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주는 즐거움
점심때 동해시의 작은 소머리국밥집에 갔다. 우연히 거기서 같은 실버타운에 있는 아흔다섯살의 노인을 봤다. 간병인과 함께 국밥을 먹고 있었다. 모처럼 외식을 하러 나들이를 하러 온 것 같았다. 말이 없으면서도 환하고 밝은 미소가 아름다운 노인이었다. 마음도 넉넉해 보였다. 혼자 살면서 생일에는 떡 한덩어리라도 다른 노인들에게 돌렸다. 나는 갑자기 그 노인에게 밥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올 때 카운터에서 그 노인과 간병인의 밥값을 조용히 치렀다. 기분이 좋았다. 가난했던 소년 시절 친구들한테서 짜장면이나 곰탕같은 걸 자주 얻어먹었다. 감사했다. 그렇지만 빚진 것 처럼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었다. 젊어서는 접대를 하느라고 남에게 밥을 산 적이 있다. 부담스럽고 그 비용이 아까울 때도 있었다. 나이 먹은 이제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밥을 사게 됐다. 예수가 말한 것처럼 받는 것보다 주는 게 즐겁다는 걸 깨닫는다고 할까.
여섯달 쯤 전일까. 실버타운 근처에서 서성이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길고양이를 봤다. 마음이 애잔했다. 마트에 가는 길에 사료를 한 푸대 샀다. 그리고 실버타운에서 일하는 분에게 고양이에게 밥을 줬으면 좋겠다며 부탁했다.
엊그제는 내 방 창문을 통해 그 고양이가 실버타운 앞마당을 걸어가는 모습을 봤다. 살이 통통하게 찌고 노란 털에서 윤기가 흘렀다. 그 뒤를 건강해 보이는 작은 고양이가 따르고 있었다. 그동안 새끼를 낳았다고 했다. 그 고양이들을 보면서 기분이 좋았다. 젊어서는 버려진 강아지나 길고양이를 동정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뒤늦게야 나는 작지만 주는 즐거움을 깨달아간다고 할까.
울산 바닷가에서 노점상을 하는 허름한 옷을 입은 오십대 여성을 본 적이 있다. 작달막하고 퉁퉁한 몸집의 평범한 얼굴이다. 그녀는 여름에는 아이스 커피를 팔고 겨울에는 군밤을 판다고 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바닷가에는 세월을 낚으러 오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에게 공짜 커피 한잔씩 드리면 참 기분이 좋아요.”
가난해 보이는 그녀는 마음이 넉넉한 것 같았다. 그녀가 덧붙였다.
“커피는 팔면 무조건 남는 장사예요. 매일 천원짜리 세장씩을 따로 챙겨뒀어요. 그렇게 모은 돈으로 금 이십돈을 사서 기부했죠. 노점상인 저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지만 저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요. 주니까 기분이 좋아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분 좋다는 소박한 말 속에 큰 의미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남한산성을 오르는 길목에서 등산객들에게 김밥을 팔던 박춘자 할머니는 자기가 평생 번 돈 육억원을 좋은 데 써달라고 기부했다. 기부이유가 단순하고 투박했다. 기분이 좋다고 했다. 어제 박춘자 할머니가 천국으로 갔다는 기사를 봤다. 마지막에 살던 집의 월세 보증금도 내놓고 떠났다고 했다.
울산 바닷가의 노점상이나 김밥할머니는 먹을 것 먹지 않고 자신이 쓸 걸 쓰지 않고 그 돈을 기부했다. 그리고 기분이 좋다고 했다. 기분이 좋다는 말의 정확한 내막은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신비로운 희열 때문이 아닐까. 마약의 짜릿한 쾌감을 해 본 사람만이 알 듯 기부도 그 비슷한 게 아닐까. 기부의 본질은 마약의 쾌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급의 쾌감은 아닐까.
나는 기부란 탐욕을 끊어내는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일종의 수행 방법일 수도 있다. 내 능력에는 벅찰 정도의 금액을 기부해 봤다. 이상했다. 그 이후는 내가 기부한 금액만큼 탐욕이 없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 액수까지는 누가 낚시미끼를 던져도 시큰둥하며 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전재산을 내놓은 김밥 할머니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끊어버린 도인일 것 같다.
나는 요즈음 주는 즐거움을 배우며 실행하며 느끼고 있다고 할까. 늙을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을 열라는 소리가 있다. 아내가 평생을 애지중지했던 귀한 고급품이나 살림들그리고 옷까지 그걸 가져보지 못한 가난한 부부에게 몰아 주었다. 그걸 받은 부부가 완전히 새살림을 차린 셈이다. 아주 좋아하고 감사해 했다. 우리 부부가 죽고 난 후에 남긴 물건이면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주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살아서 주니까 좋은 것 같다.
나는 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구분한다. 명분에 이끌리거나 남의 눈치를 보며 마지 못해 하는 기부는 하지 않는다. 남들이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하고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 있어도 예스와 노를 분명히 하려고 애쓴다. 그걸 구별하는 기준은 즐거움이다. 이게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인가로 판단한다. 내면의 소리에 따르기도 한다. 아무리 명분이 그럴듯해도 속에서 아니라고 하면 안한다.
교회에 특별헌금을 내 봤다. 사회단체에도 돈이나 책을 기부해 봤다. 단체에서 이름을 알리고 추켜세우니까 내면의 쾌감은 증발해 버리고 없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노숙자에게 지폐 한 장을 손에 쥐어준 것보다 쾌감이 못한 것 같았다. 기부란 남에게 뭘 주는 게 아닌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주는 즐거움을 얻는 방법이 아닐까. 그건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를정도로 은밀하게 또 직접 인간의 온기가 전달 될 때 얻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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