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신앙인물

홍병선 농촌운동 선구자

Joyfule 2009. 4. 17. 00:32

홍병선 농촌운동 선구자

1. 서론

1960년대 말 한창 육교설치 문제로 시비가 분분하던 때, 시천 앞 차도를 보란 듯이 건너는 노인이 있었다. 물론 지척에 육교가 설치되어 있었음에도 노인은 터벅터벅 대로를 건넜다. 호각을 불면서 순경이 달려 온 것은 자명한 일,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손에 든 지팡이를 들고 호통쳤다. "옳지,너 잘 왔다. 순경이지! 늙은이가 어떻게 육교로 가라는거야! 나 업어서 넘겨다 줘!"한창 경제발전을 부르짖으며 인간보다는 기계와 기술을 앞세웠던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우선 보호받아야 할 노약자가 정부 시책의 제일 끝 순서로 밀려나기 시작한 때의 이야기다.

시청 앞 대로상에서 호통을 치던 노인, 그가 바로 평생을 야인으로 산 홍병선목사이다.

2. 생애

호는 목양,1888년 11월 6일 사직동에서 선비 홍태준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했고 서울에 있던 신교육기관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 경성학당은 1899년 일본기독교도 교육회에서 세운 일본식 학교로 학당장은 조합교회 목사 와다세였다. 아마도 홍병선은 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기독교인이 된듯 하다. 1905년에 경성학당을 졸업하고 3년 후에는 일본에 유학, 도지사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1911년에 귀국하였다. 1911년은 와다세가 일본조합교회의 정식 선교사가 되어 파송된 해로 그는 와다세가 설립한 한양교회 전도사가 되어 목회를 시작했다.

 

1916년 남감리회 조선매년회에서 정식 전도사 직첩을 받았으며 1925년에는 본처목사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목회자라기 보다는 교육가,사회운동가로 크게 활약하였다. 1911년 이후 보성전문학교 교사를 겸임했고 1917년에는 피어선기념성서학원 교사를 거쳐 1919년 배화여학교 교사로 봉직하였다.

 

1920년 그는 조선중앙 기독교청년회(YMCA)소년부 간사로 YMCA 운동에 발을 들여 놓음으로 이후 50년을 YMCA 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특히 1925년 농촌부 간사가 되면서 YMCA의 농촌 운동을 주관하는 실무자가 되었으며 이때로부터 [농촌운동가 홍병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20-30년대의 한국기독교 농촌운동은 농촌계몽이나 선교사업으로 정리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일제의 잔혹한 탄압의 실체를 3.1운동 진압과정에서 체험한 민족운동가들은 이후의 민족운동을 크게 두 흐름으로 분산시켜 전개해야 했다. 하나는 만주.시베리아 등에 근거를 둔 무장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의식 개발을 위한 민중계몽이었다. 사회주의 계열은 주로 전자의 노선을 취했으며 기독교는 후자의 노선을 취해 민족 역량을 키워나가고자 했다. 3.1운동 이후 기독교가 전극적으로 추진했던 한글보급.농촌계몽.절제운동(금주.금연운동).물산장려운동 등은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농촌운동이야말로 민족운동으로서의 새로운 가치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일찌기 일본인이 경영하는 학교에 들어 갔고 일본 유학까지 하고 돌아와 일본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던 홍병선이 목회와 교사일을 마다하고 농촌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기독교 민족운동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YMCA 총무 신흥우도 농촌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YMCA의 역량을 농촌운동에 집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3. 농촌운동과 그의 사상

홍병선의 농촌운동은 1927-8년 덴마크미국의 농촌사업을 시찰하고 온 뒤에 본격화되었다. 신흥우와 동행한 이 여행을 통해 무엇보다 크게 깨달은 것은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지도자가 농촌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여행 직후<靑年>지에 기고한 [지도자와 농촌]이란 글의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지도자는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다수 민중을 자기 영웅 노름에 대개는 희생할지언정 자기를 위하야 희생시키지는 않는다. 일가,일단체 일촌 내에 이미 영웅은 많다. 이제는 참된 지도자를 기대하는 것이다...일촌중에 무명씨로 뭇쳐서 그 촌민 전체의 생활과 정신을 위하야 노력하는 지도자야 누가 세상이 알겠는가? 신문잡지에서 일흠을 들날리며 아모아모라고 사회에 불러주는 맛에 엇개바람이 나서 도라다니는 명사가 영웅이라고 불느면가하나 지도자라고야 감히 부를 수가 있겠는가?(청년,8권 8호,1928.11.713면).

