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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 承 晩)

Joyfule 2012. 6. 27. 15:03

 

이승만(李 承 晩)

도미 유학 (1906 ~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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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의 이승만

1909년의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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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대학원생 기숙사의 탑을 그린 유화. 이승만 전 대통령도 이 기숙사에서 묵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哲學)을 공부하였다. 1907년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M.A) 학위를, 그리고 1910년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12] 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1908년 덴버의 감리교회에서 열린 애국동지회에 참석하였다. 그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오클랜드기차역에서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 장인환의거에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예수교인으로 살인자들의 통역을 원치 않는다'며 법정 통역을 거절했다.[13] 당시 이승만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인들의 여론반응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통역을 거부했던것이다.

두명의 한국인이 루스벨트대통령의 친구인 스티븐스를 사살하였다. 이 살해사건은 일본의 선전기관들이 한국사람들은 흉도이며, 최악의 악당이라고 묘사하는데 대대적으로 이용되었다.
-이승만 자서전 초고문서 내용中.-

이듬해 1909년,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하였을때도 이승만의 반응은 미국여론을 살펴보면서 미국 여론의 악화를 걱정했었다.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정치가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렇게되자, 미국 각종 언론 신문에는 '한국인들은 잔인한 살인마이며 무지몽매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자주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한국인인 나와 이야기하는것을 두려워했었고, 교수들은 나를 무서워해서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 자서전 초고문서 내용中.-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yng-Man Rhee, 또는 승만 리). 당시 박사(博士)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08년 8월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沿海州)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였다.[14]

귀국과 재망명

귀국과 선교 활동 (1910 ~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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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의 이승만

1910년 3월 국민회에 가입했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5]:248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당시 들어온 신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라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12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출처 필요]

미국 네브라스카에서 이승만은 옥중 동지인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둘 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15]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그해 8월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어 한인기독학원(KIC)의 원장도 겸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어한문을 새로 가르치고, 뒤에 학교 이름도 '한인기독학원'에서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재단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3]

하와이 정착과 국민회 분열 (1914~1918)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감리교 부속의 한인중앙학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육 활동과 실력운동 양성에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감리교에 서 설립한 한인기숙학교를 '한인중앙학원'이라 고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미국인 감리교 감리사가 이승만의 민족교육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승만은 반발하고 학원장직을 사임, 새로운 학원을 세웠다. 그는 태극기를 걸어놓고 민족교육에 열중했다. 이승만은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하고 교회 안에서 어린이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기도 했다.[16]

그리고 '태평양 잡지'를 창간해 '청일전기' 등의 홍보물을 간행하는 등 언론 출판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학생과 후원자들은 뒷날 이승만 계열 또는 후원자가 되어 하나의 파벌을 이루었고, 뒷날 대한인 동지회로 발전하게 된다.[16]

한편, 이무렵 1914년 박용만국민군단을 창설했고 군사력을 양성코자 했으나 이승만은 무장투쟁에 반기를 들었고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중시했으므로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1915년 6월 17일 스타불레틴 신문에 기고하여 자신은 어떠한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으며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르치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지역 일본인 신문들이 자신이 반일감정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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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 기차역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이승만(왼쪽)과 박용만. 한때 결의형제를 할 만큼 일생의 동지였던 두 사람은 독립운동 방법론과 국민회기금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결국 정적이 되고 말았다.[18]

 

하와이 한인들은 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였고 국민회는 당시 최대 인력과 자금력을 가진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승만은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내역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고 국민회측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은 오래 지속되었고 테러, 폭동이 일어났다.하와이 법원에는 이승만과 관련된 소송이 10여건 벌어졌다. 당시 로베르타 장이 수집한 재미한인 교포들의 인터뷰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반수 이상은 이승만이 한인사회에서 위험한 인물이라고 기억했으며 이승만의 조직원에 의한 암살 시도 증언도 있다.[15]

 

감리교교단과 수시로 마찰을 빚어오던 중 1915년 6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을 미국 감리교 선교부 통제하로부터 독립시켰다.

1917년 이승만은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과거 옥중에서 쓴 저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그해 10월 29일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 민족대표자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3]

 

1918년 7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수립된 '신립교회' 예배당 헌당에 참여하였고, 9월 '한인여자성경학원' 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 으로 바꾸었다. 12월 1일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3] 12월 23일 '신립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교회를 분열시켰으며 헤이즐 정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은 이승만의 교회 아니면 감리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15]

 

1918년 박용만은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신한민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국민군단을 비난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하자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15]

 

1918년 11월 독일이 일단 항복함으로서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19] 서재필 역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이승만 박사,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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