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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 承 晩)

Joyfule 2012. 6. 29. 09:27

 

이승만(李 承 晩) 

1930년대에서 40년대 초

[편집] 외교 홍보 활동 (1930 ~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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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때 이승만.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김구는 재중 한인 동포들과 교민단체의 후원금과 성금 모금에 의존하는 한편 1928년 이후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도 자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은 자신도 처지가 어렵다고 거절하면서도 자금의 일부를 임시정부에 꾸준히 송금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의사가 폭탄투척해 의거를 일으켰을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윤봉길 의사 의거에 비판하였다.

이런(의거)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선동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이승만 자서전 내용中[32]

이봉창·윤봉길 의거 이후 임정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국민대표자대회 이후 임정의 반이승만 세력이 사라지면서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또한 한국인 교민들로부터 성금을 모금하여 상하이임정으로 송금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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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

1932년 11월 10일,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33] 1932년 12월 미국을 출발, 리버풀, 런던, 파리 등을 경유하여 1933년 1월 26일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1933년 국제연맹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대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5]:63 1933년 1월 26일 프랑스어 일간신문 《주르날 드 제네바》지와 인터뷰하였고,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33] 2월 8일 그는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공한(公翰)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하였고, 2월 16일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통해 극동분쟁과 한국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33] 1933년 2월 21일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 식당에서 오스트리아 처녀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양을 만났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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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과 함께 찍은 사진

2월 22일 제네바의 프랑스어 신문《라 트리뷴 도리앙》지에 그의 독립운동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고, 2월 23일 베른의 독일어 신문 《데어 분트》도 활동 상황이 실렸다.[33] 7월 9일 스위스 제네바를 출발, 7월 20일 소비에트 연방으로 건너가 소련에게 한국의 독립에 대한 도움을 호소하고자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하였으나(비엔나 경유) 즉시 쫓겨났다.[33] 8월 10일부터 8월 16일 프랑스 니스를 출발하여 미국 뉴욕 주에 도착했고, 그해 10월하와이 호놀룰루로 되돌아왔다.[33]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33]

[편집] 임정 외교위원, 국무위원 선임 (1934 ~1939)

1933년 11월 이승만은 이동녕 내각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임정 일각의 반대에도 외교 활동을 위한 그의 역할이 크다는 이동녕, 김구 등의 주장에 의해서였다.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33]

1934년 4월 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행서규정을 공포하여 외무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위원을 선임할 때, 조소앙·최동오·이승만·신익희외교위원으로 선임하였다.[34] 1934년 7월 22일 미국 국무부의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와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9월 16일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 주의 뷰트를 방문하였다. 이는 《몬태나 스탠다드》지가 기사로 게재하였다.[33] 1394년 9월 20일부터 10월 8일 사이 뉴욕 주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다. 1935 1월 24일 프란체스카 도너 부인과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으며,「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33] 9월 20일 뉴욕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고, 10월 8일까지 신혼기간을 보냈다. 백인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신혼 초기부터 프란체스카 도너는 한인 지도자의 외국인 신부를 탐탁치 않게 여긴 한인 교포들에 의해 '호주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주댁[35]이 뭐냐는 질문에 이승만은 좋은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1935년 1월 24일 부인과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 시에 도착, 《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1937년 임시정부 외교위원에 선출되었다.

1938년 4월 24일 하와이 주 호놀룰루 시 릴리하 가(街)에 '한인기독교회' 건물을 낙성하였고.[33] 1939년 3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이 보이자 워싱턴D.C에서 구미위원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호놀룰루로 돌아왔다. 8월 30일 한국인과 중국인이 국제정세에 대해 몽매한 것을 한탄하며 한국의 독립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강조하는 편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김구에게 발송하였다. 이어 12월 10일 《워싱턴포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렸고[33], 이는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로 보도되었다. 1939년 조선에 입국하여 경성부 YMCA 강당에서 강연을 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경찰을 파견하여 이승만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그는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비호를 받았고, 선교사들에 의해 빼돌려져 체포를 면하고 부산항을 거쳐 다시 하와이로 되돌아왔다.

태평양 전쟁 전후 (1940 ~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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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에 이승만이 출판한 《일본을 벗기다》(Japan Inside out). 이 책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실상을 낱낱히 비난하는 내용으로 향후 미국은 일본과 장차 전쟁을 하게 될 것임을 예견했다. 이 책 발간 6개월 후인 1941년 12월, 실제로 진주만 공격을 받은 미국에서는 커다란 관심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군 장교들의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1940년 3월 김구가 주석으로 취임한 후, 6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다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승인받았다. 6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태평양 제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 미국 침략을 경고한 '일본을 벗기다'를 출간하였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겪은 미국인에게 일본의 침략을 사전 경고한 이승만의 '일본을 벗기다'는 이후 진주만 공격 이후 큰 설득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이 책은 대지의 저자 펄벅에게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들었다.[36]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미국일본이 전쟁상태로 들어간 직후 이승만은 일본의 패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국이 되어야 하므로 미국은 중경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299 12월 9일 미국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을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을 전달받은 뒤, 동 12월 9일 미국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 대통령 루즈벨트, 국무장관 코델 헐 등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公翰)을 전달하였다.