 

신문 잡지에 이름을 날리며 사회에서 알아주는 바람에 어깨 바람을 휘날리며 다니는 영웅적 농촌운동가가 아니라 구석 촌바닥에 묻혀 민중과 함께 생활하며 정신을 깨우쳐 주는 참 지도자로서의 농촌운동가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러한 운동가가 도래고 노력하였다. 이후 그가 쓴 글이라든가 활동한 바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글들을 썼고 실제로 자신이 실천해 보였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의 하나는 농촌 협동조합 및 농촌센터(구락부)조직어있다. 농산물의 생산으로부터 수확 및 판매에 이르는 일련의 유통과정속에서 농민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며 협동을 통한 자구와 자생의 길을 모색하려는 데서 시작된 이 운동은 1929년 당시 전국 농촌협동조합 49개,농촌센터 90개에 불과했던 것이 1930년대 초반 한창 번창일 때는 협동조합이 730개,농촌센터가 320개로 크게 발전하였다.

 

그는 또 덴마크에서 보고 온 선진 농촌사업을 실제로 실천하기 위해 1931년에는 신촌에 고등농민수양소를 마련하였다. 사람과 가축이 함께 기거하는 농막을 짓고 개량식 농법을 소개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국의 농촌 청년들을 교육시켰다. 그가 계획했던 농촌 이상향건설의 꿈도 이곳에서 펴 나갔다. 이러한 유형의 농민학교를 전국에 확산하여 설립하였는데 1932년 당시 서울 근교에만 150개 촌락 중 39개 촌락에 이같은 농민학교들이 있어 YMCA가 지원 혹은 운영하고 있었다.

홍병선의 농촌운동은 단순한 잘살기 운동이 아니었다.[참사람 만들기 운동]이었다. 한창 농촌 청년들의 이농현상이 문제가 되던 1930년대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오늘날 농촌문제를 많이 떠드나 그 마음을 고쳐주지 않고 돈을 준다든지 땅을 준다든지 하드래도 그 마음에 결심하고저 하는 준비가 없으면 밑빠진 시루에 물붓는 것같이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먼저 농촌청년에게 그 정신을 바로잡아 주면 농촌에서도 살 길이 생기고 잘 살게 될 것이다. 도시청년도 먼저 그 마음을 바로잡아 주어야 잘 살게 될 것이다. 그 마음이 틀리면 농촌에서도 실패하고 말 것이요.도시에서도 실패하고 말 것이다.

자식이, 불쌍하다고 돈만 주지마라. 일부러 고생을 시켜서 돈을 벌어주려고 돈 한푼이라도 얻으면 그것은 자기가 이용하고 늘려서 살 계획을 차리는 "사람"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오늘 사회나 농촌이나 어디를 들여다 보든지 '참사람'이 없는 것이 걱정이다."]("농촌생활과 도시생활,"說敎 오십이편,금성서원,1937,53-54면)

 

그러나 YMCA의 농촌 운동도 1935년 일제의 압력으로 신흥우총무가 사임하면서부터 약해지기 시작해 1938년에는 농촌부가 폐쇄되므로 벽에 부딪혔다. 홍병선이 농촌운동도 여기에서 중단되었다. 중일전쟁(1936년)을 계기로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란 미명하에 대륙침략을 본격 추진하여 조선의 완전한 황국신민화를 추구하던 일제는 민족혼을 지키려는 농촌운동을 비롯한 기독교의 전반적 사회운동을 반체제로 몰아 탄압하게 된 것이다.

 

한국 YMCA는 1938년 일본 YMCA의 한 지부로 전락하였고 일본 시책에 순응하는 사업만이 존속되었다. 이 역사적 암흑기에 홍병선은 YMCA학관이 발전한 영창학교 교장으로 불우한 아동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나마 이 학교도 1940년부터는 학생을 받을 수 없었다.

해방 후 직접 YMCA운동에 뛰어 들진 않았으나 계속 YMCA와 관계를 맺으면서 보린회 이사장, 성인교육중앙총본부 이사장,농림부 농림위원,국민대학 및 중앙신학교 강사,농업협동조합 고문,중앙 YMCA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말년에는 YMCA 역사를 집필하는데 여력을 기울이다가 1967년 7월 19일 별세하였다. 역사가 홍이섭이 그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