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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감은(崔感恩) 공산당의 교회무력화에 저항

Joyfule 2009. 4. 5. 22:07

최감은(崔感恩) 공산당의 교회무력화에 저항

[1905-1950 장로교 목사 순교자 평안남도 대동군 출생]

1.신앙의 가정에서 출생,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목회사역에 뛰어듬.

최감은은 평안남도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대동군 고척면 신흥동 최씨 마을 대지주집 최윤택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 목사까지 3대째 신앙가정에서 부호집 맏손자요, 또한 장남으로 태어나 온통 동네 사랑을 다 받으면서 자라난 그는 1905년 8월 27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이 나라 비운의 때에 태어났다. 이 때문에 이후 그는 위대한 순교의 길을 걷게도 되었다.

아버지인 장로 최윤택은 슬하의 5형제 중에도 첫열매인 맏아들 감은이를 출13:2의 말씀을 좇아 주의 종으로 바치기로 결심하고 기도했다. 그러나 최장로의 아버지 즉 감은이의 조부는 달랐다. 장손인 만큼 대지주요, 부호로서 이 큰 재산을 물려주고 그로 가정과 재산을 관리하며 평안한 일생을 부귀로 누리게 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감은이도 조부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30세가 되도록 가정과 재산을 괸라하면서 지내던 그 어느날 '부자 이거 뭔가? 하루밥 세끼 먹기는 일반인데 이보다는 더 보람있는 인생을 살아야 되겠다'는 인생문제에 부딪치자 그는 곧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기 시작했고, 또 기도하며 결심을 굳히고 최 장로에게 뜻을 밝혔으니 아버지의 기도 소원이 이루어졌고 조부도 굳이 말리진 않았다.

감은이의 이 뜻을 품은 때는 입학만 하면 되었다. 일찍 신앙 가문에서 태어나서 신앙인격을 다져온 터였고 그가 아주 어린 때부터 가정예배는 의례껏 제가 주관하다시피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기가 바쁘게 책을 가져오고 식구를 불러 모으고 하는 성화에 부엌에서 일하는 안식구들이 뒷설겆이가 급했다. 그리고 어린 것이 새벽기도를 일년 12달 빠진 날이 없을 정도였다. 또 부잣집 아들로 숭실학교를 일찌기 졸업하였다. 게다가 여유있는 생활이고 보면 못할 이유도 없고 늦기는 했지만 그는 서둘러 평양장로회신학교에 곧 입학하여 1939년에 제34회로 졸업하고 그 해 안주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2. 가난한 시골교회에서 헌신일제에 저항하다 교회 폐쇄당함.

그가 신학 재학중에도 목회자로서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는 물론 식민지로서 압박 받은 조국의 비참함을 호소하는 기도를 쉬어본 날이 없었다. 그리고, 더욱 애처롭다가 못해서 불쌍히기조차 한 것은 함께 공부하는 동문들이었다. 지금껏 고생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그들이라서, 대개 기숙사 생활도 어려워 호구지책 때문에 거의 10년 가까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의외로 많았다. 여러 사람을 돕는 숨은 봉사자요 사랑의 사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 목사가 된 후에도 아주 가난한 시골 교회에서 사명을 받들리라고 생각했고, 또 실제로 여러 교회를 자비로 세워서 저들을 돕고 교회를 섬기면서 공부하였다. 이것은 타고난 사랑의 천성이기도 하지만 당시 학교의 교육방침도 그러했다. 봉사가 우선이고, 공부가 그 다음이었다. 그래서 학교의 교육방침도 그러했다. 봉사가 우선이고,공부가 그 다음이었다.

그래서 학생 거의가 다 교회를 섬겼다. 이는 마펫 교장의 말 그대로 "교회를 돌보는 여가에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라"고 늘 그렇게 가르치고 배웠다. 이런 정신으로 식송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신암교회도 그가 목사가 된 것을 기뻐서 조부가 자비로 세워 목회하도록 한 교회이기도 하다.

