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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구원을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Joyfule 2019. 11. 12. 04:37



 
    당신의 구원을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돈스코이호는 러일전쟁 당시 울릉도 앞바다에 침몰한 러시아의 1급 철갑순양함의 이름이다. 침몰 당시 배 안에 수많은 금화와 금괴가 있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굴 사업이 추진되어 왔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1916년 일본이 최초로 인양 사업을 시도한 이래 도진실업, 동아건설 등도 참여했고, 20187월 신일그룹이 인양 계획을 발표하면서 다시 화제가 되었다. '돈스코이호'라는 명칭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드미트리 돈스코이 대공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18838월 진수되어 1895년 개조되었고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에 참전했다. 19055월 울릉도 앞바다 70km에서 포위되었는데, 일본에게 배를 넘겨줄 수 없다고 판단한 함장은 배수판을 열어 고의로 배를 침몰시켰고 생존자들은 울릉도에 상륙해 일본군에게 항복했다. 러시아 함대는 금화와 금괴, 골동품을 배에 싣고 다니며 전 세계에서 보급을 받았고 장병들의 임금도 금화로 지불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인양 사업을 추진해온 사람들은 배 안에 지금의 가치로 150조원으로 추정되는 금화와 금괴가 남아있을 것이라 주장해왔다. 20187월 신일그룹이 돈스코이호의 인양 사업을 추진하면서 침몰 위치를 확인하고 탐사가 마무리 되는대로 소유권 등기와 본체 인양을 진행하겠다고 밝혔으나, 해양수산부에 제출한 매장물 발굴승인 신청은 서류미비로 접수가 거부되었고, 신일그룹에서 근거로 제시한 1932년의 뉴욕타임스 기사는 왜곡 보도된 것으로 밝혀졌다. 막대한 재산을 투자한 투자자들은 그들의 말에 속아 재산을 탈탈 털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지 못하면 희대의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교회 내에도 있다. 이른바 1992년에 발생한 다미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 사건이다.

 

다미선교회 시한부종말론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이장림목사 등이, 19921028일에 세계가 종말하면서 휴거, 즉 예수가 세상에 왔을 때 신도들이 하늘로 들림 받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종말론을 주장하여 기독교계에 파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그러나 막상 1028일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휴거를 신봉하던 사람들은 저마다 1028일이라는 글자의 구름환상을 보았다고 했다. 어떤 이는 나팔소리를 들었다고도 했다. 그들은 매일처럼 모여서 밤새도록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면서 휴거를 준비했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남편도, 가정도, 직장도 미련 없이 버렸다. 마침내 1028, 휴거를 확신하던 그들은 집회 장소에 들어가면서 밖에서 구경하는 무리들에게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서 만납니다.”하고 인사하며 들어갔다. 그러나 1028일 자정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패닉에 빠졌고, 그 후에 오랫동안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삶을 이어가야 했다.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사기꾼이라고 나팔을 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당신에게 묻겠다. 당신도 천국에 들어가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고 있는 지 말이다.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에서는 돈스코이호 사기사건이나 다미선교회의 휴거해프닝 같이, 이 땅에서 증명되어야 하는 얘기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도 자신의 믿음이나 구원, 그리고 성령의 내주를 증명할 생각도 없으며, 증명할 시도조차 없다. 그들은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자기 확신으로 덮어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증명하지 못한다면, 심판대에 서야만 알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때에 자신이 확신하는 믿음이 가짜라고 밝혀진다면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대로 지옥에 던져지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들이 이 땅에서 증명할 수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의 우리네 교인들이다. 그래서 오늘은 이 땅에서 증명하지 못하는, 기이하고 위험천만한 믿음에 대해서 찬찬히 살펴보고 싶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위의 구절은 너무도 유명해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의 사랑을 증명하셨다는 것이다. ‘확증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시니스테신이라는 단어로서 ‘demonstrate’의 의미로서 증명(prove)하다고 번역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말로서 그치신 것이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자의 끔찍한 처형장에 등을 떠밀어 넣은 것으로 증명하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53:5~7)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아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끔찍하게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위의 이사야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묵묵히 형벌을 달게 받음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셨다. 그렇다면 성부하나님과 예수님만 증명하셨는가? 사도들과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15:18,19)

 

위의 구절은 사도바울의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종이 된 사도바울은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의식을 거행하고 신앙행위를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사도가 된 것은,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널리 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말하자면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성령의 능력이 놀라운 기적과 이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증명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증명해보였다. 사도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야곱과 요셉, 다윗, 사무엘, 다니엘은 물론,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들과, 스데반이나 빌립집사와 같은 초대교회의 제자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기적과 이적으로 증명해보였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는 믿음, 구원, 성령의 내주와 같은 신앙의 핵심요소들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냥 믿으라고 다그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성경지식을 머리에 쌓아두거나,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교단교리를 아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는 예배의식에 참석하고 교회에서 요구하는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면서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의 소유자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성경에 기록된 증거를 드러내 보임으로 자신의 믿음이나 구원을 증명하지 못한다. 기이한 일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요구하는 증명에 대해 살펴보고 싶다.

