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 쪽방의 작은 책상 위에 손때 묻은 법서와 노트가 수북이 쌓여있다. 그 앞에 머리가 덥수룩한 삼십대 중반의 남자가 앉아있다.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이다. 그의 앞에는 수십알의 수면제와 물이 든 컵이 놓여있다. 그는 젊은 시절을 허비한 고시낭인이다. 그는 이미 사회적응능력을 잃었다. 사회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결정한 것 같았다. 그는 자살 실행을 잠시 보류하고 젊은날 단짝이던 친구 두명을 만난다. 한 명은 같이 고시 공부를 하다가 일찍 회사로 들어간 친구였다. 다른 한명은 방송국에 들어가 앵커를 하고 있었다. 고시낭인이 잘나가는 듯한 회사원 친구에게 원망을 한다.
“대학시절 네가 나보고 고시공부를 하라고 했었잖아? 나는 망했어.”
“네가 왜 고시 공부를 했어? 개천 출신이 판검사가 되어 신분 상승을 하려는 야심으로 한 거잖아? 정의를 위해 공부를 했던 게 아니지. 으시대면서 잘 먹고 잘살려고 한 거였어. 진짜 억울한 건 나야. 고시를 그만두고 회사로 들어와서 십년 동안 정말 밤도 낮도 없이 뼈가 빠지게 일을 했어. 그런데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하는데 가족이 없다고 내가 일 순위가 된 거야. 어제 해고를 당했어.”
옆에서 두 명을 지켜보던 앵커를 하는 친구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는 결혼을 하고 다섯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었다. 이제 살아보려고 하는데 그는 암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삼십대 후반 좌절하는 세 남자의 모습이었다. 어젯밤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작가는 답을 시청자들에게 미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젊은 시절 영화속 고시 낭인 같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다. 대학 졸업후 고시 일차에 떨어지고 오갈 데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어느날 밤 시골 여관방에서 맥주에 수면제를 먹고 누웠었다. 죽으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그랬다. 어느 순간 발끝부터 서서히 녹는 느낌이었다. 다리부터 낙지같이 몸이 흐물거리는 것 같았다. 서서히 몸이 녹아 올라오고 있었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여관방에서 이렇게 죽어갈 더러운 운명이 아니었다. 나는 살아나려고 몸부림쳤다. 그후 나는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미래의 화려한 나비가 될 꿈으로 현실의 초라함을 지웠었다.
나는 고시원 쪽방에서 살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세뇌 시켰었다. 그 반대로 방향을 잡았다.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행복해지겠다고 결심했다. 멀리 사라져 가는 기차의 젖은 기적소리를 들으면서 손에 쥔 커피 한잔에서 따스함과 향기를 발견하려고 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잡고 싶었다. 그건 마음에 달려 있었다. 법서를 밥으로 문학을 국으로 삼아 말아서 먹었다. 그때 소설속의 한 장면이 나의 영혼으로 선명하게 스며들었다.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에서였다. 어느날 아침 주인공인 그는 운좋게 빵을 하나 더 얻게 됐다. 그는 그 딱딱한 빵을 어디 숨길가 고민하다 매트리스 구석 실밥이 튿어진 안쪽에 감추어 놓았다. 그리고 얼어붙은 벌판으로 노동을 하러 나갔다. 그는 눈길 위를 행군하면서도 매트리스 속에 감추어둔 빵을 먹을 생각하니 행복했다. ‘이반데니 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의 한 장면이었다. 행복은 그런 곳에도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도 음악과 노래가 있었다. 나는 그런 문학을 통해 쪽방을 나의 천국으로 만들었다. 보이지 않던 소소한 행복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게 나타났었다.
나와 친했던 고교 선배가 있었다. 그는 물건으로 치면 명품이었다. 일찍 고시에 합격하고 장인이 법무장관이었다. 출세가 보장될 것 같은 검사였다. 그는 내게 정치로 나가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어느 날 그가 허름한 고기집에서 나와 저녁을 먹은 적이 있다. 그는 빨간 숯불 위에서 육즙을 뿜어내며 노릇노릇 구워지는 고기를 보며 뜬금없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행복이란 게 별 게 아니고 이렇게 고기를 구워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먹으면서 웃고 떠들며 사는 게 아닐까?”
갑자기 그의 영혼이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그가 왜 그렇게 갑자기 백팔십도 궤도수정을 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종종 어느 것이 진정으로 내 삶에 필요한 것인지? 나는 그것들로 인해 진정으로 행복한가를 생각해 보곤 했다. 미래의 어느 순간이 아닌 지금 당장 행복해 지고 싶었다. 제비꽃 같이 작은 행복들을 나의 그릇에 하나하나 담으려고 했다. 그것은 내 마음에 있지 않을까. 나는 매일 하얀 파도가 몰려오는 해변으로 나간다. 모든 생각을 멈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은 아닐까. 나에게만 주어진 인생을 찾는다. 나를 쉬게하고 기쁘게 하고 삶의 빛깔과 의미를 가지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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