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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유하는 제자훈련

Joyfule 2006. 8. 8. 00:31

죽음에 이르는 병을 치유하는 제자훈련

 

 당신이  탈진할 때(눅8:22-25) 

지난해 12월 6일 오후 4시 15분 남극 세종기지 대원 악천후로 폭풍우로 조난을 당한 대원들이 52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추위와 폭풍에 탈진한 몸을 극복하기 위하여 눈(雪)물을 녹여 먹었고 초코렛을 먹으면서 견디었습니다. 무전기 바테리가 나감으로 외부와 통신이 두절된 것이 더욱 큰 공포였으며 졸음과 싸워 52시간을 버티고 71Km/h 불리자드란 폭풍 눈보라 속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이때 대원들이 기자의 소감을 묻는 질문에 공포의 시간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탈진이요 둘째는 통신두절이요 셋째는 졸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제자가의 영적인 삶도 탈진하면 위험합니다. 하나님과 통신이 두절이 되면 안 됩니다. 영적인 교신이 끊어지면 위험합니다. 정신을 잃고 졸면 큰 낭패를 당합니다.

오늘의 목회의 현장은 남극의 악천후의 폭풍우처럼 몰아닥치는 환란과 시련앞에서 영육이 탈진하고 주님과 교통이 끊긴 채 영적으로 졸고 있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농어촌 미자립 교회에서 몇 명 안되는 성도들과 휴가 한 번 못가면서도 감당해야 할 재정적인 부담과 과로로 기진맥진한 목회자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이때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회복케 하시는 주님께 SOS을 보내 구원을 요청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 22절, 23절의 말씀은 "눅 8: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시자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라사 지방으로 향하여 항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행선할 때 예수님은 잠을 주무시고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명을 위하여 떠난 배, 주님이 배안에 계신 상황 하에서도 광풍이 몰아칩니다. 물이 배 위로 넘실거립니다. 배가 파선 위기에 처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목회자들이 주님이 머리시며 우리 안에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환난과 시련이 닥치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 노저어 갈 힘이 없고 탈진하여 스스로 기가 죽어 의욕을 상실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24절에 말씀에서 "눅 8: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 지더라"

제자들은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죽을 지경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비젼을 향하여 나아가는 뱃길에 주님과 함께 하는 목회의 현장에 끊임없이 풍랑이 일고 비바람이 몰아닥칩니다. 이때 우리는 제자들처럼 닥치는 물결을 보면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이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하고 의욕을 상실한 채 탈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당한 폭풍 속에서 고요히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잔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한 말씀하십니다.“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는 것 같아도 광풍을 만나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하게 되면 염려와 근심으로 수심이 그득하게 된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첫째는 주님의 하신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호수 전편으로 가자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바울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서도 로마에 복음을 전할 사명을 다하기 전에 광풍으로 여기서 죽을 수 없다는 확신과 믿음입니다. 거라사 지방의 사역을 위하여 가는 도중에 사단의 방해와 궤계를 보았어야 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은 기필코 주님이 이루십니다.

둘째는 광풍 속에서 주무시는 주님의 안식과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광풍 속에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이 평안과 안식을 회복하면 모든 광풍의 두려움과 근심은 안개처럼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의 현장에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특히 오늘의 목회의 상황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필자도 얼마 전 의욕이 없고 기진맥진 한 상태에서 주님의 평안을  회복하였습니다. 믿음의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앙망하면 피곤한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주님께서 독수리의 날개 치듯 새힘을 공급해 주심을 체험했습니다.

셋째는 바람과 풍랑을 꾸짖으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섭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풍랑아 바람아 잠잠하라” 주님의 말씀의 권세는 우리 심령가운데 일어나는 풍랑을 잠재우실 것입니다.

지치고 탈진할 때 광풍 속에서 주무시는 주님의 평안과 안식을 회복해야 살수 있습니다. 남극 세종기지의 교훈처럼 영적으로 탈진하고 주님과 교통이 두절되고 잠들면 우리는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목회의 현장에는 타락한 천사들이 있고 거역의 폭풍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우리의 선장되신 주님께서“너희 믿음의 어디 있느냐?”주님이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제자들이 사역의 현장에서 거역의 풍랑이 바람이 일 수 있다는 것을 시청각적으로 교훈하신 귀한 진리인 것입니다. 이 경륜을 깨닫고 익히고 배우는 것이 제자훈련의 과정인 것입니다. 이 공과를 분명하게 체험하도록 하기 위하여 지도자가 풍랑안에서  안식의 누림을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하게 누리는 제자

