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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라는 말에 속고있는 거대한 미혹

Joyfule 2019. 11. 14. 09:52



 
     예배라는 말에 속고있는 거대한 미혹



우리네 교회에서 추구하는 핵심적인 신앙방식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질 것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교회에서 요구하는 각종 예배의식에 성실하게 참석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었다는 뿌듯함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 생산하고 유통하는 예배라는 단어에는 거대한 미혹이 숨어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하고 싶다.

 

1. 귀신들도 예배드린다?

 

예배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와 라트레이아라는 단어가 있다. ‘프로스퀴네오절하다, 경배하다, 예배하다는 단어로 번역되었고, ‘라트레이아라는 원래 제사라는 단어로서 예배라는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우리네 교회에서는 헬라어 원문의 단어와 상관없이 예배라고 부르기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기가 막히다. 그렇다면 귀신들도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말도 안 되는 말 같지만 그렇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5:68)

 

위의 구절은 수천마리의 귀신이 잠복한 거라사 광인에 대한 사건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호수를 건너서 배에서 내리자 멀리서 귀신들린 거라사 광인이 뛰어와서 절하고 자신을 괴롭게 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여기서 절하다라는 단어가 바로 프로스퀴네오이다. 그렇다고 귀신들이 예수님께 예배를 드렸다고 번역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절하다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사실은 원래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가 그런 뜻이라는 말이다.

 

2. 천사들도 예배를 드린다?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1:6,7)

 

위의 히브리서의 말씀에는 천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경배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경배하다라고 번역된 단어가 프로스퀴네오이다. 예배라는 단어로 번역하면 우리네 교회에서 유통하는 예배와 헷갈리기 쉬우니까, 차별화를 하기 위해 그렇게 번역했다. 그러나 사실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가 경배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프로스퀴네오는 상황에 맞게, 절하다 혹은 경배하다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예배라는 단어로 번역한다고 해서 우리네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의식이 될 수 있겠는가? 당신이 한글을 모르는 상태에서, 헬라어 원문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우리네 교회에서 사용하는 예배의 의미로 생각할 수 없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3. 종교적인 예배의식에 참석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위의 구절에서 언급한 예배는 앞의 프로스퀴네오가 아니라 제사라는 뜻의 라트레이아. 그러나 신약시대에서는 구약의 제사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예배라고 번역했다. 제사는 소나 양의 제물을 죽여서 드린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제사는 당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이 살아있는 거룩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일상의 삶에서는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다가, 주일예배가 각종 예배의식에 참석한다고 예배가 되겠는가? 이는 미혹의 영이 우리네 교회지도자와 교인들을 속이는 거대한 미혹이다.

 

아쉽게도 성경에는, 우리네 교회에서 요구하는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것만을 기뻐하신다고 하지 않았다. 성경은 희생적인 예배행사를 성실하게 드리기 이전에 예배의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으며, 각종 봉사나 전도행위도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를 내세운다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행위라고 못 박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드러나는 것이라 타인의 눈에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목회자가 희생적인 신앙행위이나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예배의식은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네 교회로 자리 잡은 신앙의 관습이다.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을 잡아 번제로 드리는 제사법으로 행하여졌지만, 신약시대에 들어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아 더 이상 짐승의 피를 요구하는 제사법이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제사법과 더불어 음식법, 안식일 준수의 의무처럼 행위나 의식으로 드려지는 종교행사는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토요일인 안식일이 아니라 그 다음날인 주일에, 짐승을 가지고 오는 희생행위대신 헌금으로 대신했고, 세례식이나 성찬식이 주요한 순서가 되었으며, 유대인의 명절에 행하던 찬송이나 기도가 예배의식의 순서로 들어갔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성경의 가르침의 중요성을 깨달은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의식의 중심에 설교를 집어넣었다. 그게 작금의 예배의식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행위는 무엇일까? 그것은 쉼 없는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깊게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건물에 계시지 않으시며, 그분은 영이시므로 우리의 영혼과 교제하기를 원하셔서 간절히 부르기만 하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 영성학교에서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의 습관을 열정적으로 코칭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간절히 부르며 전심으로 찾는 이들을 가장 기쁘게 여기신다. 그러나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은 교회 행사에 바빠 기도와 말씀을 읽는 일에 소홀히 하고 있다. 일주일에도 여러 번의 예배의식을 드리지만 정작 일상의 삶에서는 예배의 삶을 살지 못하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교회에서 정한 기도회에는 참여하지만 정작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교제의 기도에는 무지하다. 교회에 와서 여러 교육프로그램을 배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능력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게 아닌가? 그런데 제자가 되려면 기도와 말씀의 영적 습관을 들여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이루어야 하는데, 단지 교회의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하느라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단지 교회의 목회자들의 지시나 권유에 따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은 목회자가 결정해주는 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예배행사에 참여하느라 바쁘고 교회 일에 치어 정작 기도와 말씀에 소홀히 하고 있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없다. 신앙을 갖는 목적은 천국의 자격을 얻는 것이며, 목회자에게 칭찬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얻기 위해서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