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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 Part 1. 분석심리학자로의 성장

Joyfule 2015. 8. 13. 10:39

 

 

 

칼 융 Part 1. 분석심리학자로의 성장


3. 무의식의 발견과 프로이드

 

Charcot, Jean-Martin (1825~1893) 
현대 신경학에 대한 창시자 중 한 명이자 가장 위대한 프랑스 의학교수겸 의사 중 한 명. 1853년 파리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고 3년 뒤 중앙병원의 의사로 임명되었다. 1860년부터 93년까지 파리대학의 교수로 재임했으며, 그곳에서 살페트리에르 병원과의 오랜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병원에서 1882년에 그는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신경학클리닉을 개설했다. 유능한 선생으로서 그는 각국의 학생들의 존망을 받았다. 1885년에 그에게 배웠던 학생 중 한 명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였으며, 프로이트가 신경증의 심리적 근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바로 히스테리의 신체적 기원을 발견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샤르코가 최면술을 연구했던 것이었다.
저서로는 '신경계의 질환에 대한 강의 Lecons sur les maladies du systeme nerveux, 5 vol. (1872-83)', '살페트리에르에서의 화요일 강연 Lecons du mardi a la Salpetriere (1888)' 등이 있다. 

 

인간의 잠재의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19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의식영역에 영향을 끼치는 무의식 Unconscious이라는 영역에 대하여 많은 연구결과가 정립되었다. 예를 들어 파리 살페트리에르 정신병원Salp etriere 의 유명한 신경학자였던 샤르코 Jean-Martin Charcot(1825~1893)는 육체가 마비된 상태에서도 무의식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최면술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마음 , 혹은 정신적 에너지 mental, or psychical energy의 역학과 관련된 다양한 이론들의 공통된 의견은, 무의식이 의식의 정상적 기능을 방해하기 시작한 순간 무의식은 마음의 접근불가능한 영역에 갇혀 버렸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무의식에 대한 샤르코의 유물론적 접근은 1880년대의 또다른 신경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 psychoanalysis을 발전시켜 융이 그를 만나기 수년 전에 이미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주요한 통로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최면이라는 방법 대신 ‘ 자유연상기법 free association method ’ 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 환자는 침상에 편안하게 누워서 뭐든 떠오르는 것을 치료자에게 말하고, 치료자는 그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환자의 무의식을 탐구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통해 환자는 정신적 상처를 입었던 사건과 연관되어 잊혀졌던 기억들을 회상해내게 된다.

그러한 회상을 일컬어 소산 abreaction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 트라우마가 일단 회상되고 나면 그로 인해 생겨났던 신체적인 질환까지도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용어였다. 이와 비슷한 선상에서 망각, 말실수 등과 더불어 꿈에 등장하는 상징도 무의식으로 가는 지름길로 간주되었다.

 

이같이 무의식의 미스터리에 대해 非강신술적인 접근을 해보인 프로이트의 이론이 20세기 심리학에 커다란 충격을 주긴 했지만, 강신술은 여전히 심리학의 중요한 일부로서 19세기 말까지 계속해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임상 정신의학에 대하여 유물론적인 교육을 받은 융 자신도 늘 심령현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후에 보게 되듯이,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는 확신에 찬 유물론자인 프로이트와 갈등을 빚게 된다.


한편 샤르코의 제자였던 피에르 쟈네 Pierre Janet는 ‘ 다중인격 ’ , 즉 해리성 인격장애의 무의식 상태를 연구했다. 그는 환자 레오니를 밀접하게 연구하면서 그는 최면상태에서 치료자와 ‘ 잔여기억 residual memory ’ 의 표현이나 텔레파시라는 수단을 통하여 이야기하는 존재가 바로 무의식이었음을 밝혀냈다.


융의 사촌이자 영매였던 헬렌 역시 이벤느를 위시한 다른 인격들을 창조했었음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 융은 1902년 박사논문소재로 헬렌의 강령회를 채택했다. 이벤느로서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그녀의 정상적인 의식상태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융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에서 분리된 부분이 환각의 형태를 통해 다른 인격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강령술에서 그러듯이 의식적인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무의식은 의식적인 태도를보상compensate할 수 있다. 즉 무의식의 창조물에는 의도성과 목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적 에너지는 목적적인teleological 기능을 수행한다.


