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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속 인물 이야기

Joyfule 2009. 1. 19. 02:16

벨기에 화폐 속 인물
가장 섹시한 악기를 만든 남자, 삭스

 

색소폰만큼 성적 혐의를 많이 받는 악기가 있을까?

모양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야릇한 이름 때문에 말이다. 프랑스어로 ‘색소퐁’, 영어로는 ‘색스폰’, 일본어로는 ‘사쿠스폰’으로 불리는 이 악기가 색소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색소폰을 만든 벨기에의 아돌프 삭스 Adolphe Sax(1814~1894)가 자기 이름을 따서 지었기 때문이다. 아돌프 삭스는 그의 부친이 클라리넷과 금관악기를 만드는 악기 제조업자였던 덕분에 어려서부터 악기를 연주하고 만드는 기술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자라면서 수준급의 클라리넷 연주자가 되기는 했지만 항상 클라리넷이 내는 음역의 한계가 불만이었다. 그는 12음계보다는 여러 옥타브를 낼 수 있는 악기를 꿈꾸었다.

 

색소폰은 삭스의 ‘음’에 대한 욕망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리드는 클라리넷, 악기 모양은 오보에, 재질은 금관악기를 닮은 태생이 복잡한 이 목관악기는 150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재즈뿐만 아니라 록, 팝, 클래식 등 전 음악 장르에 두루 사용되는 대표적인 ‘크로스 오버’ 악기가 되었다. 삭스는 불과 스물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 악기를 만들었는데 색소폰은 발명 당시 클래식보다는 군악대에서 더 환영받았다. 색소폰은 군악대에서 금관악기의 음량에 압도돼 맥을 못 추는 목관악기를 탁월하게 보완해 주었고 곧장 프랑스 육군에 공식 채택되면서 오래지 않아 다른 나라에도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색소폰은 미국의 대중적인 독주 악기가 되었고, 곧이어 댄스 밴드에도 등장하여 스윙과 여러 갈래의 재즈 분야에서 가장 빛나는 독주 악기가 된 것이다.

 

악기와 입술의 강한 밀착에서 터져 나오는 브라스의 강한 에너지와는 달리 입술에 물린 채 연주되는 색소폰은 다소곳한 연주에서는 풋풋하고 연약한 클라리넷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고음으로 솟구치면 여성 가스펠 가수의 목소리처럼 구성지면서 강렬한 음색을 토해낸다. 또한 저음에 있어서도 낮고 굵은 목소리에 비음이 많이 섞인 프랑스 남자 배우의 독백을 연상시켜 악기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세련된 도회적인 멋을 품고 있다. 금관악기의 정열적인 음색과 현악기의 부드러움을 겸비한 ‘벨벳 사운드’와 나팔꽃을 연상시키는 섹시한 악기 모습 때문일까? 1992년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 시절 TV토크쇼에 출연해 냉정한 유권자의 마음을 단박에 무너뜨린 것도, 우리나라 재즈 시장 활성화의 은인이 마일스 데이비스가 아니라 차인표인 것도 다 벨기에의 200센트짜리 지폐에 새겨진 이 남자 때문이다.

 

멕시코 화폐 속 인물
형편없었던 여자, 후아나

 

멕시코의 200페소짜리 지폐에는 결곡한 얼굴의 수녀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고래로 탐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돈’의 모델로 무심무욕의 수도자가 ‘선발’된 것이 일견 생경하기도 한데, 이 여인은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수녀다. 종교재판이 성행하고 여성 수도자의 지적 탐구가 무시당했던 17세기, 시대의 벽을 뛰어넘어 지식을 추구하고 시를 썼던 당대의 인물이다. 그녀는 세 살 때 글을 깨쳤고, 아홉 살 무렵에는 부모에게 남장을 시켜 멕시코 대학교에 보내달라고 간청했을 만큼 향학열이 엄청났으며, 열다섯 살쯤에는 이미 각계의 학자들과 스스럼없이 문답을 나눌 정도로 박학하고 다식했다.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왕실의 총애를 받아 총독 부인의 시녀로 지내다, 성 예로니모 수녀원에 입회하여 수녀가 되었다. 수녀원 생활 중에도 희곡을 쓰고 작곡도 하며 당시 스페인의 ‘열 번째 뮤즈’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여자를 혐오하고 여성 수도자가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새로운 대주교가 나타나면서 그녀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결국 대주교를 싫어한 한 주교의 계략에 이용돼 종교재판소에 넘겨지고 모든 활동을 금지당한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특출한 재능을 지닌 그녀였지만,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나는 모든 여자 중에 가장 형편없는 여자”라는 문장을 참회 진술서에 써서 종교재판소에 제출한다. 그 후 전염병으로 죽어가던 동료 수녀들을 간호하다 생을 마감한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남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수녀 - 신앙의 함정>을 들여다보면, 17세기의 문사였던 후아나 수녀의 삶이 ‘펜’ 때문에 남성과 기성 사회의 위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희극을 쓰던 후아나 수녀의 과감한 필체는 권위에 대한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시대는 어두웠으며, 시대의 권력을 오로지한 남자들은 졸렬했다. 그녀의 파란곡절 많은 삶은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다. 옥타비오 파스의 작품을 영화화한 것으로, 17세기 멕시코와 유럽 교회의 분위기, 그리고 여성 수도자의 곤고한 삶의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덴마크 화폐 속 인물
덴마크 국민 뮤즈, 하이베르

