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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주제를 모르고 살아왔다.

Joyfule 2023. 7. 1. 08:22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주제를 모르고 살아왔다.



한 방송에서 여야정치인이 팽팽하게 정치토론을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논쟁의 도가 넘어 인신공격으로 변했다.

“잘나셨는데 그러면 이 기회에 당대표를 하시죠?”

야당정치인이 냉소를 지으며 여당 의원에게 빈정댔다.

“저는 제 주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당 의원이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주제를 안다’는 말 에 갑자기 가슴속 깊이 침전해 있던 어떤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주제를 모르고 까불었던 일이었다. 이미 몇 번 글로 쓰기도 했었다. 그 일은 내가 어느 조직사회에서든 성공하기 힘든 존재임을 일찍 깨닫게 해 준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천구백칠십팔년 가을이었다. 군복무를 연기하고 고시 낭인으로 떠돌다가 장기 법무장교시험을 치르고 입대해서 훈련을 받게 됐다. 간염이 걸리고 약해진 체력 때문에 훈련 중 ‘고문관’이 됐다. 바보 같은 놈이라는 놀리는 소리였다. 낙오를 자주하다보니 군번도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그렇게 간신히 초급장교가 됐다. 일등군번을 받고 빽이 좋은 장교들은 서울의 부대로 명령이 나고 나 같은 존재가 가야 할 부대는 당연히 최전방부대였다. 갑자기 인사에 이변이 생겼다. 내가 처음으로 근무하게 된 부대가 서울을 지키는 수도 군단사령부였다. 우수한 장교는 전방에 배치되야 한다고 군의 방침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군복은 입었지만 고문관인 나는 군인정신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배치받은지 한달도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점심시간 부대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 데 문 앞에 대령계급장을 단 군인이 허리에 양손을 얹고 식당에서 나오는 장교들을 위압적인 눈길로 점검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는 장교들이 기가 죽은 채 주눅 든 얼굴로 피해가고 있었다. 대령의 무서운 눈길이 우연히 나와 마주쳤다. 찌르는 듯한 눈빛이었다. 순간 ‘나는 나다 너는 뭐냐?’하는 생각이 들면서 불쾌해 졌다. 나는 그와 똑같이 양 허리에 손을 얹고 그가 보내는 눈 길을 맞받아쳤다. 나를 째려보던 대령의 눈이 ‘너 내가 누군지 모르지? 한번 본때를 보여줄테니 기다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대령은 몸을 확돌려 가버렸다.

한 시간 쯤 후에 사령부 내에 방송이 울려퍼졌다. 전 장교들은 단독군장으로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명령이 울려퍼졌다. 잠시 후 먼지가 날리는 연병장에는 전 장교들이 나와 줄을 서 있었다. 앞의 높은 단 위에는 식당 앞에서 본 대령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대령이 모인 장교들을 향해 소리를 높였다.

“요즘 사령부 내에 장교들의 군기가 빠졌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집합을 시킨 거다.”

그는 몇 분간 군기에 대해 하나마나한 말을 했다. 그가 나를 혼내기 위해 전체 군인들을 집합시켰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말을 마칠무렵 나를 지휘봉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해산 후 저 장교가 있는 부서의 근무자들은 내 사무실로 올 것.”

나는 같이 근무하는 장교들과 함께 군단사령부 인사 참모실로 불려갔다. 대령인 인사참모 앞에 우리들은 차렷하고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너희들 법무장교들이 특히 군기가 빠져있다. 너희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나? 특히 너 엄 중위”

그가 나를 지목했다. 드디어 그가 나를 향해 정면으로 화살을 겨누었다.

“그따위로 하면 내가 당장 너를 최전방 철책선부대로 쫓아버릴 수도 있어.”

그가 말하는 순간 나는 갑자기 그의 말대로 전방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제가 그곳이 맞는 것 같았다.

장기 직업 장교로 들어왔다면 눈 덮인 전방에서 순찰도 하고 빈 시간에는 야전 막사에서 책을 읽는 편이 더 장교다울 것 같았다. 서 있던 내가 대령의 철 책상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를 정말 전방으로 보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해주시죠.”

갑자기 그가 나의 눈치를 살피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에게 저항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가 슬며시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표정을 바꾸었다.

“아닙니다. 제가 주제넘게 오버했습니다. 인사참모가 되어 사령부 전체의 군기를 잡으려고 하다 보니 제일 까칠한 법무장교를 건드렸습니다. 용서하시고 양해를 바랍니다.”

나는 얼떨떨했다. 초급장교인 내가 주제를 모르고 건방을 떨었다. 그런데 대령은 자기가 주제 넘는다고 사과까지 하는 것이다. 그는 내 뒤에 큰 빽이 있고 그 자신감으로 덤벼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터 부대 내에서 나를 보면 얼른 그 현장을 피하는 눈치였다. 어디서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나는 일생동안 곳곳에서 매를 버는 멍투성이의 불쌍한 인간이었다. 방송토론에 나온 여당의원처럼 주제를 알았으면 성공하고 평안한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뒤늦게 깨닫는다. 그때 같이 벌을 받던 같이 근무하던 박 중위가 세월이 흘러 육군 소장으로 장군이 되어 근무할 때 내게 말을 전했다. 당시 인사참모가 높은 장군이 되어 내 소식을 묻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