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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의 자기관리 - Ⅰ. 성적 타락

Joyfule 2006. 6. 25. 01:38

지도자들의 자기관리 - 이동원 목사 '스캔들'이란 대신하여 즐기는 악(惡)이다(Scandal:Vicc enjoycd vicariously)라고 말한 것은 엘버트 후버드(Elb-crt Hubbard )였다. 최근 누군가에게서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한국 정객들의 부끄러운 스캔들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너무 재미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분명히 스캔들은 대리 만족의 쾌락을 제공한다. 그러나 성경은'두려워 함'으로 스캔들을 다루라고 충고하고있지 않은가.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 워하라"(갈6:1)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 주변의 어떤 지도자들, 그들의 타락은 우리의 타락의 가능성이며, 그들의 회복은 같은 예수 공동체인 우리들 교회의 유익이요 축복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숙제를 그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들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스캔들의 소문과 소문사이에서 살고 있다. 과연 이래가지고 한국교회의 내일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비관적인 절망감마저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오늘의 한국 권력사회의 마당에서 전개되는 재산공개를 둘러싼 스캔들의 메스를 가지고 오늘의 한국교회를 해부한다면 과연 우리가 설 자리가 있을까?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가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해 던진 다음과 같은 충격적 물음은 과연 한국교회와 무관할 것인가? "지나간 19세기 동안 교회는 세상을 향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오늘2()세기의 황혼에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참된 복음을 지닌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않은가.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과연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을 것인가? (Wiersbe, 17)" 그럼에도 우리는 비관주의자(pessimist)가 아닌 현실주의자(realist)의 안목으로 이 주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비관주의자에게는 비관이 있을 뿐 비전을 제공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우리의 썩어가는 현실을 숨기는 작업(a cover-up)이 아닌 파헤치는 용기로 대면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주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가슴으로 우리의 타락해가는 동료 지도자들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사역의 장에 서도록 회복을 도와야 한다. 우리는 이런 현실주의자의 용기와 사랑으로 성경의 귀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지나간 타락의 현실이 오늘 우리의 예방의 현실, 그리고 치유의 현실로 적용되어야만 하겠기에 말이다. Ⅰ. 성적 타락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의 가장 큰 스캔들은 말할 것도 없이 성적 타락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지도자도 인간인 이상 모든 인간이 지니는 생리적 성의 욕구에서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영역에서의 타락 보다도 이 영역에서의 지도자의 타락은 더욱 감각적 센세이션(sensation)의 스캔들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누군가가 "최선의 선물은 최악의 오용의 가능성을 지닌다"고 지적한 것은 매우 타당한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한 최선의 선물인 그의 아내 이브를 그 앞에 이끌어 오셨을 때,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놀라운 시어로 그의 감격을 표현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부부사랑의 최선의 관계가 파괴된 음행의 범죄를, 성경은 특별한 범죄로 취급한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 6:19)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의 도구인 가정을 세우지만, 오용된 성은 가정과 인생을 철저히 파괴한다. 삼손 세익스피어의 명작 햄릿(Hamlet)에서 주인공은 참된 지도자를 갈망하면서 "정욕의 노예가 아닌 사람을 내게 달라 (Give me that man who is not passion's slave)"고 소리친다. 불행하게도 삼손은 정욕의 노예였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비할 데 없이 강한 사람이었으나, 도덕적으로는 비할 데 없이 약한 사람이 었다. 