문대를 나오고 미녀인 여성이 이혼소송을 맡겼었다. 승소를 하고 위자료까지 받아주었다. 얼마 후 그녀가 나를 배임죄로 고소를 하고 거액의 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내가 소송의 상대방인 그녀의 남편으로 부터 돈을 받아먹고 소송을 불리하게 진행했다는 이유였다. 그녀는 나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워낙 확신을 가지고 덤비니까 대법관 중의 한 명은 “그래도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그 여자가 그렇게 집요하게 덤비겠지”라고 했다. 나는 양심에 꺼리는 게 없었다. 선의였다. 그런데도 대법원판결은 그녀 편이었다. 독을 품고 평생 대법관을 따라 다니는 사람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 적은 인간사의 날벼락을 맞은 나는 참 재수가 없는 놈이다. 변호사시험에서 떨어졌다는 청년을 위로하기 위해 나의 불행했던 과거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 청년에게 말해주고 싶다. 밤이 깊어야 별이 보이고 새벽이 온다고. 똑같이 감옥에 있어도 어떤 죄수는 바닥의 진흙탕물을 내려다 보고 어떤 사람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바라본다. 찾아온 불행을 피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해 버리는 것 그게 별을 보는 태도가 아닐까. 인생에서 눈이 오면 눈길을 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쩌란 말인가. 내면에 있는 소년에게 울고 보채지 말라고 주의를 주어야 한다. 인생은 좋은 일 나쁜 일,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이라는 실에 의해 짜이는 한 조각의 옷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