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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흑인폭동의 진실 그리고 미국의 지배자

Joyfule 2006. 9. 2. 01:08

LA 흑인폭동의 진실 그리고 미국의 지배자


우리 한국교포 상인들이 미국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빚어졌던 갖가지 어려움 중에서 가장 크고 힘들었던 것은, 첫째 미국 내 기득권을 갖고 있던 유대상인들의 횡포를 극복하는 것이었고, 다음은 고객들로부터 유대인 상인 취급을 받는 일이었다.

그간 유대상인들이 지구촌의 상권을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사회에서 유대상인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기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상가가 밀집한 지역에서 주말만 되면 꼬박꼬박 집세를 받으러 오는 대부분의 노인들이 저들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에는 그저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에 처음 도착한 우리 한국교포들이 누구나 한번쯤 반문해 보는 것 중에는 ‘도대체 미국에는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살기에 구석구석의 상권을 다 잡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다. 그만큼 저들 유대인의 손길은 남의 집 처마 밑에 있는 하찮은 구멍가게까지 뻗어 있다.

사실 우리 한국의 이민 초년병들이 어느 정도 유대인을 식별하고 그들의 행동 반경을 파악할 때쯤이 되면, 그는 이미 미국생활에 익숙해졌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처럼 한국의 이주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저들 유대인은, 지난 ‘60, ’70년대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각국으로부터 가난한 이민행렬이 몰려오기 직전까지, 미국의 조그마한 야채가게나 세탁소, 주유소등의 대부분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국을 비롯한 외국의 이주자들이 들어와 가게 세를 넉넉히 주게되자, 저들 영세한 유대인은 현역에서 물러나 집세만 챙기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가게의 주인만 바뀌었을 뿐, 매일 매일 똑같은 물건을 구입하는데 불편을 느끼지 않았던 미국의 소비자들은 그것이 유대인의 가게이든 한국인의 가게이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로부터 가게의 명칭은 여전히 유대인 가게라고 불리게 되었다.

분명 가게 주인은 엄연히 한국인으로 바뀌었지만, 흑인이나 히스패닉계의 소비자들의 입에 한번 익숙해진 버릇을 고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소비자들은 한국인 주인을 보아도 그저 피부색이 조금 다른 유대인이겠거니 하는 정도로 간단히 치부하고 넘어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큰문제로 번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지난 1992년, 로스앤젤레스의 한인상가를 둘러싸고 일어난 흑인 폭동은 그간 미국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흑백갈등과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 그간 유대인과 한국인 상인들의 불분명한 구분이 한국인 가게가 집중공격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국내의 소수민족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흑인이나 히스패낵 계의 사람들은 미국내 백인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피해의식과 함께 그들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빈민층에 속하는 흑인들이 미국의 지배자인 유대인들에 대해 품은 감정은 마치 적국의 국민을 대하는 것과 흡사하다.

이 같은 흑인들의 폭동현장에는 으레 <인종차별 철폐>라는 구호와 함께,

<유대인은 물러가라!>는 말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흑인들이 몰려가 정작 물리적으로 행동을 보일 수 있는 곳은, 이미 유대인들이 떠나간 곳에 자리잡은 한국인 가게가 밀집한 지역이었다. 이미 성난 폭도로 돌변한 흑인들에게 이곳의 주인은 한국인이라고 아무리 강조하여 보았자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처럼 LA 흑인폭동 당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우리 교민들이 아직까지도 가장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은, 폭동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는데, 애매하게 우리 교민들만 습격을 당하여 인명과 막대한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미국의 언론이나 지방정부로부터 철저하게 ‘한, 흑 갈등’ 으로 왜곡되어 조명되어졌다는 점이다.

또 하나 우리 교포 사업가들이 미국사회에서 넘기 힘들었던 벽은 유대인 상권의 그물을 어떻게 뚫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J씨는 맨 손으로 미국에 건너와 이곳 저곳을 떠돌며 막노동으로 약간의 돈을 모으고 이제는 어느 정도 미국생활에도 적응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정말로 사업다운 사업을 해 보고 싶었다.

그는 우선 세계의 모든인종이 다 모여든다는 뉴욕에 자리를 잡고, 한국과 동남아 등지에서 만들어지는 봉제완구를 수입하여 팔아볼 결심을 하고, 그곳의 봉제품 수입업자들과 유통업체들을 만나보고는 그 상인들이 한결같이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일단 마음먹은 일이라 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사업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고, 유대인 수입업자들은 J씨에게 유통마진을 줄이라고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해 왔다는 것이다. J씨는 하는 수 없이 이윤폭을 최대로 줄일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유대인 수입업자의 이익만을 챙겨주는 꼴이 되었고, J씨는 자신의 가게 운영비조차 건지기도 빠듯하였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J씨는 저들 유대인을 위해 장사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직접 봉제품을 만들어서 팔아볼 작정으로 봉제원단을 취급하는 몇 군데 재료 상을 찾아가 보았더니, 그곳 가게 주인들 역시 대부분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에 또 다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J씨는 겨우 겨우 제품을 만들어 팔 수 있는 공원이나, 유원지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이런 장소의 목 좋은 곳 역시 이미 유대인 토박이들이 점령하여 꼬박 꼬박 자릿세를 챙기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한국인의 해외 이주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만행을 피하여 만주나 중국, 러시아 등지로 숨어든 애국지사들을 비롯하여, 일본의 강제징용에 의해 미국의 하와이나 중남미 등지로 끌려가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미국이라는 낯선 대륙에 우리 한국인의 교민사가 시작된 것은 한세기 전의 일이고,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본격적으로 이주행렬이 시작된 것은 지난 60, 70년대부터이다.

이 같은 우리 교민들이 미국사회에서 오늘의 작은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인종적,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숱한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민들은 고객들로부터 유대상인으로 오해를 받아야 했고, 정작 유대상인들로부터는 조직화된 텃세와 횡포를 온몸으로 막아내어야 했었다.

출처 :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