그는 구국의 영웅이었으나 동시에 민족의 수치였다. 그의 시작은 얼마나 화려했는가. 그는 어미의 태에서부터 주께 바쳐진 나실인이었다. 그러나 이 나실인의 서약은 그의 아킬레스의 건을 관리하지 못함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은 곡마단의 구경거리 처럼 인생의 조롱거리 가 되지 않았던가. 삼손의 생애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다음과 같은 성경귀절에서 발견된다-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삿 16:2()). 이런 비극의 조짐은 그의 생애 도처에 있었다(참고 : 삿 14:3, 16:1, 16:4 이하). 그는 서서히 무너져 간 것이다. 이 비극의 이름은 성적정욕을 통제하지 못한 자기관리의 실패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비극은 민족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유혹은 사적인 것이지만, 죄의 결과는 언제나 개인을 넘어선다 (Charles Stanley, 146). 다윗 스펄전의 지적처럼 다윗의 생의 처음 절반은 음악과 춤으로 상징되나, 그의 나머지 절반의 상징은 통곡과 좌절이었다(Kinneth prior, 52). 무엇이 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무너지게 하였는가, 정욕의 범죄 때문이었다. 열왕기상의 저자인 한 역사가는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을 가리켜 한 결정적인 오점이 라고 기록한다. "이는 다윗이 헷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더라"(왕상 15:5). 이 비극의 발단을 살펴보자. 다윗왕은 자기의 참모를 전선에 보내고 무료한 낮잠을 잔 뒤늦게 일어난다 (삼하 11:1∼2), 우리는 그의 시에스터-낮잠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저녁 늦게까지 게으름을 핀 그의 낮잠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무장해제를 한 나태한 왕의 눈동자에 비친 목욕하는 여인은 그의 정욕의 제물로써 기막힌 유혹일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청교도들은 "게으름은 사단의 공작실"이라고 믿었다. 통제되지 않은 일상생활의 느슨함은 다윗의 결정적 실패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나 뼈아픈 대가를 지불해야 했었는가. 그는 회개했지만, 존경받는 지도자의 왕좌는 끝 내 회복되지 못했다. 언제든지 회개할 수 있다는 은혜의 신학이 지도자의 실패의 구실이어서는 안된다 는 처절한 표본을 다윗은 남긴 것이다. 솔로몬 3000개의 잠언과 1005편의 노래를 작곡한 솔로몬은 진정 지혜의 왕이었다(왕상4:32). 그리고 그것은 그의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다른 무엇보다 지혜를 구한 응답의 삶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평생의 숙원이었던 성전을 지어 주께 봉헌하였으며 그의 명성은 당대의 세계에서 회자하였다. 그의 사람됨, 그의 통치, 그의 권세, 그의 지혜는 먼 나라 미모의 여왕 시바(sheba)를 그의 보좌에로 달려 나오게 할 만큼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다윗처럼 그의 생애의 말년은 얼마나 우리 모두를 슬프게 울리는가. 그의 삶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좋은 시작이 좋은 마무리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엄숙한 예증이 되었다. 그의 우상숭배, 그의 맹목의 정치, 그의 방황은 마침내 나라를 두 동강이 나게하는 단절의 비극을 초래 하였다. 무엇 때문이었는가? 이 성에 대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비극 까닭이었다. 그 비극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구약 시대에 어느 정도다처의 풍습이 허용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은 여전히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신 17:17)라고 경고하였다. 솔로몬은 이 말씀을 주의하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이 말씀의 경고대로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다"(왕상 11:4)고 성경은 말한다. 그리고 이런 무너짐은 그의 젊은 시절 때부터 계속되어 온 "많은 여인에 대한 정욕"(왕상 11 :1)을 통제하지 못한 마땅한 비극이었다. 흔들리던 다윗의 왕국, 찢기던 솔로몬의 왕국처럼 오늘의 교회도 지도자의 성적 욕구의 관리 실패로 흔들리고 찢기는 모습을 아프게 바라본다. 그러나 젊은 요셉이 보여준 순결한 모본은 얼마나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가. 요셉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육체의 쾌락보다 더 큰 삶의 동기였던 것이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그의 도망은 거룩에로의 아름다운 도망이었다. 그리고 그 뒤 견고한 가정을 세우고 그의 가정에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자녀들을 통하여 증거하였다(창41:51 ∼52). 성의 유혹에 대한 최선의 대비는 결국 가정에 대한 성실한 관리 곧 부부애의 관리, 그리고 유혹의 기회를 스스로 만들지 않는 철저한 자제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