 

1. 믿음의 증명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20)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16:17,18)

 

우리네 교회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신앙고백을 하는 기도행위에 동의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이 있다고 선포하며, 주일성수와 교회에서 요구하는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세상에서 잘되고 형통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믿음이 있음을 증명하느냐고 질문하면, 자신이 교회를 성실하게 다니고 십일조를 드리며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성경에서 요구하는 증명이 아니다. 믿음의 재판관은 자신이나 교회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기적과 이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기적이 일어나며, 믿음의 표적이 바로 귀신을 쫓아내며 고질병을 치유하는 기적으로 증명해보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는 이런 핑계, 저런 이유를 대면서, 그런 기적이 없어도 믿음이 있다고 구차한 변명을 일삼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증명해보이지 못하는 허접쓰레기와 같은 믿음을, 썩은 동아줄로 붙들고 있으니 기가 막히다.

 

2. 구원의 증명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5~8)

 

구원을 받는 것은 모든 크리스천들의 지상목표이자 소원하는 바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교회마당을 밟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교회의 예배의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죄다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성경에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말과 행위, 생각과 성품을 말한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들이 만든 종교적인 예배의식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고 하신 적이 없다. 평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예배의식에 참석하면 모를까, 평소에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자들이 교회의 예배의식에 참석한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거대한 착각일 뿐이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육체의 사람에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콕 집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성령의 사람은 바람처럼 자의적인 생각과 계획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바람처럼 산다고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5)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위의 구절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밧모섬의 요한사도에게 나타나셔서 초대교회에게 경고하신 내용의 일부이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초대교회 교인들의 상당수는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을 잃어버렸으며, 죄와 싸우고 죄를 부추기는 악한 영과 싸워서 이기는 자들만이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네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당신은 날마다 죄와 싸우고 죄를 부추기는 악한 영과 피터지게 싸워서 승리하고 계신가? 솔직히 말해서, 우리네 교회는 죄에 대한 가르침이 거의 없으며, 귀신들의 얘기도차 하지 못하게 입을 틀어막고 있다. 그러면서 어떻게 거룩한 교회에 귀신들이 범접하며, 빛인 하나님의 자녀에게 귀신들이 어떻게 들어오느냐는 선문답 같은 얘기만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속내는 귀신들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부추기는 귀신들과 싸워 승리하고, 날마다 죄를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씻어 정결함을 입지 않는 사람들은 죄다 지옥행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것을 삶의 현장에서 증명하고 계신가? 아니라면 당신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3. 성령 내주의 증명

 

우리네 교회는 영접기도를 마치면 성령이 자동적으로 들어오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이 누구신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성령이 자신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과 진배없이 건조하고 냉랭한 영혼으로 고단하고 팍팍하게 살아가는 게 기이하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는 여기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면 믿음이 없다는 돌 직구가 되돌아오기 일쑤이다.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지옥으로 던져지는 영혼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지금까지 영접기도를 하고 나서 주일성수와 각종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면서 구원 얻는 믿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는데, 새삼스럽게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고 말을 뒤집으면, 지금까지 교회에서 가르친 구원론과 성령론이 자기 발등을 찍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자 성령이 계신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자신과 하나가 되었다면, 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이 내려올 것을 약속하고 계시다. 그래서 당신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이 내려오고 소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졌는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고, 없다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 교회에서는 영접기도를 하면 성령이 자동적으로 들어오신다고 가르치지만,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경험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이렇게 기도응답으로 자신 안에 성령이 내주를 증명해보이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거나 성령이 없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면 죄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묵묵부답이다. 겨우 대답한다는 게, “쉰목사, 당신은 그래?”하면서 날선 말대꾸를 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1~7)

 

성경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믿는 당신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평안하고 기쁜 영혼으로 즐겁고 형통한 삶을 누리고 계신가? 구체적으로 영혼과 마음이 평안과 기쁨과 자유함으로 넘쳐나고, 정신질환과 고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아 건강을 되찾으며, 불화하던 가족들과 화목하게 되어 가정이 회복되었으며 모두 구원을 얻는 길에 동참하고 있으며, 빚과 극심한 가난의 늪에서 벗어나와 재정적인 자유를 얻고 계시며, 하는 일마다 크고 작은 열매가 풍성하게 맺고 있으며, 귀신을 쫓아내며 귀신들이 일으킨 고질병을 치유하며 영혼구원 사역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가?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됨으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던 하나님과 원수 된 삶에서 돌이켜서, 자신의 쳐서 복종시켜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며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당신은 이런 모습으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가?

 

당신의 신앙의 모습이나 증거가 위에 언급한 성경말씀으로 증명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믿음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성령과 동행하는 성령의 사람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은 가짜이다. 그러나 여전히 성경에서 요구하는 증명을 회피하면서, 교단에서 숭배하는 교단신학자의 교리와 자의적인 성경해석으로 아전인수식으로 가르치는 담임목사 뒤에 숨어서 무능하고 무기력한 자신을 덮어둔다면,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운명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야한다고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멸시한 형벌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