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 잡화점 노인의 비밀
끝없이 이어진 금빛 해변이 에메랄드빛 남태평양에 이어지고 있었다. 푸른 파도 너머 수평선에는 신비로운 하얀 요트들이 그림같이 떠 있었다. 하얀 물결이 얹힌 잔잔한 파도들이 밀려와 고운 모래 뻘에 스며들고 해변 여기저기에 웅장한 저택들이 제각기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저택들마다 요트 선착장이 보였다. 세계적인 휴양지 골드코스트 풍경이었다. 그중 제일 웅장한 저택은 일흔 살의 한국 노인 소유라고 했다. 나는 그가 누구일까 궁금했다. 거액을 해외에 빼돌린 재벌이나 정치인의 집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저택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 노인의 초청을 받아 그 집에서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통유리창으로 된 벽의 한 면으로 툭 터져나간 드넓은 남태평양이 들어왔다. 집안에서 낚시를 할 수도 있고 정박시킨 요트를 타고 남태평양의 투명한 물살 위를 미끄러져 나갈 수도 있었다. 저택의 차고에는 육중한 고급 벤츠가 몇 대 웅크리고 있었다. 같이 밥을 먹던 저택의 주인 노인은 교민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던 것 같다. 그를 자세히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노인은 나를 만나자마자 그동안 말에 굶주려 온듯 쏫다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주류도매를 하다가 쉰살에 부도가 나서 야반도주하듯 빈 손으로 호주로 도망왔죠. 호주에 와서도 한국인이 살지 않는 곳을 찾다가 바로 여기 골드코스트에 정착하게 됐어요. 쉰 살이 넘은 늙은 나이에 한 카지노 호텔에서 접시닦이를 했어요. 내가 육이오 전쟁 때 하우스 보이를 해서 접시도 닦고 구두도 닦은 실력을 발휘한 거죠. 그 안에서 내가 접시닦이에 일등을 했죠. 그 카지노는 호주의 상류층과 변호사 세무사 같은 전문직 그리고 명사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어요. 세상에서 중요한 건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는 겁니다. 그들에게 접근해서 철저히 잘해주면서 신용을 얻고 그들의 성향과 상권을 살폈어요. 거기서 만든 인맥을 배경으로 면세점허가를 따냈어요. 일본인, 중국인, 이탈리아인 부자들을 제치고 해 낸 거예요.”
나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도심의 번화가에 일부러 서울 동대문시장처럼 작고 허름한 가게를 냈어요. 백화점같이 번쩍거리면 사람들이 비쌀 거라고 지레 겁을 먹고 안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도 일단 들어오게 하고 들어온 이상 뭐라도 하나 사게 하는 전략이었죠.”
그는 다른 눈을 가진 상인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가게를 하는 장사꾼의 철학이 있어요. 자신의 가게 안에 있는 물건을 주인이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물건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죠. 나는 하루 종일 내 상품들을 먼지 한 점 없이 반들반들하게 닦아주면서 사랑했죠. 그리고 다양한 민족인 고객들을 관찰하면서 물건을 팔았어요. 중국인들을 깍아주는 걸 좋아해요. 백인들은 철저한 애프터서비스로 그들의 마음을 사야 하구요. 재고를 처리하기 위한 바겐세일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손님들의 신뢰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죠.”
한국에서 실패한 그는 호주에서 뒤늦게 성공을 거머쥐었다. 번화가인 그곳의 한 블록 상점들이 거의 그의 소유라고 했다.
“이제는 이런 좋은 저택에 살면서 여생을 즐기시려고 하는 건가요?”
내가 물었다.
“이 집요? 사업을 하려면 있어 보여야 해요. 그래서 과시용으로 샀어요. 사실 이 집보다 가게 구석에 붙어있는 골방이 더 편해요. 싱크대 한 토막 작은 침대 하나면 충분하죠.”
좋은 집들은 과시용이 많은 것 같았다. 미국에서 의사로 성공한 친구의 집에 가 본 적이 있다. 부자들이 사는 비벌리 힐즈에 있는 삼층저택이었다. 친구 부부는 그 큰 집의 구석에 있는 하녀용 작은 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 방에서 전기담요를 깔고 자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 저택은 그냥 성공의 상징이었다. 몇 년 후 골드코스트 해변의 한국인 부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전해 들었다. 그의 많던 재산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는 하늘나라에서 그동안 세상에서 재미있게 장사놀이를 하다가 왔다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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