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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 정경자

Joyfule 2015. 4. 18. 09:41

 

 

 [2009 15회 신인문학상 동양일보] 수필 당선작

 

늙은호박 효능

 

호박 - 정경자

 

참으로 못 생겼다. 울퉁불퉁한 굴곡은 흘러내린 뱃살이라고나 할까, 풀숲에서 훔쳐본 촌부의 둔부라 할까.

추녀의 대명사가 아니었어도 호박은 신세대나 아이들에게 푸대접받는 신세다. 애호박이나 늙은 호박이 아무리 싱싱해도 생식(生食)할 수 없음은 채소로서의 결격사유다. 익히거나 삭혀 먹어야 하므로 아삭하게 씹히는 맛은 일찍이 포기해야 한다.

채소지만 단맛이 나는 것도 못마땅할 것이다. 단맛이라고는 하나 과일의 당도에는 어림없는 싱거운 단맛이다. 별맛이 없다면 차라리 시원함으로 승부를 내던가. 화끈하게 맵기라도 하면 인사라도 들으련만. 이도저도 아니니 독특한 개성과 자극적인 맛에 익숙한 세대에겐 호박이야말로 열외일 수밖에 없다.

 

채소라면 마땅히 부엌이나 냉장고가 제격이겠지만 겨울철 늙은 호박의 자리는 보통 안방이나 거실이다. 꽃처럼 예쁘지도 않고 모과처럼 좋은 향도 없는 그것을 안방이나 거실에 모시는 이유는 따로 있다. 호박을 추운 데로 내몰아 푸대접을 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속부터 썩어 짓무르고 만다. 덩치만 컸지 속은 여린 탓이다.

 

거실에 유하는 동안 호박은 홀로 결가부좌를 틀었거나 석탑으로 쌓여 면벽수행 중이다. 무슨 명상에 빠졌을까? 갈수록 각박하고 냉혹해져가는 세상에 사람들은 원래 따뜻한 심성으로 어우러졌었다고 설파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겸손의 철학을 묵언으로 역설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끼니도 부족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마솥에 호박죽 끓이시던 날은 이웃들과 정을 나누는 날이었다. 따뜻한 호박죽 한 그릇이 가면 돌아오는 그릇엔 삶은 고구마나 김장김치가 그득했다. 그때가 보통 늦가을께나 초겨울쯤이어서 쌀쌀했지만 마음만은 훈훈했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나는 호박씨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다. 씨앗을 얻어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일거리로 농사짓는 어르신들과 시장 좌판에서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들이었다.

어느 해엔 받아간 씨앗에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채소 파는 안강댁이 내게 푸념을 했다.

좋은 종자만 골라 손질해 준 나로선 난감한 일이었다. 곧 그 내막을 알아 본 나는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해마다 호박을 수확해서 팔던 그녀였다. 가만 생각해보니 호박만 파는 것보단 잎도 따서 파는 것이 훨씬 큰 이익이 나겠더란다.

그것이 그녀의 판단착오였음을 여름이 다 지나고서야 알 수 있었다. 호박도 맺기 전에 여린 잎을 줄기차게 따버린 탓에 그 해엔 호박이 하나도 열리지 못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여력이 있어야 열매도 맺고 씨앗도 열린다. 잎을 생산하는데 사력을 다하고 나면 열매 생산에 쏟을 에너지는 고갈되고 만다.

 

요즘 세태가 그러하다. 물질은 풍족하지만 생활수준 욕구가 훨씬 높아진 탓에 자식 낳기를 꺼린다.

설사 아이를 낳는다 해도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주의다. ‘물질만능주의’는 자연의 섭리도 변질시키고 있다. 과욕은 재앙을 부를 수도 있음이다.

 

지난 봄, 묘목 농장주변에 호박씨를 심겠다는 남편에게도 씨앗 한줌을 내주었다.

남편은 성에 차지 않았는지 한 움큼의 씨앗을 더 덜어갔지만 수확량은 고작 애호박 두개가 전부였다. 짬을 내서 거름도 줄 것이고 호박이 맺히면 무성한 잎들도 솎아내겠다고 했지만 남편은 생업에 쫓겨 뿌린 씨앗에는 언제나 말만 보탰을 뿐이었다.

의욕만 가지고 되지 않는 것이 어디 농사뿐이겠는가. 세상에 노력 없이 저절로 맺어지는 열매는 없다. 튼튼한 움 하나를 틔우더라도 병들지 않은 씨앗에 기름진 흙, 적당한 비바람과 부지런한 농부의 손길이 척척 아귀가 맞아야 한다. 게으른 농부에게 충실한 결실을 주신다면 그것은 또 다른 게으름을 낳을 지도 모를 일이다.

