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눈을 뜨라.
기도는 종교적인 행사가 아니다
교회에 나가면 기도하라고 종용받는다. 새신자라면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뜨거운 감자(?)를 피해가겠지만,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고 묵직한 직책을 받았다면 목회자의 권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새벽기도회를 비롯한 각종 기도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다보면 종교적인 기도습관이 들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하는 행위는 쉽게 기도습관을 들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스스로 기도하는 독립심을 얻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특정한 행사의 목적에 따른 필요를 제공해주지만 그 목적이 사라지면 기도 역시 존재감을 잃는다.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경지에 오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기도는 힘들고 어려운 노동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기도는 놀이처럼 즐겁지 않고 스포츠처럼 쾌감으로 주는 보상도 없다.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습관을 들여 성령이 주는 잔잔한 평안과 그 보상을 누릴 때까지 기도는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행사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힘들고 고된 정신노동이므로 처음부터 성경적인 기도습관을 들여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경우처럼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기도습관을 들였다면 성경적인 기도습관을 들이는 것은 요원하게 보인다. 종교적인 행사로 시작하는 기도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게 아니라 참석하는 데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 단 10분 기도했더라도 만족해한다. 이렇게 자기만족이나 교회 관계자들의 눈도장을 받으려는 목적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교회에서의 갖가지 목적의 기도행사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행사는 개인 기도를 충실히 하면서 참여해야 한다. 일상의 삶에서 성령과 깊은 교제의 기도가 없이, 다만 기도행사에 참여하는 기도는 열매가 없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처럼 기도행사를 많이 하는 나라도 별로 없다. 새벽기도를 비롯해서 얼마나 많은 기도행사를 개최하고 있는가? 그러나 기도회의 숫자에 비해 기도의 열매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개인 기도를 가르치지 않은 우리네 교회의 현주소이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영적 침체는 가속화되고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무거운 직책이 있든 아님 오랜 신앙의 경륜이 있든지 간에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지 않다면 죽은 신앙이다. 죽은 신앙일수록 겉치레를 화려하게 하고 신앙행위를 중시한다. 내면에 하나님이 없음을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위해서이다. 이런 현상의 주원인이 형식적인 기도회에서 능력 없는 기도의 습관을 들였기 때문이다.
기도의 형식에 얽매이지 말라
새벽기도회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말은 안하지만 은근한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기회가 되면 이들은 새벽기도회에 참여해야한다고 핏대를 세워가며 목청을 드높인다. 그래서 그런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들 앞에 서면 초췌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묘한 죄책감이 발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속내를 잘 아는 교회에서는 각종 목적을 내건 기도회를 열어 이들의 참여를 독려하면, 머뭇거리던 사람들도 결연한 각오를 앞세워 작정기도를 시작한다. 40일 작정기도나 특별새벽기도회의 거창한 제목의 현수막이 교회건물에 펄럭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형식의 기도회에 고무된 사람들은 백일로 날짜를 넓혀 잡기도 하며, 이웃교회의 기도전략에 뒤질세라 교회마다 앞 다투어 천일기도회를 여는 웃지 못할 장면이 연출된다. 기도할 날짜를 잡아 기도하는 모습은 이전에 우리네 조상들은 백일기도나 천일기도를 소원성취의 수단으로 삼아왔기에 그리 낯선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무슨 전투형식의 기도 모양새를 취한다고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일상의 삶에서 끊임없이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하루 종일 기도의 삶을 사는 것이 성경적인 기도의 모습이지, 대대적으로 기도행사를 홍보하고, 기도를 마치 싸워 승리해야 하는 전쟁처럼 전투적으로 보이는 것은 교회가 내건 기도회가 알맹이가 빠진 행사임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우리 주변에는 기도를 한다는 사람들에게 기도부탁을 하는 모습을 어려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형교회에서는 예배를 마친 다음에 담임목사의 안수기도를 받으려고 길을 줄게 늘어선 모습을 보는 게 낯선 풍경이 아니다. 물론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기도를 받는 모습은 성경에서도 나타난다. 그렇지만 기도를 받으려는 사람의 믿음이 전제되지 않은 안수기도는 효험이 없다. 하나님은 기도행위보다는 내면에 잠재된 믿음이나 성품을 날카롭게 살펴보는 분이시다. 본인이 직접 믿음을 키우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응답을 받으려는 행위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다. 자신도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을 쌓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거나 직접 기도를 받는 것은 믿음의 행위로 인정받을 것이지만 말이다. 어째든 기도응답을 받는 요건은 기도의 형식에 있지 않다. 간절한 마음이 동원된 끊임없는 기도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더불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무단히 애써야 한다. 그런 전제가 없이 단지 희생적인 기도행위만 쫒는다면 허망한 결과를 받아들 것이 뻔하다.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하나님이 감동하신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은 경건한 신앙인들에게 요구되는 관례처럼 보인다. 성경에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예배 중에 경건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숙연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양반다리를 하거나 다리를 펴고 기도하는 것이 불경건한 태도라고 언짢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 기도를 해본사람이라면 이 같은 말투가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청중 앞에서 5분 내외 대표기도하는 이들이라면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1시간 이상 기도해야 한다면 이 같은 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피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기도회에 나오려면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고 나와야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평상복을 입고 흙이 묻은 운동화를 신고나오면 되겠냐고 반문했다고 한 경우와 비슷하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처럼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다. 