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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고추와 날된장 - 임 보

Joyfule 2012. 5. 6. 08:13

  풋고추와 날된장 -  임  보

 

 

나는 고추를 좋아한다. 특히 매운 고추를 즐겨 먹는다.

여름철이면 식은 밥을 찬물에 말아 둬 개의 풋고추와 날된장만으로도 훌륭히 점심을 때운다.

어렸을 적 많이 먹었던 음식이어서 체질적으로 맞는 모양이다.

나는 음식점에 가서도 고추가 맵지 않으면 매운 고추를 달라고 청한다.

맵지 않은 고추를 선호하는 이들은 나의 이러한 식성을 보고 의아해 하지만, 정작 이해가 안 가는 쪽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다.

고추의 속성은 매움인데 매운 것을 싫어하면서 고추를 먹겠다는 것은 자가당착이 아닌지 모르겠다.

 

고추의 매운 맛도 다양하다.

무덤덤하게 매운 것이 있는가 하면 화끈하게 매운 것이 있다.

화끈한 것 가운데도 달큼 화끈한 것이 있고, 쏘는 화끈함이 있다.

후자는 주로 이국종 고추로 매움의 강도가 매우 높아서 마치 혓바닥이 벌에 쏘인 것처럼 아리고 얼얼하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맛의 감각을 잃게 되니 가까이하기 괴롭다.

내가 좋아한 것은 ‘달큼 화끈’한 재래종 고추다.

매우면서도 달콤한 맛을 지니고 있어서 입안이 화끈하면서도 감미로운 쾌감을 느끼게 한다.

 

도시에 살면서도 해마다 뜰에 십여 그루의 고추를 심어 여름 반찬을 마련한다.

풋고추의 진미를 즐기려면 금방 따온 싱그러운 것이라야 한다.

시장에서 며칠 뒹굴다 온 시들한 것은 영 감칠맛이 없다.

풋고추 따는 것도 그 시기를 잘 보아서 결행해야 한다.

덜 여문 것은 풋내가 나서 비릿하고, 붉어지기 시작하면 너무 딱딱해져서 잘 씹히지 않는다.

그러니 붉어지기 조금 전 약이 탱탱히 올랐을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겉에 윤기가 나고 만져보면 탄력이 느껴진다.

 

풋고추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는 음식이 날된장이다.

된장의 맛이 좋아야 고추 맛이 산다.

된장 맛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여간 까다로운 공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질이 좋은 하얀 콩[白太]을 선별하는 일에서부터, 때를 잘 가려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만든 메주를 짚으로 엮어 잘 발효시켜야 하며, 또한 간이 잘 맞도록 간장을 담근 다음, 그 속에 메주를 넣어 숙성시키는 등 정성을 쏟아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맛있는 된장은 빛깔부터서가 다르다.

그 때깔만 보아도 좋은 된장은 식별이 된다.

거무스레하거나 희끄무레한 빛깔을 띤 것은 실패작이다.

검은 것은 메주를 잘못 건사해 부패한 것이고, 흰 것은 메주가 덜 떠서 제대로 발효가 안 된 것이다.

잘 빚어진 된장은 그 속을 열었을 때 황금 빛깔이 난다.

거기다가 너무 짜지도 싱겁지도 않으면서 감칠맛을 지닌 것이 상품이다.

된장의 맛은 그것을 담갔던 간장의 맛에 좌우되니 간장을 성공적으로 담그는 일이 우선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어떻게 해서 매운 고추 맛에 길들었는지 참 희한한 일이다.

동물과의 친소관계를 기준으로 지상의 식물들을 친화(親和) 식물과 위화(違和) 식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들이 만든 씨를 동물에 의존해서 운반하려는 의지를 지닌 식물이 친화 식물이고, 그들의 씨를 동물의 침탈로부터 방어하려는 의지를 지닌 식물이 위화 식물이다.

전자는 감 배 사과 복숭아 등 감미로운 과일들이 이에 해당한다.

동물에게 맛있는 먹이를 제공하면서 그들의 씨를 다른 곳으로 옮겨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후자는 은행이나 호두 같은 것으로 접근하는 동물에게 악취를 발산해서 씨를 보호하려 한다.

이들은 스스로 딱딱하고 둥근 씨를 만들어 동물의 힘을 빌지 않고도 빗물에 쓸려 옮겨 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고추는 좀 특이하다.

익은 고추가 붉은 빛깔을 띤 것을 보면 친화적 식물 같은데, 그 맛이 매운 걸 보면 위화적 식물 같기도 하다.

빛깔로 동물을 유혹한 다음 막상 먹으려 들면 매운 맛을 발산하여 씨를 보호하는 복잡한 의지를 지닌 식물이다.

고추의 그런 적대적인 매운맛을 인간들이 오히려 역이용하여 즐기고 있으니 고추가 만일 이런 인간의 간교를 안다면 얼마나 분개할 것인가?

하기야 그런 인간들 때문에 그들의 종족은 지상에서 사라질 염려가 없게 되었으니 이젠 상호의존의 우호적 관계라고 만족해 할 지도 모르겠다.

 

또한 우리 조상들이 콩을 썩혀 메주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반찬이 여의치 못했던 시절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밑반찬을 고안해 낸 것이 된장이었으리라.

된장은 야채에 곁들어 먹는 최고의 한국적 소스다.

김치와 더불어 된장, 고추장, 간장의 발명은 한민족이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입증하는 식품이 아닐 수 없다.

 

음식에도 궁합이 있다.

소위 ‘홍어삼합’이라고 하면 홍어에 묵은 김치와 삶은 돼지고기를 곁들여 먹는 음식인데, 이처럼 음식끼리 잘 어울려 맛을 더 내는 경우가 없지 않다.

풋고추는 역시 날된장을 만나야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여름철 한낮 식은 보리밥에 찬물을 말아 한 숟갈 퍼 넣은 다음, 풋고추에 날된장을 찍어 아싹 베물어 씹어 보라.

달큰 짭조름한 된장과 더불어 고추가 부서지며 발산하는 매운 맛이란 가히 환상적이라 할 만하다.

짜고 매운 두 맛이 찬 보리밥과 잘 어우러져 식도를 타고 몸속으로 들어가면 구강은 말할 것도 없고 온몸이 짜릿하게 화끈거림을 느낀다.

풋고추 맛이란 바로 이것이다.

맛의 역설, 맛의 전복이라 할까? 아니, 맛의 반란, 맛의 혁명이라고나 할까?

 

  (에세이 21 200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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