 

 

1997년 덴마크에서 발행된 200크로네 지폐 속에 등장하는 요한네 루이제 하이베르 Johanne Luise Heiberg. 19세기의 명배우였던 그녀는 살아서 사랑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았고, 죽어서도 덴마크인들의 기억 속에 영원한 뮤즈로 남은 여인이다. 1812년 코펜하겐의 기품 있는 유대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요한네 루이제 포체는 아홉 명의 아이 가운데 여덟째였다.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녀는 여덟 살에 덴마크 왕립 극장의 발레 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수업을 받기 시작, 곧 아역을 필요로 하는 작품에 출연하게 된다. 1826년 <한스와 트리네 Hans and Trine>라는 작품에 출연하던 어느 날 저녁, 당시 극장에는 덴마크 문화계의 명망 있는 인사이자 작가인 요한 루드비그 하이베르 Johan Ludvig Heiberg가 와 있었다.


운명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열네 살 소녀의 눈부신 재능을 단박에 알아차린 그는 <4월의 바보>라는 희가극을 쓰며 그녀를 염두에 둔 트리네라는 역을 만들고, 이 작품에 ‘요한네 루이제 하이베르를 위하여’라는 헌사까지 붙였다. 단 한 번의 만남에서 운명의 여인을 낙점한 셈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발레를 그만두고 연기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5년 후, 스물한 살이나 연상인 요한 루드비그와 결혼해 하이베르라는 성 姓을 가지게 된다.


그녀가 활발하게 연극 무대에 올랐던 19세기는 덴마크 낭만주의의 황금기였다. 고전주의에 대항해 감성을 중시하고 풍성한 공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 경향이 북구 특유의 몽환적인 색채와 맞아떨어진 시대에 활약한 그녀는 재능과 행운을 함께 거머쥔 만인의 연인이었다. 개성이 강한 캐릭터에서 섬세한 감성을 가진 역할까지, 무대에 설 때마다 변신을 거듭하며 찬사를 받았다. 1848년 헨리크 헤르츠 Henrik Hertz의 <니논 Ninon>에서 맡았던 미카엘 뷔헤 Mikael Wiehe 역은 덴마크 드라마 역사의 전설로 남아 있다. 남편의 작품에 영감을 주는 뮤즈였지만, 많은 극작가들이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어 했고, 그녀를 흠모하며 작품을 썼다. 하지만 그녀는 연기에 한창 물이 오른 1840년 남편이 죽자 <요정의 언덕 Elves’ Hill>의 엘리자베스 Elisabeth 역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은퇴한다. 그녀의 나이 28세, 그때까지 약 275가지 역할로 끝없이 변신해 온 무대 인생이었다. 은퇴 후에는 연출가로, 극장 매니저로 활약했고 자서전 <돌아본 삶 A Life Recollected>을 저술한 그녀는, 1890년 남편의 뒤를 따라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이라크 화폐 속 인물
파란만장했던 영욕의 삶, 후세인

 

그의 근황이란 것은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는 이라크 전쟁의 괴수로 처형 받았다.

그의 시신이 공개되었고, 그가 사라졌지만 이라크에 아직 평화는 오지 않았다.

그는 오래된 지폐 위에 그의 초상만이 남아 있다.

 

그가 죽기전 숨가뿐 운명의 시간들이 눈을 끈다. 지난해 3월 1일 독일 일간지 <빌트 Bild>는 후세인이 내년 초 철창에 갇혀 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 타전했다. 그 내용이 기막히다. 현재 미군은 후세인을 세울 특수 철창을 제작 중인데, 법정은 바그다드에 있는 후세인의 옛 궁전이 될 전망이다. 호화롭고 방탕한 삶을 영위했던 바로 그곳에서 후세인은 목숨을 저당 잡힌 채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최후의 심판’의 죄인처럼 치욕스럽게 생명을 구걸하게 된다. <빌트>는 재판 시 후세인이 철저한 보안 장치가 장착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재판장에 마련된 철장 안으로 이동할 것이며, 그 철장은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살인마 한니발 렉터가 갇혀 있던 철장을 연상케 한다고 전했다. 재판 기간 동안 후세인은 음습하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지내야 하며, 이라크 검찰은 그에게 사형을 구형할 것이라 하니, ‘인간 만사 새옹지마’라는 농축적인 한 문장으로도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온전히 비유되지 않는다.