 

주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주의 종들은 한 사람이 말씀에 길들여저서 모세처럼 온유한 인격으로 주님의 주권에 온전히 굴복하는 한 사람의  동역자를 소망할 것입니다. 주님도 12제자를 3년 동안 훈련하시면서 핵심 그릅을 통하여 활력그룹으로 사용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주님의 그림자처럼 늘 사역에 동참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초대교회의 중추적인 사역을 감당했던 것을 보면 주님의 핵심 그룹을 향한 시간의 안배는 그대로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제자훈련을 받는다, 제자가 되었다는 표징은 본래적인 자아가 부서져야 하며 깨어져야 하며 와장창 뭉개져서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성질이 살아있고 아직도 옛 성품이 남아 순종을 거스린다면 그사람은 주님으로부터 환경과 사람을 통하여 더 다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제자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제자훈련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내 자신을 체크해 보아도 아직도 주님의 흔적을 표현하기는 턱도 없는 함량미달인 자신을 보게 됩니다.  아직도 자신 안에 혼적인 주체가 마음과 생각을 지배할 때가 많음을 보게 됩니다. 육은 무익하며 사망인 데 비하여 영은 생명이요 평안인 것입니다.  육의 생각을 주님의 영안에 온전히 굴복하고 주님을 영안에서 누리고 주님을 따른 다는 것은  제자훈련의 중요한 초점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유는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게 되며 그 누림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푸른 초장으로 그리스도를 쉴 만한  물가로 누리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한 율법사가 나옵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을 찾아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하고 질문합니다. 다분히 이 사람은 자신의 혼적인 부분인 행위와 노력과 공로를 인하여 영생을 얻는 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율법에서 네가 배운 대로 말해보라"고 했을 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몸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사가 가진 교리였으며 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었습니다.  주님은 율법사의 대답을 옳다고 인정하면서 이를 실행하라 그러면 영생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율법사는 교리와 율법의 감옥에 거하고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거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의로 영생을 얻게된다고 알고 있으며  이웃을 자신의 의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행위로 사랑하려했다는 것입니다. 이 결과 모든 일의 결과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사의 "내 이웃이 누구 오니까?"의 질문을 보면 그는 그 율법의 정신도 몰랐으며 그 율법을 따라 살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네가 아는 그 법대로 그대로 행하면 생명을 얻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그 율법사는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거나 가난한 주린 심령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에 거기에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고 주인에게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이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주님의 자화상입니다. 강도는 율법사를 가리키고 강도 만난 사람은 율법사에게 율법으로 난도질을 당한 아무도 손쓸 수없는 뭉개져 버린 상한 영혼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아래 절대적인 도움이 요청되며 거반 죽게 되어 주님의 십자가만이 구제할 수 있는 불쌍한 존재를 말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될 조건은 오직 은혜만을 기다리고 있는 불쌍한 영혼입니다. 주님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들이 주님을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삼는 사역을 시행하는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가는 제자로서 늘 주님께 주님은 저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주님의 신들 매도 감당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율법사처럼 뭔가 주님께 보여드리고 깊고 무엇인가 행함으로 주님의 일들을 폼 나게 하려는 어리석음을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 사건과 연결하여 또다른 주님을 갈망하는  참 제자의 조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길 가실 때 한 촌에 들어가시자 마르다가 주님을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에게 동생 마리아가 있었는데 주님의 발앞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여 은근히 마리아가 원망스럽고 얄미워졌습니다. 이 바쁜 언니를 돕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는 동생을 일하도록 야단쳐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누구는 그러줄 몰라서 부엌에서 이런 일을 하는 줄 아는가? 하는 투정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르다는 혼적인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상하고 감정이 뒤틀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자신의 의로 힘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다가 스스로 시험에 들고 실족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무엇이 중요한 가를 모르는  봉사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교회가 일꾼이 부족하여 이것 저것 일을 맡아 일하다 보면 일에 치어서 기쁨고도 사라지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으로 스스로 속상해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관점은 분명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였습니다. 영적인 우선순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한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십자가  밑에 항복하고 주님의 생명의 말씀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르다야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삶을 단순화 할 줄 모르는 사람  늘  분주하게 이것 저것 허둥대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만 경우인 것입니다. 주님은 한가지만이라도 충실히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 저것 개입하다가 한 가지도  책임지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귀한 시간에 육에 식물보다 영적인 양식을 취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철저하게 손들과 십자가 밑에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갈망하는 자화상입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로 자신의 노력으로 주님을 영접하려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마리아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자의 축복입니다. 자신의 자아와 정과 욕이 철저하게 깨어지고 부서지고 뭉개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떡으로 우리에게 먹이시는 주님을 생명으로 먹어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을 갈망하는 강도 만난 사람과 마리아와 같은 부서진 영혼에게 주님은 의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입은 사람은 주님을 위하여 받은 은혜를 봉사와 헌신으로 주께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사와 마르다처럼 자신의 의를 내세워 행함을 가지고 주님의 생명을 만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입장처럼 주님의 긍휼과 손길이 없었다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 주님의 은혜를 덧입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주막의 주인에게도 익명의 선한 이웃에게 일평생 감사하면서 사랑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갔을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처럼 모든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은혜로 소화했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일평생 불평하면서 자신이 일을 하면 할 수록 더욱 그 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면서 살게 될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르다도 모든 관념과 자신의 가치관을 내려놓고 주님의 마인드와 동일하게 훈련되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제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이미 주님의 생명을 접촉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거룩한 일에 쓰임받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의 목표는  우리의 모든 천연적인 본성이 십자가에 완전히 용해되고 분해되어 거듭나고 새롭게 되어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주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에 초점은 주님의 긍휼을 더욱 갈망하는 사람 주님의 거룩한 갈망을 추구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제자가 되는 좋은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골1:15-29) 