1943년을 넘자 일제의 패망은 짙어만 갔다. 소위 내선일체나,1억 황국시민 단결을 위한 총력을 기울임에 있어서 동방요배를 교회의식에 도입하는 작태를 보여 그가 시무하는 작은 시골에는 신사가 없음으로 참배는 하지 않도 되지만 예배는 안 드릴 수 없는데 이 예배에 앞서 먼저 동방요배를 하고 진행케 하는 방법을 엄명으로 하달하고 감시하였으니 안할 도리가 없었지만 끝내 거부하고 마침내는 최목사를 소환하고 교회를 폐쇄하기까지 하였다. 이러는 일도 더 이상 못하고 일제는 패망하고 조국은 감격적 8.15 의 해방을 맞기에 이르렀다.

3. 공산당의 교회무력화에 저항

최목사는 이젠 부푼 가슴에 목회의 영역을 넓혀가며 크게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는 부흥사경회도 여러곳 인도하며 평양 왕래도 자주 하면서 뜻이 같은 친구들과 교분을 두터이 하면서 소련군정하에 북조선 공산화를 강력히 투쟁하기 위하여 결국 신앙동지회를 결성키로 하고, 김윤찬, 이유택,김철훈,김길수와 함께 5인의 동지들이 의기투합했다. 1946년이 될 때 사인장교회가 목사없이 예배를 드린다는 소문을 듣고 신암교회를 다른 목사에게 맡기고 그 교회를 시무하기도 했다. 이러는 한편 일본에 유학하여 코오배 신학교를 졸업하기도 하였다.

1946년 봄이 되자 조만식 장로가 고려호텔에 연금되는 등 교회를 보는 저들 눈에는 살기를 띠었다. 제1차로 교회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북조선 총선거를 11월 3일 주일로 정한 것은 적어도 이런 목적이 있었다. 최목사는 5인의 신앙동지들과 목숨바쳐 끝까지 평양을 사수할 것, 주의 제단에 몸을 바치기로 결의하고 끝내 주일 선거에 불응하여 신절을 지켰다.

또 공산당은 기독교 세력을 규합하여 저희 휘하에 전국적 규모의 조직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이 일을 고덕재교회에서 목회하던 평범한 목사 강양육이 이를 맡았다. 그는 이 목적으로 수명의 목사를 초청했고 교회가 노동당과 연합해서 자유롭게 존속발전하려면 거국적 기구를 만들어야 겠다는 요지의 발언이 있자 기대만큼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은 평안도는 물론 황해도, 함경도로 뛰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각각 격파작전을 전개해 나갔고 압력에 못이겨 교회를 유지시켜 보려고 가입을 허락하는 이들도 있었다.

최 목사의 2년 선배인 홍기주 목사는 부수상의 자리까지 앉는가 하면 역시 신학교를 다니던 장로 박윤모 같은 이는 평양의 정치보위부장을 그리고 여러 목사들이 이를 허락하고 나선 이들이 많아졌다.

4. 6.25 발발후 공산군에게 피살.

이러는 동안에 친구인 김출훈 목사가 산정현교회로 이임하면서 큰 도시 교회인 동평양교회로 전임하여 목회를 하다가 여기서 흙이 있는 농촌 구동창교회로 돌아가 거기서 2년째 목회를 하던 6월! 그의 생의 마지막인 6.25을 만나게 된다.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최목사는 이에 대비하여 피신하는 교인들의 뒷바라지에 안간힘을 썼다. 생각다 못해 사택 창고 바닥에 은신처를 위해 지하실을 파고 거기 숨겨두고 음식의 공급,용변 심부름을 하는 문제는 심각했다. 그러나 며칠 후에 이는 발각되었고, 결국은 모두 잡혀갔고 책임은 목사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이리하여 수배인물이 되어 쫓기는 몸이 되었다. 외딴 산골 어느 집사댁 부엌 밑을 파고 지하실에 은거하기도 하고 어느 가난한 부엌 다락에 숨기도 했느데 여름 난리를 피하고 국군이 수복하는 때에 공산군에게 최 목사는 잡혔고, 북으로 도망하는 인민군의 총에 맞아 대동강 시체더미 속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어 순교의 영광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