내면의 속내와 동기를 보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태도나 기도하는 자의 외모보다는 간절한 속내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정도를 보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아도 경건하게 기도할 것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단정한 복장으로 무릎을 꿇고 엄숙하게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 경거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항상 경건한 태도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한 마음이 없다면 혼자 있는 동안에는 원래의 불경건한 자신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의 속내를 잘 알고 계시다. 마음은 부패하고 믿음이 없는데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체 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면 가증한 태도를 책망할 것이다. 예수님 시절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광장에서 큰소리로 기도하기를 즐겼고, 옷 술에 크게 성경 구절을 수놓아 다니곤 했다. 예수님은 이들을 두고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분노하셨다.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러나 그런 자세를 하는 습관을 들였다면 관절염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다리의 자세나 기도자의 복장이 아니라 속내와 동기이다. 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채워져 있다면, 사람들이 보든 보지 않든 항상 경건한 태도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금식기도에 대한 불편한 진실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이 금식기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응답받아야하는 절박한 문제가 직면했다면 짐 싸들고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하면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금식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은 어떤가?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이사야 58장 3~6절의 성경구절을 다음과 같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 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 될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내용은 금식이라는 희생적인 기도의 행위보다는 평소에 가지고 있는 말과 행위가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네 교회에는 금식기도의 탁월한 효과(?)에 대한 간증이 넘쳐나고 있다. 금식기도는 음식을 단호하게 끊고 고통을 인내로서 견디며 온전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희생적인 기도의 방식이다. 그래서 성경의 위인들은 금식기도를 권면하고 있다. 자신들도 금식기도에 대한 응답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금식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금식기도에 대한 효과가 아니라 평소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데 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금식기도를 한다면 놀라운 결과를 목도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상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다가 문제가 생겨 금식기도를 꺼내든다면 아무런 효험이 없을 것이다. 금식기도는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기도의 행위이다.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견고한 믿음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욕망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 채, 이를 얻으려는 수단으로 금식기도의 방법을 차용하고 있는 이들이 주변에 너무도 많다.
영안의 눈을 뜨라
보통의 크리스천에게는 영안이라는 말이 어색하고 낯설기만 할 것이다. 영안(靈眼)이란 영적인 눈이란 한자어이다. 육체의 눈은 망막에 비친 세상을 보게 하지만 영안은 영적인 존재와 그 활동을 보게 한다. 기도란 영적인 존재의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므로 영적인 존재에 대한 시야를 가져야 한다. 영적인 존재는 하나님이외에도 사탄과 귀신들도 있다. 악한 영들의 존재와 그 공격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생명과 영혼을 지킬 수 있다. 결국 영안의 눈을 떠야 영적인 존재와 그 세계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영안의 눈을 뜬다는 것은 어떤 현상을 말하는 것일까?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기도목적은 단지 소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일 뿐 영안의 시야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렇지만 영안을 갖지 않는다면 소원하는 일들도 없다.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영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영안의 눈을 떠야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감을 깨닫고 그분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 영안의 눈을 뜨는 통로는 여러 가지이다. 가장 일반적인 통로는 기도와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머릿속으로 들어오던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와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확신을 갖게 되면 이성으로 알던 것이 감정과 합해져서 확신을 갖게 된다. 영안의 통로는 깨달음만이 아니다. 꿈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대체적으로 꿈은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악한 영이 주는 것 그리고 생리적으로 꾸는 꿈이다. 이 중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영적인 메시지가 있다. 그렇지만 이 역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인 분별력이 있어야 그 뜻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통로인 깨달음이나 꿈 이외에 특별 통로가 있다. 환상과 예언이다. 환상은 꿈과는 달리 깨어있는 동안에 보이는 현상이고, 예언은 영음으로 듣는 것을 말한다. 영적 능력에 관심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모두 경험해보고 싶어 하는 것들이다. 특히 화려한 은사중의 하나인 예언이 그렇다.
그러나 영음으로 듣는 현상은 악한 영이 틈을 타서 속이는 일도 빈번하고, 분별력이 없다면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오해하기 일쑤이다. 또한 예언은 우리네 교회에서 터부시하는 은사이기도해서 자칫 잘못하면 구설수에 오르고 상처를 받기 쉽다. 특히 세미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아 경험 많은 예언자에게 적지 않은 훈련을 받아야 정확한 영음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을만한 예언자조차 찾기 어려운 풍토에 탁월한 훈련까지 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우리가 마주한 척박한 현실이다. 이렇듯 영안의 눈을 뜬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누구나 영안의 눈을 떠야 한다. 그래야 영적인 세계를 깨닫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일꾼이 되는 자격을 얻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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