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해바라기 - 유진오

Joyfule 2015. 4. 20. 20:34

 

 해바라기

 

해바라기 - 유진오

이렇다 할 아무런 업적도 남긴 것 없이, 벌써 인생의 절반을 살아 온 내다.
20 전후의 불타오르는 듯하던 정열을 생각하면, 지나간 열다섯 해 동안 무엇을 해 온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모르겠다.
내깐으로는 허송 세월은 하지 않노라고 해 왔는데 결국 이 꼴이니, 앞으로 남은 반생이 또 이 꼴로 지나가 버리면 어찌될 것인가. 송연(悚然)한 노릇이다.

그 전에는 내 나이 젊은 것을 핑계삼고, 누가 무엇을 쓴 것이 몇 살, 누가 무슨 일을 한 것이 몇 살 하고, 스스로 자신의 무능을 위로해 왔다.
그러나 어찌어찌하다가 보니,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던 누구누구의 나이를 어느새엔가 나 자신이 넘어서고 말았으니, 인제는 무엇으로써 스스로 위안할까.
환경을 따져 보고 시대를 원망해보고 한댔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위대한 정신은 항상 시대나 환경에 지배됨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거꾸로 시대나 환경을 창조하지 않았던가. 이 말이 지나친 말이라면 그들은 어떠한 시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결코 자신을 그대로 그 속에 매몰(埋沒)시켜 버리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철벽(鐵壁)을 뚫고 자신을 키워 나가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의 정신에 무엇인가를 플러스하였다.
나이 반생을 넘어서도록 아직 아무것도 일다운 일을 하지 못한 나는 결국 나 자신의 무능을 한탄할 수밖에 없다.

7, 8평 되는 안마당에다 지난 4월 아내와 아이들이 두어 평 되는 화단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비록 크지는 않으나마, 무궁화를 한 나무, 라일락을 두 나무 심은 뒤에, 작약(芍藥) 옥잠화(玉簪花) 국화 은방울꽃 칸나 촉규화(蜀葵花) 백합 등 속의 다년생 초본과 함께 채송화 봉선화 해바라기 양귀비 백일홍(百日紅) 분꽃 코스모스 한련(旱蓮) 나팔꽃 등 속의 화초씨를 잔뜩 뿌렸다.

20평 화단이라도 비좁을 만큼, 여러 가지 나무랑 화초랑 심길래 나는 여러 번 나무랐으나, 아내와 아이들은 듣지 않고 다 심고 나서, 아침 저녁 정성껏 물을 주었다.
며칠 지나니 나뭇가지에서는 파릇파릇 움이 돋고 땅에서는 소복하게 귀여운 싹이 나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신기한 것을 보는 듯 소리를 내 기뻐하고, 나는 내심 지난 번에 나무란 것을 점직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린 화초들이 시루 안에서 콩나물 자라듯 비비고 나오기 때문에 밴 놈은 아깝지만 솎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약한 놈은 솎아낼 때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저절로 사그라졌다.
그리해 두 달이 다 못 가서, 내 안마당 두 평 짜리 화단에는 두 평에 알맞은 만큼의 화초만이 남고 말았다.

지금 우리 안마당에는, 해바라기 두 그루가 가장 키도 크고 줄기도 굵어서 좁은 화단의 주인인 양 버티고 섰고, 그 옆에 키 큰 촉규화가 자줏빛 꽃을 한창 달고 있을 뿐, 그 밖의 화초들은 모조리 볼품없이 되고 말았다.

싱싱하게 자라는 안마당 해바라기를 볼 때마다,
나는 내 방 앞에 있는 병든 해바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서재 앞마당은 석 자도 못되는 넓이에다가, 6척이 넘는 벽돌 담이 남쪽을 가리어, 꽃을 심어도 안 되고 나무를 심어도 안 되는 곳인데, 5월달에 안마당에서 화초를 솎아 버리다가 그 중 키도 잎사귀도 제일 큰 해바라기 한 그루를 아깝다고 아이들이 옮겨다 심은 것이다.

볕도 안 들고 바람도 안 통하는 담 밑에서 해바라기가 될 리 없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아이들이 하는 일이기에 내버려 두었더니, 예상한 대로 이놈은 발육이 시원치 않았다.
해 잘 드는 안마당 해바라기는 매일 매일 무럭무럭 자라나서 밑둥 직경(直徑)은 벌써 한 치가 실하고 키는 내 키가 넘으며, 상수리에는 꽃봉오리를 달고바람이 불면 쟁반같이 큰 잎사귀를 자랑스레 너울거리게끔 되었는데, 내 방 앞 해바라기는 옮겨 심은지 한 달이 지나도, 자라기는커녕 도리어 더 초라해만 지는 것이다.
줄거리는 언제까지나 새끼손가락 같고, 잎은 송편 크기만밖에 안 한다.
그럴 지경이면 키도 차라리 안 컸으면 좋겠는데, 키만은 나이값을 해 약간 자랐으니 도리어 탈이다.
워낙 가느다란데 키만은 자가웃 가량이나 크고 보니 바람기가 없어도 제풀에 쓰러질 듯 흐늘흐늘 하는 폼이 위태롭기만 하다.

