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지나간 시간은 어디에 있을까
어제는 미국으로 오래전에 떠난 고교동기의 회색빛 소식을 들었다. 병원에서 코에 튜브를 낀 채 하루하루를 버텨 간다고 했다. 폐암이라고 했다. 기억의 들판 먼 저쪽에서 검정교복을 입은 소년인 그가 아스라이 걸어온다. 눈이 동그랗고 여드름 자국이 있는 귀여운 소년이었다. 엄마의 끔찍한 사랑을 받는 외아들이었다. 그와 하교길에 덕수궁안 전람회장 안의 ‘도깨비 집’에 들어갔었다. 동굴 속 같은 어두운 곳곳에 소복을 입고 입에 피를 흘리는 마네킹을 설치해 공포를 만들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이따금씩 음산한 귀신소리가 났다. 우리 둘은 겁을 먹고 조심조심 어두운 통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엄마”하고 펄쩍 뛰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스텝진이 그 친구의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쑥 집어 넣는 장난을 쳤던 것이다.
오십년전 그의 놀란 표정이 지금도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그가 이제 시간의 썰물에 실려 허무의 저쪽으로 흘러 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 추억과 시간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시절 나는 칠십이 된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시간은 지독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영원히 소년으로 정지되어 있을 것 만같아 답답했다.
이십대 인생의 여름도 지루했다. 시계의 톱니바퀴 처럼 메마른 소리를 내며 시간은 조금씩 갔다. 그런 시간 들이 소리도 없이 증발해 버리고 거울 속에는 하얀 눈이 내린 나의 머리와 주름진 얼굴이 비친다. 나는 이따금씩 내가 자라난 동대문 밖 고향 동네를 찾아 간다.
내가 자란 기울어져 가는 낡은 목조주택과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던 동네 골목이 아스팔트 도로 밑 지하세계로 들어가 버린 것 같다. 골목들의 구석에서 유년시절의 질감을 찾아보려고 할 때가 있다. 나의 고향은 현실의 공간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차라리 마음속 나무 가지에 걸쳐져 있는 오래된 유행가의 한 소절이 나의 고향이었다.
나는 이따금씩 지난 시간들은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 한다. 블랙홀 같은 과거의 암흑으로 빨려 들어가 없어져 버린 것일 변호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였다. 나는 시간을 파는 지식노동자로 나를 정의했다. 아직 젊음의 푸른 기운이 남았던 그 시절 돈이 문제지 내가 팔 시간은 창고 가득히 쌓여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헐값에 팔기도 하고 공짜로 나누어 주기도 했다. 더러 공짜 좋아하는 질긴 사람들에게 빼앗긴 적도 있었다.
법원가를 쇼핑하는 사람들이 재미삼아 물으러 찾아오기도 했다.
어떤 목사는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오후가 돼도 그는 나와 얘기하자고 하고 다음 날도 마치 이웃에 놀러 오듯이 내게 찾아왔었다.
어느 순간 나는 모래시계 속의 모래같이 빠져나가는 시간이 보이면서 그게 돈보다 귀중하다는 걸 느꼈다. 없어지면 다시는 새로 만들 수 없는 게 시간이었다. 나는 시간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고 싶었다. 속인의 속박을 면할 정도로 돈문제가 해결된다면 지폐 한 장을 얻는 것 보다 의미가 담긴 책 한 페이지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 시간이 하루하루가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온도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온도는 이웃으로 번져 한 사회를 형성할 것 같았다.
시간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진지해졌다. 사람들의 애환과 우여곡절에 신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법률 서류에 그들의 절규와 삶을 밀도있게 담으려고 했다. 법정에서 그들의 입이 되어 주려고 애썼다. 나의 컴퓨터 속에는 들끓는 수 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우글거리고 있다. 나의 지나간 시간들은 그런 기록으로 변해서 존재하고 있다. 과거의 암흑 속으로 빨려들어간 건 아닌 것 같았다.
암으로 죽음이 몇달 남지 않은 의사와 함께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그는 진료차트 이만장이 자기의 지나간 시간이었다고 했다. 역시 암으로 죽어가는 소설가와 얘기를 하기도 했었다. 그가 쓴 칠십권의 책이 그의 지나간 시간이라고 했다. 살려고 노력한 그 결과 속에 지난 시간이 있었다. 시간은 시간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 노력의 결실로 존재했다. 어젯밤 유튜브에서 백 세살의 김형석 교수가 하는 말을 들었다.
“나의 그릇에 얼마나 채우느냐가 문제겠죠.”
그는 자신의 시간 그릇에 글과 강의를 채워 온 것 같았다.
나는 나의 나머지 시간 들을 무엇으로 채울까.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사랑? 관계? 문학과 예술? 잘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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