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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스피치

Joyfule 2012. 10. 31. 09:43

 

  <영화 소개>(인터넷 영화 자료에서)

 

  연합군의 비밀무기는 말더듬이 영국 왕?!

  세상을 감동시킨 국왕의 콤플렉스 도전이 시작된다!

 

때는 1939년,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키며 왕위를 포기한 형 때문에 본의 아니게 왕위에 오른 버티.

권력과 명예, 모든 것을 다 가진 그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마.이.크!

그는 사람들 앞에 서면 “더더더…” 말을 더듬는 콤플렉스를 가졌던 것!

국왕의 자리가 버겁기만 한 버티와 그를 지켜보는 아내 엘리자베스 왕비,

그리고 국민들도 애가 타기는 마찬가지…….

게다가 지금 세계는 2차 세계대전 중!

불안한 정세 속 새로운 지도자를 간절히 원하는 국민들을 위해 버티는 아내의 소개로 괴짜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를 만나게 되고,

 삐걱거리는 첫 만남 이후 둘은 기상천외한 치료법을 통해 말더듬증 극복에 도전하게 되는데……. 

세기의 선동가 히틀러와 맞선 말더듬이 영국 왕.

 과연 그는 국민의 마음을 감동시킬 연설에 성공할 수 있을까?

  

  <조지 6세의 생애>(위키 백과에서)

 

  -즉위 이전-

빅토리아 여왕 때인 1895년 12월 14일 요크 공작(훗날의 조지 5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여러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특히 위염 때문에 자주 고생했으며, 말을 더듬었다.

 

  1920년 요크 공작의 지위에 오른 그는 부친의 정치를 도와서 공적인 일들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된 활동은 비공식적인 기구인 산업복지회 회장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공장들의 여러 후생조건들에 대해 자신이 제일 먼저 알기를 바란다는 명령을 내려 공장 복지 개선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산업 공작'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공장들을 돌아보았는데,

번거러움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왕실에서 방문할 때마다 깔리던 자주빛 카펫은 생략되었다.

 

영국 왕실의 결혼은 국내외적으로 항상 화제가 되었는데, 조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지는 스코틀랜드 귀족 가문의 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결혼하였다.

엘리자베스의 신선함과 우아함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결혼 전부터 애민(愛民) 정치가로 존경받던 조지도 국민들에게 더 많은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런 소식은 부왕인 조지 5세도 흐뭇하게 해주어 공작 부부 동반으로 해외 여행을 자주 시키곤 하였으며, 그의 말 더듬는 병을 고치도록 그 분야의 최고인 오스트레일리아인 치료사를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병 치료에 큰 효과가 없자,

조지 5세는 윈저 내의 왕실 별장을 조지에게 내어주고는 자주 요양하면서 병을 치료하도록 배려했다.

1926년 두 사람은 첫째 딸인 엘리자베스 공주를 낳았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둘째 딸인 마거릿 로즈 공주를 낳았다.

 

  -재위 기간- 

1936년 에드워드 8세가 하야하자 그의 동생인 조지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에드워드 8세의 퇴위는 전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왕위 계승자로서의 수업을 전혀 받지 못했던 조지 6세는

3주간의 간단한 준비 후에 공식적인 행사에 들어가야만 했다.

 

건강하고 젊은 나이에 왕이 된 형이 있었기에, 자신이 왕이 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는

갑작스런 형의 퇴위와 함께 자신이 왕이 되자 모든 것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정치를 함에 있어서 한 가지씩 시험 대상에 올려놓고

얼마간 지켜본 후 결정을 내리는 신중함을 보이곤 하였다.

 

당시 유럽에는 전체주의 세력 파시즘과 나치즘이 팽배해 있었고, 

스페인이 프랑코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독일의 총통 히틀러가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었다.

자칫 전쟁의 조짐마저 보이자 그는 평화를 대내외 정치의 우선 원칙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유화 정책과 평화를 내세우는 조셉 오스틴 체임벌린이 수상이 되자 조지 6세는 그를 일단 지지하였다.

 

체임벌린의 노력으로 외교적으로 평화적인 결과가 나타나기를 바랐지만 독일의 움직임은 그렇지 않은 쪽으로 진행되어 갔다.

여기서 조지 6세는 평화보다는 다른 방법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고통 속으로 국민들을 다시 몰아넣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하려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끝없는 탐욕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의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1939년 6월에 미국을 방문하여 영국과 미국 간 공조 방안을 마련하고 돌아온 조지 6세는 곧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날 밤 방송을 통해 조지 6세는 영국 및 영국 연방 전역에 전쟁 선포를 알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은 독일군의 공습 때문에 어느 전쟁 때보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버킹엄 궁전을 떠나지 않고 국민들과 함께 한 조지 6세는 1940년 9월 공습 때 포격으로 죽을 뻔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위험한 상황인데도 조지 6세는 인근 이스트엔드 지역의 상처와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국민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곤 하였다.

조지 6세가 국민들과 함께 한 시간은 동생인 켄트 공작이 비행기 사고로 죽은 1942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는 지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부왕이 행했던 것처럼 1943년부터 군사단과 병기 제조 공장 등을 수시로 시찰하였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10일 전에 버나드 몽고메리의 지휘 하에 출정을 기다리는 영국군과 함께 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5월 8일 마침내 독일이 항복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피폐해진 국내 경제를 풀어야 될 총선거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사회보장제도를 들고 나온 영국 노동당의 애틀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국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을 물리치고 수상이 되었다.

조지 6세는 애들리에게도 역시 처음부터 관심을 주지 않고 그의 정책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애들리와의 사이가 좋아지지는 않았다.

특히 사회주의자인 애들리의 국유화를 향한 급진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말년-

조지 6세는 선천적으로 건강한 인물이 아니었다.

지병이 있었던 그는 대전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47년에 남아프리카, 로디지아 등 인종차별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지역을 방문하는 열성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방문을 앞두고 약간의 동맥경화증을 보이면서 방문 일정이 취소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처칠이 다시 내각을 맡게 된 1951년 다시 병이 악화되어 이듬해 2월 6일 잠자는 도중 세상을 떠났다.

 

                                                                      정복을 입은 조지 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