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중에는 기억의 자락에 더러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신문을 뒤지다가 나를 실명으로 거론하면서 ‘보기만 해도 역겹다’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했다. 비판 논객으로 알려져있는 사람이 쓴 글이다.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왜 그에게 역겨운 사람이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 다른 비난도 있다. 신문에 이름이 났던 도둑을 변호할 때였다. 그 도둑이 사회의 관심을 끌고 방송국에서 불러서 나갔었다. 토크쇼의 사회자가 대뜸 “별 볼 일 없는 변호사가 한번 떠보려고 그 사건을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에 대해 의견이 어떠십니까?”라고 물었다. 내가 유명해지고 싶어 들뜬 경박한 인간이 됐다. 사실 그 도둑이 돈이 없고 변호사도 없어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맡은 사건이었다. 그 비난을 받고 나는 똥물을 공개적으로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내 의견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설득하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이었다. 세상은 설득당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유없는 증오와 미움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주위에 열 명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중 두 명은 나를 극도로 역겨워하고 두 명은 좋아하고 여섯명은 무관심한 게 세상의 법칙이라고 한다. 예수님도 악마라는 비난을 받았다. 나를 역겹다고 한 분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다가 감옥에 간다는 보도를 보았다. 방송에서 내게 질문을 했던 그 사회자는 민주화투쟁경력과 방송의 유명세를 타고 대통령비서실장이 됐다. 나에게 했던 질문은 바로 그 자신의 생각과 인격 수준인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그들보다 내가 더 파렴치한 죄인이다. 변호사로 살아오면서 남을 비판하거나 비난했던 게 너무 많았다. 지금도 참회하고 미안해 하는 과거의 일들이 있다. 한 미모의 여성이 이혼소송을 맡기면서 내게 자기의 애환을 말했었다. 그녀는 명문 여고와 대학을 나왔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이 기우는 바람에 부잣집 못난이 아들과 결혼하게 됐다고 했다. 사랑하는 남자가 따로 있었다고 했다. 결혼 후 그녀는 열등감이 심한 남편에게 학대를 당했다고 했다. 잔인한 폭행이 있었고 심지어 그녀를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남편이 주차장 두꺼운 나무문의 나사를 몰래 빼놓아 그 문이 주차하려는 그녀에게 떨어질 뻔 했다는 것이다. 감정이입이 되어 분노한 나는 법정에서 그녀의 남편에게 저주와 비난을 퍼붓고 승소판결을 받았다.
뒤늦게야 나는 그녀의 모든 말이 새빨간 거짓이었음을 알았다. 그 모든 게 그녀가 드라마를 보고 상상한 거짓이었다. 나는 그녀의 남편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고 싶었다. 서류에 적힌 나의 비난들을 보면서 내 인격의 수준이 그 정도인 걸 확실히 알았다. 생각과 인격의 수준이 사람마다 다른 걸 실감한 또 다른 사건이 있다. 그 대충의 내용은 이렇다. 한 여성에게 두 남자가 있었다. 한 남자는 사랑이 식어버린 법적남편이었고 다른 남자는 우연한 기회에 만나 가슴속에 사랑의 불을 피운 사람이었다. 법적 남편의 학대에 시달리던 여성은 자살을 결심하고 한강으로 나갔다. 그 시간 법적 남편은 불륜의 증거를 찾기 위해 아내의 이메일을 해킹하고 있었다. 그녀의 다른 남성은 한강 다리들을 헤집고 다니다 마침내 물에 빠진 그 여성을 구해냈다. 법적 남편은 아내의 다른 남자에게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나는 변호사로 소송을 진행하면서 결혼의 본질이 무엇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벙어리 삼룡’이라는 대학시절 국어교과서의 소설이 떠올랐다. 주인아씨를 사랑하는 벙어리 삼룡은 불이나자 주인아씨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강을 오르내리며 그녀를 구하려고 헤매던 남성에게서 벙어리 삼룡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맡은 사건의 법적 남편은 아내와 벙어리 삼룡같은 상대방 남자를 무자비하게 비난했다. 나는 사건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호적에 있는 남자가 남편이 아니고 사랑하는 남자가 진짜 남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판사에게 사건의 본질을 한번 살펴 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변론했다. 내 말을 들은 판사는 호적이 있고 주고 받은 이메일이 부정한 행위의 증거인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나를 비판했다. 세월이 흐른 후 나는 그 사건을 모티브로 단편 소설을 써서 문예지에 보냈다. 작품이라기 보다는 물 위에 풀어놓은 기름 물감을 종이에 그대로 뜨듯 사실을 그대로 서술했다. 작품이 되려면 작위적인 변용이 필요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관계되는 분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배경과 인물의 직업등은 바꾸었다. 그 소설이 심사를 통과해 문예지에 실리고 평론이 함께 실렸다. 문학계의 거두로 알려진 그 평론가는 내 작품이 너무 작위적이라고 비판했다. 그 사건을 보는 나의 시각과 법관의 생각 그리고 문학평론가의 기준이 전혀 달랐다. 결국 비난은 그 사람의 생각 수준이고 비난은 인격 수준이아닐까. 대통령과 야당 대표를 타켓으로 비판과 비난이 폭포같이 쏟아진다. 그런 비판과 비난의 말에서 우리 국민들의 생각과 인격이 짐작된다. 각자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겸손해야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부드러운 혀를 가져야 다툴 일이 줄어들고 온유한 귀를 가져야 화를 참을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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