종말이 이토록 비참할 줄 알았더라면 후세인은 이라크의 모든 지폐에 제우스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한 초상화를 넣지 않았을 것이다. 후세인은 1993년 250디나르짜리 지폐에 처음 자신의 얼굴을 넣기 시작해 이후 10여 년간 발행된 모든 화폐에 자신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 하지만 화폐는 마치 자신의 비용으로 출간한 출판물처럼, 온당한 가치를 갖지 못했다. 미국과 전쟁 중이던 1995년에 국회 날치기법 통과시키듯 화폐가 대량으로 쏟아졌고, 1디나르는 0.5원도 채 되지 않는 환율로 거래 되었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10달러만 환전해도 무려 70장이 넘는 250디나르를 받았다.


후세인은 투철한 민족주의자였지만 동시에 무모한 독재자였다. 대통령으로서 그의 원대한 꿈은 이라크를 이집트를 대신하는 아랍 세계의 지도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석유 수익을 통해 국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하려 했고, 미국과 타협하지 않는 자생적인 국가 경제 체제를 수립하려 했다. 다만, 그 방법이 적절치 못했다. 1990년 쿠웨이트를 기습 점령했으며, 대규모 비밀 경찰과 공화국 수비대까지 창설해 24년간이나 잔혹한 유혈 독재 통치를 실시했다. 하지만 후세인 정권을 탄생시킨 배경에 혁혁한 미국의 공이 있었음을 안다면 전적으로 그를 미치광이라 매도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아는가. 미국은 한때 막강한 힘을 휘둘렀던 구 소련의 견제 세력으로 후세인을 전폭 지지했음을.

베트남 화폐 속 인물
시대를 넘어선 희망, 호치민

 

“한 사람의 정치 지도자를 잃은 애도의 눈물이 아니다. 슬픔을 꾹 참고 흘리는 눈물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자고 외치던 자상한 ‘호 아저씨’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다.” 1969년 9월, 미국 CBS 방송은 수십억원에 이르는 상업 광고를 빼고 7분간 한 인물의 사망에 대해 집중 보도했다. 베트남의 모든 화폐에 그려져 늘 베트남 국민에게 기억되는 베트남의 국부, 체 게바라가 존경한 위대한 혁명가 호치민의 위대한 죽음이었다.

 

 우리에게 호치민은 친근한 인물이 아니다. 그의 사상적 기반이 공산주의인 탓도 있지만, 미국의 전쟁을 도와 우리도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베트남 전쟁의 적군 우두머리가 바로 호치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의 역사를 자국 중심이라 비난하듯, 우리 역시 그동안 베트남의 역사를 자국 중심으로 이해한 면이 많다. 단지 적의 수괴로서 호치민을 생각한다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인물이지만,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는 국가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하자고 강변했던 백범 김구 선생과 많이 닮아 있다.


20세기 초 베트남은 끊임없는 농민 소요와 중국에 의한 경제 착취, 서구 열강의 침탈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외국에서 떠돌며 국가의 존망을 지켜보던 호치민은 외국 생활을 접고 조국으로 돌아와 1941년까지 30년 동안 지하운동과 망명 생활을 거듭하면서 강대국의 식민지 경영으로부터 베트남을 독립시킨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수탈을 목적으로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1954년 프랑스가 호치민의 군대에 대패하자 마침내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열강의 총공세가 시작된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결국 협상으로 종전되기는 했으나, 오늘날 역사는 이 전쟁을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손을 잡은 연합군에 맞서 조국의 명운과 민족을 지켜낸 호치민 군대의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계란으로 바위를 깨드린 격이 되어버린 이 놀라운 승리는 식민 통치 아래에서 패배감과 상실감에 빠져 있던 베트남 국민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갖게 만들었다. 오랜 전쟁에서 지친 국민을 독려하며 마지막까지 투쟁을 이끈 호치민의 궁극적인 목적도 바로 이 같은 민족적 자긍심의 회복이었다. 오랫동안 서구의 경제 장막에 소외되어 있었음에도 오늘날 베트남의 경제와 국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 근원에는 분명 호치민이 베트남 국민에게 준 위대한 선물, 베트남 민족의 힘과 자긍심이 자리하고 있다. 조국 독립의 영웅 호치민은 이제 베트남 화폐 속에서 국민들에게 또 다른 희망과 용기를 외친다. 세계와의 경제 전쟁에서도 베트남은 승리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