4.뷔르골츨리 병원과 환자 바베뜨


1900년 12월, 융은 취리히대학교의 부속병원인 뷔르골츨리Burghozli 정신병원에 조교로 부임하여 정신의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뷔르골츨리의 모든 의사들은 병원 내에서 기거해야했고, 병원은 원장인 브로일러Breuler 박사에 의하여 마치 수도원처럼 운영되었다. 브로일러는 당시 스위스에서 가장 저명한 정신의학자 중 한 명이었는데, 직원들에게는 권위적이었지만 환자들에게는 친절하고 인간적인 의사였다고 한다.


Hades 
그리스어 'AIDES' ("보이지 않는 자")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그리스 신화 속의 신. 로마신화에서는 플루토 혹은 플루톤('부유한 자')으로 불리움. 거인족 크로노스와 레아의 아들로, 제우스나 포세이돈과는 형제지간이다. 크로노스가 살해된 후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 아내 페르세포네(데메테르의 딸)와 함께 죽은 자와 내적인 힘을 다스렸다. 

 
이 병원에서 융은 생애 최초로 정신병자들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병자들이 하데스의 지하세계에 있는 죽은 영혼들처럼 보였다. 그는 매일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는 미친 남자들과 여자들을 대했다. 이들은 정신이상psychosis, 즉 강박증이나 ‘무의식의 침략’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한 질환으로 인해 환자의 일상적인 정신작용이 망가졌고, 환자는 관례적인 사회적 행동 대신 엉뚱한 행각을 벌이게 되었다. 뷔르골츨리에서 보낸 9년 동안 융은 브로일러가 운영하는 실험심리 프로그램의 선구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후에 브로일러가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이라고 재명명한 조발성 치매dementia praecox를 주로 다루었다.

 

대부분의 정신의학자들은 정신분열증이 뇌의 퇴행성 질환이라고 믿었다. 즉 신경조직상의 장애에 관련된 문제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반면 브로일러 측에서는 정신분열증 역시 2차적인 증상들이 있으며 그것은 원래 심리적인 증상이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치료자는 환자와 정서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환자의 환각이나 무의미한 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브로일러는 병의 초기 단계에 환자를 집중적으로 치료해서 병이 만성화되는 것을 막고자 애썼으며, 그 결과 많은 환자들이 현저히 회복되기도 하였다. 브로일러는 한편, 정신질환의 심인성 형성과정과 무의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연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했다.

 

융은 브로일러의 지휘 하에 위와 같은 연구들을 지속하면서 단어연상검사word association test를 더욱 발전시켰다. 이 테스트에서 환자는 특별히 선별된 단어들을 듣고 최초로 연상되는 단어를 말해야 한다. 그 결과 단어연상 및 반응시간에서 나타난 불규칙성이 콤플렉스complex를 구성하는 무의식적 감정들과 연관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융은 콤플렉스의 다양한 유형과 각각의 기원에 대해서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바베뜨 Babette라는 늙은 여성환자가 융의 관심을 끌었다. 서른 아홉 살 이후로 12년 동안 그녀는 뷔르골츨리에 입원해 있었는데, 늘 이렇게 중얼거렸다.

“ 나는 오트밀 바닥에 있는 플럼케이크야 . 나는 나폴리랑 같이 세계에 국수를 공급해야 돼! ”

 

융이 단어연상검사를 통해 이 표현을 분석했을 때 , 그녀의 삶이라는 문맥 속에서 이 말들이 뭔가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그녀는 뒷골목의 가난뱅이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술주정꾼이었고 어머니는 매춘부였다. 바베뜨의 콤플렉스는 그녀의 열등감과 불행했던 삶에 대해 보상하고 싶다는 소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신병적 생각들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고자 하는 개인의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융은 피부와 땀분비 반응을 통해 심리적 상태를 측정하는 검사장치를 가지고 실험을 하기도 했다 . 소위 말하는 ‘ 거짓말탐지기 ’ 말이다. 그는 단어연상검사를 범죄사건의 범인을 찾는데에도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실제로 돈을 훔쳤던 간호사를 잡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그는 이 작업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한 반응들이 피험자의 주관적인 죄책감에 따라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실제로 그 사람이 유죄인가 무죄인가와는 상관 없이 그러한 반응들이 생겨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여하간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융은 ? 특히 미국에서 -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1905년 그는 뷔르골츨리의 수석의사가 되었고, 취리히대학 의학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정신분석에서 더 많은 성과를 이룩할수록 유명세의 발판이 되었던 실험심리학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융은 12년 뒤에, “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실험심리학으로부터는 아무것도 , 거의 아무것도 배우는 것이 없을 것이다. ” 라고 이야기하기까지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