조물주는 얼마나 지혜로우신가. 작고 여린 과실은 나무에 달리게 하셨고 호박이나 수박처럼 크고 무거운 열매는 덩굴에 열리게 하셨다.

 

작아도 밀도가 높아 단단한 결실은 땅속에 맺도록 하셨다. 만약 커다란 호박이 나무에 열린다고 가정하면 잘 익어 거두는 일도 큰 공사일 테고 농익어 저절로 떨어진 호박에 다친 사람도 부지기수 일 것이다.

단단한 감자나 고구마도 나무에 열려 낙과된다면 중상은 아니라도 사람에게 가벼운 상처쯤은 입혔을 법하다.

흥부전에 나오는 박은 사실 호박이 아니었을까? 가끔 해외토픽에 거대 호박에 관한 뉴스가 나온다. 스무 명도 넘는 흥부의 자식들이 호박구덩이에 무차별적으로 뒷거름을 주었을 것 같다. 풍부한 거름 덕분에 흥부네 텃밭에도 집채만 한 호박이 열렸을 것이다.

 

하얀 박이 그처럼 크게 열리는 경우도 잘 없거니와 잘 익은 호박을 쪼개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보면 물기 머금은 누런 섬유조직은 마치 반짝이는 금붙이패물을 겹겹이 쟁여놓은 모양이다.

좌르르 쏟아지는 호박씨도 연주에 꿰어 규방처자의 목걸이나 양반 갓의 주영(珠纓)으로 늘어뜨려도 좋을 유백색 비취구슬 같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호박도 사람처럼 관상이 있다. 옹골찬 주름도 없고 핏기 없이 허연 것은 수분이 많아 장기간 견디지 못하는 부실한 것이다. 또 덩치가 커도 가벼운 것은 속빈 강정이다. 짙은 담황색에 단단한 육질, 묵직한 무게감이 있어야 알찬 속이 잘 상하지도 않는다.

 

과일만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늙은 호박도 처음 딸 때는 껍질에 설핏 파릇한 기운이 돌고 풋내가 난다. 자숙의 시간을 거쳐야 꼭지의 수분이 사라지고 무르익는다. 그제야 누런 껍질에 뽀얀 분이 나면서 단맛도 깊어진다. 늙은 호박이 시골집 대청마루에서 가을볕을 쪼이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람도 그러하다. 설익은 패기만 믿고 대책 없이 세상에 부딪히다간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스스로 다지고 삭히는 성찰만이 세상에 융화되고 또 감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호박만큼 인간에게 요긴하게 쓰이는 것도 드물다. 매실이 사람에게 아무리 이롭다하나 그 씨앗에 독이 있고 감자의 싹도 그러하다. 잎, 꽃, 열매, 씨앗 어느 것 없이 음식도 되고 약도 되는 것이 호박이다.

또한 사계절을 두루 섭렵하는 것이 알고 보면 호박이다. 봄이면 잎과 꽃,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애호박, 늙은 호박, 한겨울엔 썰어 말린 호박오가리로 나물과 떡을 해 먹었다.

 

자신의 공을 앞세우고자 화려한 공치사가 난무하는 마당에 온몸을 바쳐 살신성인하는 호박의 음덕이 가상하다. 범상한 외모에 비범한 희생정신이 서렸음에 아직도 ‘꽃은 꽃이되 호박꽃’이라 폄하할 것인가.

지금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나는 호박씨를 이웃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비록 호박씨 한줌이지만 그것이 잎과 호박으로 열려 어르신들의 소일거리가 되어도 좋고 시장에 나가 채소상의 벌이가 되어도 좋다. 이도저도 아니면 결국 우리 탕제원으로 호박 즙을 내러 와도 그만이다. 무엇보다도 호박을 닮은 넉넉한 인정이 넝쿨에 호박이 열리듯 번졌으면 좋겠다.

 

엽렵하고 예쁜 것이 지천이지만 투박한 호박이 더욱 정겹다. 식당이나 가게 한쪽에 늙은 호박 몇 덩이를 보기 좋게 포개놓은 집은 어쩐지 인심도 후할 것 같다. 호박 때문에 예민하게 경계하던 마음이 풀리고 느긋하게 바라보는 여유도 생긴다.

손톱만한 씨앗에서 폭염과 비바람을 이겨낸 바위만한 열매, 필시 조물주가 내려주신 들녘의 황금 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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