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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총통의 부인 송미령

Joyfule 2006. 7. 7. 00:40

장개석 총통의 부인 송미령(쑹메이링)의

파란만장한 106년의 인생역정.....

역사속으로 사라진 송가황조(宋家皇朝)의 세자매

 

나에게는 세 딸이 있다.

하나는 돈을 사랑했고

또 하나는 권력을 사랑했으며

다른 하나는 조국인 중국을 사랑했다.

 

我有三個姉妹, 一愛錢 ,一愛權, 一愛國

1997년작
영화 송가황조(宋家皇朝)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된다.

화교 출신의 저장(浙江)성 재벌로서

쑨원(孫文)의 혁명자금을 담당한 쑹루야오(宋如耀)의 세딸 중

을 사랑한 첫째 아이링(藹齡)은 금융재벌인 쿵샹시(孔祥熙)와 결혼....

 

중국을 사랑한 둘째 칭링(慶齡)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27살이나 나이가 차이있는 중국 혁명의 아버지인 쑨원(孫文)과 결혼....

 

권력을 사랑한 막내 메이링(美齡)은 국민당 총통 장제스(蔣介石)와 결혼....


중국의 잔다르크로 불리던 둘째 쑹칭링이 1981년 5월 29일 베이징에서 사망하고 

2003년 10월 24일 막내 쑹메이링이 미국 맨하탄에서 숨짐에 따라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와 함께 했던 "송가황조의 세 자매"는 이제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특히 3세기에 걸쳐 신해혁명과 청나라의 멸망, 국공합작, 항일운동,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국공내전, 중국과 대만의 분단, 중국과 대만의

현대화 과정 등을 모두 지켜본 쑹메이링은 그야말로 중국근현대사의 산 증인이었다.

쑹메이링은 1897년 3월 23일 하이난(海南)에서 태어나 선진문명에 일찍 눈 뜬

아버지의 지원으로 1910년 열세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쑹메이링은 서구화된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고

1917년 우수한 성적으로 웨슬리대(문학박사)를 졸업한다.

그녀는 스스로 내 몸과 정신에서 유일하게 동양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얼굴뿐이다

말할 정도로 언어에서부터 사유방식까지 완전 서구화된 문화를 체득하고

1917년 중국으로 귀국한다.

귀국 후 기독교 활동 등 각종 사회활동을 하던 쑹메이링은 1920년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이던 장제스(蔣介石)를 만나게 된다.

뛰어난 미모와 탁월한 재능과 야심을 가진 쑹메이링과 비록 아이 셋의 유부남이었지만

새로운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한 장제스의 만남은 11년의 나이 차이

주변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국 1927년 12월 1일 결혼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 구두에 서태후왕관의 진주알을 장식하여 오래도록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쑹메이링은 결혼 이후 장제스의 비서이자

외교고문으로, 자유분방한 미녀 로비스트로서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십분 발휘하게 된다.

특히 1936년 장제스가 장쉐량(張學良)에게 감금되는 시안(西安)사변 때는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저우언라이(周恩來)와의 담판을 통해 남편을 구해낸다.

그러나 항일보다는 공산당 토벌에만 몰두하는 장제스의 정치적 실책은

그녀 또한 바로잡지 못했다.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점점 불리해지자 쑹메이링은

1943년 2월 미국 의회를 방문하여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국민당에 대한 미국의

지원과 원조를 호소했으며 1943년 카이로 회담에도 장제스의 통역으로 참가하였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이 대만에 정권을 세운 이후 쑹메이링은

퍼스트 레이디로 활약한다. 둘째 언니인 쑹칭링과 70년대 전후에는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자매대결을 벌여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1975년 4월 5일 남편 장제스가 사망하자 쑹메이링은 그 해 9월 대만을 떠나

미국 뉴욕에 정착하게 된다. 미국생활 초기 그녀는 대만과 미국과의 유대강화에

힘쓰면서도 대만의 정치문제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1986년 장제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대만을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1991년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그림 수집 등으로 소일하며 조용하게 지내왔다.

슬하에 자녀가 없는 쑹메이링은 외조카 쿵링이(孔令儀 큰언니 쑹아이링의 맏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왔으며 최근 몇 년간은 암 등으로 투병생활을 했다.

맨하탄 자택에서 임종을 지켜본 가족들은 그녀가 마치 깊은 잠을 자듯 너무도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고 전했다.

쑹메이링은 유언에 따라 대만에 있는 남편 장제스와 합장되지 않고

뉴욕근교의 실내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중국의 전국정치협의회 지아칭린(賈慶林)주석은 유족들에게 보낸 애도문에서

쑹메이링 여사는 중국근현대사에 큰 업적과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서 그녀는

일찍이 중국 인민의 항일운동을 지지했으며 중국의 분열에 반대하고 중국과

대만의 통일을 염원하고 중화민족의 번영을 위해 분투 노력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쑹메이링의 죽음을 놓고 대만과 중국에서 들려오는 애도와 추모의 목소리는

 분명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쑹메이링의 언니 쑹칭링이 중국대륙에서 국모로 추앙되며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것처럼 쏭메이링도 대만에서 그 같은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 앞으로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