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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관과 법무장교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4. 27. 15:38






   하사관과 법무장교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김 상사’를 만났다. 장교가 되어 처음 부대로 갔을 때 인연을 맺은 사람이었다. 장교와 하사관으로 계급장은 달랐지만 나보다 열 살이 위인 그는 나를 동생같이 돌보아 주었다. 나는 그의 행동을 보고 감동한 적이 있다. 열대야가 계속되는 찜통더위 속이었다. 비상이 걸린 우리 부대는 전원 대기중이었다. 김상사가 피엑스에서 맥주를 몇 병 사다가 찬물을 담은 양철통에 넣어 시원하게 만들고 있었다. 

당시 군부대에는 냉장고가 없었다. 밤에 우리부서의 책임자인 법무참모 김중령을 위한 정성이었다. 우리들은 한 장의 명령지에 의해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면 다시 만날 기회가 없는 사이이기도 했다. 김상사는 총각이었던 나를 집으로 데려가 떡국을 먹이기도 했었다. 근본적으로 사랑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장교와 하사관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이 있었다. 장교는 어깨에 달린 계급장으로 비교해서 하사관을 깔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사관은 평생 장교가 될 수 없었다. 내면에 장교에 대한 적대감이 은은히 타올랐다. 우리들의 감각과 의식은 그렇게 고치기 힘든 편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김상사와 함께 근처 골목길 안의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구석의 탁자에 앉아 돼지목살과 백세주 한 병을 주문하고 얘기를 시작했다.

“십년전에 정년퇴직을 했어요. 매일 구청복지관에 가서 바둑을 두고 오후에는 산책을 합니다. 어제는 바둑을 두는 상대방이 나보고 자기는 육군대령출신인데 나보고 군에서 뭘 했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평생 직업상사로 지냈다고 했더니 그 다음부터 은근히 깔보는 말투예요. 젊으나 늙으나 사람을 대할 때마다 내가 낮아지면서 상대방 얘기를 받아줘야지 내가 뭔데 하고 교만하면 따돌림을 받아요. 그 사람하고 다시 바둑을 두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더라구요.”

우리 사회는 보이지 않는 지배집단의 오만한 성곽이 있다.

아파트 청소원이 근무 시간이 끝난 후 시설 내의 풀장이나 헬스시설을 이용하면 입주민들이 반갑게 환영을 할까? 뭔가 거부반응이 있을 것이다. 술잔이 오가고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얘기는 삼십년 전 부대 생활로 돌아갔다. 그가 얘기 중에 이런 말을 했다.

“군에서 하사관으로 삼십년동안 법무장교들을 모셨어요. 그 대부분이 판검사나 변호사가 됐죠. 그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는데도 정말 사람들이 얼음같이 차다는 느낌이예요. 참모였던 김중령이 지방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셨어요. 일부러 시간을 내서 그분의 사무실로 인사를 갔죠. 차 한잔을 내주는데 표정을 보니까 그렇게 냉정할 수 없어요. 멀리 갔는데도 헛말이라도 저녁이나 함께하자는 소리가 없는 거예요. 그 후에 다시는 가지 않았죠.”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 더운 여름날 양철통에 담겼던 맥주병이 떠올랐다. 정이 많고 소탈했던 그는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은 것 같다. 그가 덧붙였다.

“엊그저께 신문을 보니까 그 시절 법무장교였던 박중위님이 법원장이 됐더라구요. 그 분 군대있을 때 처신으로 보면 절대 출세할 사람이 못됐는데 후에 상당히 변한 모양이예요. 군대 있을 때 지저분한 짓을 많이 하셨죠. 그분이 다른 부대로 전출 갈 때 보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런데도 어떻게 합니까? 내가 양보하고 그 사람이 살던 집에 가서 이삿짐을 싸주던 생각이 납니다.”

그를 보면서 정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허위 의식 때문이다. 상냥하고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던 사람이 검은 법복을 입고 법대 위에 올라앉으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걸 봤다. 겸손하고 온유하던 변호사가 권력직에 임명되면 목소리부터 바뀌는 걸 보기도 했다. 대통령 후보가 되면 구름 위의 존재가 되어 의식조차 달라지는 것 같았다. 내가 있는 실버타운의 옆자리에는 해병대 하사관출신 노인과 육군 대령 출신의 노인이 함께 밥을 먹는다. 해병대 마크가 달린 모자를 쓴 노인이 대령출신 노인에게 명령한다.

“짜장면 사줄 께 너 오늘 운전해라.”

“하사관이 대령에게 운전병을 하라고 하네. 알았어.”

대령출신이 사람 좋은 웃음을 웃는 걸 봤다. 인간은 무엇으로 살까? 인간이 되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게 뭘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