일반적으로 "제자훈련" 하면  일정한 기간에 정한 교재를 이수하면 수료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과정 안에서 목표한 수준의 일꾼으로 세움 받기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성원들이 변화가 더딘 경우라든가 혹은 지도자가 그리스도를 삶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교리적이고 이론적인 양육과정을 통해서는 머리에는 아는 것은 많은데 가슴은 냉랭하여 거듭나지 못한 경우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교만하여 주님의 온전한 인격으로 성장하는데 장해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제자훈련을  실행할 때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임하여야 하는가 우리가 훈련하는 제자의 수준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질문들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골1:15-29절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양은 희생의 본을 통하여 성장합니다. 

우리 주님은 생명을 내어 주시기까지 자신을 양들을 위하여 내어 놓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분여하신 주님의 본은  십자가를 통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합니다. 양들을 위한 모든 약한 짐을 대신 지고 주님의 거처로 조성되기 위하여 주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따라가는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양들을 위한 그 감당해야 할 내 멍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를 묵상하여 보아야 합니다. 희생이 없는 사람은 관념이요 교리인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눈물과 땀과 희생의 본을 보이면 그것을 자양분으로 양들은 내적으로 살찌워 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게 해야 합니다.

훈련이 비 본질적인 면을 강조하다보니 허공을 치고 그것 때문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경우를 봅니다. 제자훈련 과정에 많은 주제가 있습니다. 기도, 예배, 교회, 직분, 삼당, 내적 치유,... 등등 그러나 먼저 다루어야 할 과목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취였던 것인데 이제 성도들에게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을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광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인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고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바울이 가르쳐 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부활의 영으로 살리는 영으로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의 거듭난 영안에 거처를 삼아 함께 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접촉하고 누리도록 하는 과업이 선행되어야 양들이 자라난다는 말입니다. 만유를 포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고 그분이 내 인생의 주인이요 왕으로 그 능력을 행사하도록 인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교회의 머리요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난 자요 이는 친히 만물의 의뜸이 되려하심이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십자가로 화평을 이루신 그분으로 더불어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신과 화평하고 이웃과 화평하고서야 주님의 제자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안에 영광의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해답니다. 그리스도만이 제자훈련의 핵심이요 교재입니다.

셋째로 입체적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먼저는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다음은 각사람을 권하며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전파, 권면, 가르침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루는 훈련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각 사람은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훈련되는 것입니다. 완전은 절대적인 완전히 아니라 상대적인 실수와 약함이 있은 완전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제자로 성장한다는 말입니다.

네째는 주의 능령으로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자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는 바울의 고백은 내힘으로 내 지혜로 내 의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오직 주의 능력으로 이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내안에 거처하시는 부활의 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주도적인 역사와 그 능력을 힘입어 한 영혼 한 영혼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나가는 사역을 제자훈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영혼을 양육하게 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자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의 영이 모든 사역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