소련의 한국 점령을 우려하던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미국 국무부와 빈번히 접촉하였다. 1942년 1월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5]:99 1942년 1월 2일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와 면담하였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국무부를 방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의 혼벡히스는 현 시점에서 한국의 독립정부를 승인한다면 소련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고, 소련이 대일본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할 수도 없지만 소련의 관심 또는 이권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승만의 임시정부 승인요청을 거절하였다.[5]:299 1월 16일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인들과 함께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창설,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미국의회 상원 원목인 프레데릭 해리스(이사장), 전 캐나다 대사 제임스 크롬웰(회장),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 변호사 존 스태거즈 등을 중심인물로 선출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승인 운동 (1942 ~ 1944)

1942년 2월 27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자신의 신임장과 임시정부의 공한을 제출하였다.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 D.C의 라파옛 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개최.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의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 주최하였다. 행사 참석 후, 3월 23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을 찾아가 임정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그 뒤에도 계속 미국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5]:299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는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조약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 한국사람들의 대일본 전쟁에서의 공헌 가능성 등을 설득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임시정부 승인이 불가능한 이유를 여러가지를 들면서 반대하여 양자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5]:299

3월 30일 미국 육군장관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냄. 육군장관으로부터 다르게 취급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5월 15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극동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상기시키고 임정 즉각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 발송하였으며, 8월 23일 캐나다에서 열린 제1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그해 8월 이승만은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종교적 후원단체인 기독교인친안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한국 의료선교사 애비슨, 아메리칸대학 총장 폴 더글러스 등을 중심인물로 내세웠으며, 이후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43년초 이승만은 미국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요구하였다.[37]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그해 12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인동지회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12월 19일부터 12월 22일 가이 질레트 미국 상원의원으로부터 임정 승인이 불가능하다는 서한을 받자, 몇 몇 동지들과 함께 항의 방문하였다.

1944년 7월,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 체신청이 태극마크가 들어있는 우표를 공식 발행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44년 10월 18일 미국 체류 중인 이승만은 중국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영문으로 편지를 발송, 1944년 11월에 미국정부한국인의 대일항전을 기념하기 위해 5센트짜리 태극우표를 발행한다는 내용을 통지했다. 11월 미국 체신청에서 태극우표를 발행하자 이승만은 한국독립미국이 지지한다는 증명으로 태극마크를 도안하여 우표를 발행하였다는 사실을 알렸고, 발행된 태극우표 3점을 동봉하여 충칭 임시정부로 발송해주었다.

[편집] 항일단파방송 선전활동
16px-Crystal_Clear_app_xmag.svg.png 단파 방송 밀청 사건, 미국의 소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미국의 소리는 미국 정부가 전 세계의 청취자를 향해 방송운영하는 국제방송을 말하는데, 이승만은 6월-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29일 처음 방송되었는데, 8월 29일 이승만의 제안으로 첫 방송을 시작했었다. 당시 미국의 소리방송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쟁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었다.

일제 강점기시대, 1942년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듣곤했는데, 여기서 이승만이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 라디오로 통해 미국 워싱턴 D.C로 부터 '일제는 전쟁에 패하고 있다. 우리 임시정부는 미국의 승인을 얻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할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우리가 독립을 위해 건국을 준비하여야 하며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에 영원할 것이다.'는 주 내용으로 한반도에 소식을 전하였던 사건이었다.[38] 당시 이 라디오 단파방송을 들었던 이들은 극히 소수였는데, 이는 밀청했던 사람들로부터 입으로 전래되고 알려지게 되어 훗날 국내에서 이승만에 대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전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로 지냈던 문제안의 증언에 의하면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은 힘은 많지 않지만, 아주 막연하게 저 하늘에 있는 구름 같이 먼 데 아주 알 수 없는 곳인데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려고 하는 우리를 지켜려는 누군가가 있다. 이런것을 아주 가냘픈 희망이 있지만 그런 마음이 있었다.'라고 증언하였다.[39][40]

이때 워싱턴에서 항일단파방송을 하였던 이승만의 공식직함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었다.

이 항일단파방송을 몰래 밀청하다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 잡혀간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는데, 이들 증언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라고 한다.

이승만의 항일단파방송 육성원본은 오늘날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OSS 지원 요청

임정한국광복군의 특수훈련을 계획하고 미국국무성의 협조를 기대한다. 임정의 연락을 받은 이승만은 미국국무성국방성과 교류하며 임정광복군미국 OSS의 합동훈련을 중개하게 된다.

1942년 5월 5일 이승만의 미국내 후원조직인 '한미협의회' 회장 제임스 크롬웰이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임정 승인을 촉구하였고, 42년 9월 30일 이승만은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의 로센봄 중위, 국무부 차관보실의 로스토우 등을 만나 중국내 한국인 게릴라 부대 조직의 후원 문제를 협의하였다. 10월 10일 다시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를 찾아 프레스톤 굳펠로우 대령에게 항일 게릴라 조직 제의. 10월 미국육군전략사무처의 협조를 얻어낸 뒤, 임정에 이를 통보하고 임정으로부터 한국인 선발요원 50명의 명단을 OSS에 통보하였다. 1942년 12월 4일 12명의 한인이 선발되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12월 7일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12월 31일부터 1943년 2월 16일까지 이승만은 계속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이 만나 주지 않자, 편지로 만약 미국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 한반도에 친소련 공산정권이 수립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1943년 2월 17일 미국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편지를 보내, 항일 게릴라 조직계획서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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