환경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같은 종자에서 나왔고, 어렸을 때 같이 자란 해바라기건만, 햇볕을 받고 못 받는 차이 때문에 안마당 해바라기와 내 방 앞 해바라기는 이렇게 아주 종자가 다른 것 같은 차이를 나타내고 만 것이다.
이 사실만 해도 사람의 감회를 자아내기에 족한데, 이 병든 해바라기한테는 드디어 한층 잔학한 시련이 닥쳐왔다.
저번, 밤새도록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던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이 발육부전(發育不全)의 해바라기는 무참하게도 담 밑 땅바닥에 넘어져 버린 것이었다.
보기 싫었다. 감정도 사고(思考)도 없는 식물이건만, 나에게는 그것이 생존 경쟁에 패배해 넘어진 인생의 패자(敗者) 같이 보였다.
눈물을 흘리고 운명을 저주하면서, 자기를 그런 운명속으로 몰아넣은 사람의 손을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장 뽑아버리기도 애처롭고 해서 그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다시 그 이튿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꽃 필 희망은커녕 더 자랄 희망조차 없는 해바라기는 줄기와 잎이 흙에 묻힌 채, 그래도 또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물론 온몸을 쳐들 힘은 없기 때문에 맨 윗순만을 철사를 꼬부리듯 꼬부려 쳐드는 것이다.
햇빛 비치는 밝은 쪽을 향해 단 한 치라도 그곳으로 가까워지려고... .

생명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해바라기에 무슨 목적이 있길래 그토록 좀더 살려고, 좀더 낫게 살려고 생명이 붙어 있는한 애를 쓰는 것인가.
나는 이 병든 해바라기의 악착같이 살려는 의지가 무서워 지금은 선뜻 뽑아버리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저러나 간에, 안마당에 서 있는 싱싱한 해바라기보다 정신적 부담은 돼 있을망정, 이 병든 해바라기 쪽으로 나의 관심이 더 쏠리는 것만은 사실이다.
내 집 안마당을 온통 제 차지인 양, 다른 화초들을 누르고 떡 버티고 서서, 제가 그렇게 된 것이 바로 제가 잘나서 그렇기나 한 듯 바람이나 설렁설렁 불면, 그 커다란 잎사귀를 너울너울하며 우쭐거리는 꼴을 보면, 밉살스런 생각이 슬그머니 드는 데 반해서, 내 방 앞 병든 해바라기를 보면, 오직 애처로울 뿐이다.
애원하듯 가냘픈 목을 꼬부려 쳐든 광경은 그저 겸허하고 솔직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다 나의 부질없는 감상일 뿐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원인이 무엇이든, 안마당 해바라기가 생의 승자(勝者)임에 반해서, 내 방 앞 해바라기는 생의 패자임이 엄연한 사실이 아닌가.
안마당 해바라기는 머지않아 훌륭한 꽃을 피우고 훌륭한 열매를 맺을 것이지만 내 방 앞 해바라기는 꽃을 피우기는커녕, 아마도 이 장마가 개이면 말라버리고 말 것이다.
말라버리지 않기로선, 지금 이상의 무슨 장래가 이 해바라기에게 있다는 것인가.

해바라기로서 할 일을 못다한 해바라기. 생에 실패한 해바라기.
실패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되, 실패의 모든 책임을 홀딱 자신이 뒤집어쓰지 아니하면 안 되는 내 방 앞 해바라기.
그러나, 나는 이 병든 해바라기한테로 쏠리는 나의 애착(愛着)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비록 보다 못해 내 손으로 뽑아다가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는 날이 오더라도, 이 해바라기에게 쏠렸던 나의 애착은 영원히 내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낱말 및 어구 풀이>

1) 송연 : 두려워 몸을 움추림.
2) 점직하다 : 조금 미안하고 부끄럽다.
(兪鎭午/1906.5.13~1987.8.30)

법학자·문인·정치가. 호 현민(玄民). 서울 출생.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예과 강사를 거쳐 보성(普成)전문학교 법학교수가 되었다.
27년경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 《조선지광(朝鮮之光)》《현대평론》 등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프롤레타리아문학 전성기 동반작가(同伴作家)로 《갑수의 연애》 빌딩과 여명(黎明)》 등의 작품을 썼고,

38년 장편 《화상보(華想譜)》를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카리나 - 김성구  (0) 2015.04.23
충견 이야기 - 고정숙  (0) 2015.04.21
호상(好喪) - 김 경 순  (0) 2015.04.19
호박 - 정경자  (0) 2015.04.18
미역할매의 노래 - 조 숙  (0) 2015.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