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본능 - 김규련
동해안 백암온천에서 구슬령(珠嶺)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고추, 담배로 이름난 영양(英陽) 수비(首比)면이다.
대구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한다. 이 고을 어귀에는 갑작스레 높고 가파른 재가 있다. 이 재에 오르면 바로 고을수(樹)가 있고 민가가 취락해 있다. 이 재를 한팃재라 한다. 이 한팃재를 분수령으로 마을쪽에 떨어지는 빗물은 왕피천(王避川)을 이뤄 성류굴(聖留窟) 앞을 지나 동해에 이른다. 재 밖으로 빗나간 빗물은 낙동강을 따라 남해로 흐른다. 어쩌다 나그네가 이 고을을 찾게 되면 그 우람한 태백산맥의 산세며 깊은 계곡, 울창한 숲이며 맑은 공기, 깨끗한 물을 보고 우선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발길을 돌려 그냥 되돌아간다면, 그는 무궁한 산정(山情)의 애무를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없으리라.
왕피천으로 흐르는 석간수를 따라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를 한나절쯤 걸어가면 화전민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마을이라고는 하나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알 까닭이 없다. 어쩌면 이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 절벽이며,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될 자연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기 때문일까.
이들의 주된 생업은 고추와 담배농사이다. 철따라 산채며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들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의 큰 부업이다. 그러나 어쩌면 바보가 아니면 달관한 사람만이 살 수 있는 첩첩산중의 이 수하(水下) 마을.
어느 해 봄, 이 마을에 뜻밖의 황새 한 쌍이 날아 들어왔다. 서식처도 아닌 이 산골에, 산비둘기가 아니면 부엉이나 매 같은 산새들만 보아 온 이 마을 사람들 눈에는 황새가 신기했다. 희고 큰 날개를 여유있게 휠휠 흔들며 노송 위를 짝을 지어 유유히 날아다니는 품이 정말 대견스러웠다. 기나긴 늦은 봄 오후, 뻐꾸기 울음소리가 빗물처럼 쏟아질 때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숨을 돌린다. 이럴 때 이들의 화제는 개울가에 먹이를 찾아 서성거리고 있는 황새에 쏠린다. 붉은 주둥이와 긴 목, 새하얀 털로 덮인 날개 밑에 쭉 뻗어내린 검붉은 두 다리, 황새의 자태는 과연 군자의 모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황새가 길조라고 믿고, 그들은 모두 무엇인가 막연한 기대에 부풀곤 했다. 그러나 변이 생겼다. 낙엽이 질 무렵 어느 날 아침, 이 마을을 지나가던 밀렵꾼이 황새를 보고 총을 쏜 것이다. 놀란 마을 사람들은 아침을 먹다 말고 황새 둥우리가 있는 노송숲으로 뛰어나왔다. 밀렵꾼은 도망가고 황새 한 마리가 선지피를 흘리며 마른 억새풀 위에 쓰러져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 짝은 어디론가 날아가버리고 없다. 그 밀렵꾼에게는 황새가 박제 표본감이나 아니면 돈으로 보였을까. 마을 사람들의 분노와 원성은 여간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황새가 죽지는 않았다. 한 쪽 날개가 못 쓰게 될 만큼 다쳤던 것이다.
어질고 소박한 마을 사람들은 그 황새를 안고 와서 온갖 정성을 다해 치료를 했다. 그리고 날개 상처가 아물고 힘을 되찾을 때까지 그 황새를 물방앗간 옆뜰 소나무 밑에 갖다 두고 보호하기로 했다. 이들은 그날로 둥우리도 만들고 모이그릇도 마련했다. 그러나 황새는 쓰러져 움직이질 못했다.
그날 밤, 구장집 사랑에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밤이 이슥하도록 황새를 살려 볼 궁리들을 했다. 그리고 밀렵꾼을 저주하다가, 드디어 인간의 잔악한 일면을 저마다 나름대로 뉘우쳐 보기도 했다.
밤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지창에 갈잎이 날려와 부딪친다. 그런데 귀에 설은 애달픈 새의 울음소리.
끼룩끼룩 끼 끼룩 끼루루.
가슴을 깎는 처절한 이 울음소리를 듣고 모두들 말없이 뜨락으로 나왔다. 가을 밤 하늘에 찬란한 별들. 그 별빛에 흰 깃을 번쩍이며 황새 한 마리가 물레방아 주위를 이리저리 애타게 날고 있는 것이 아닌가. 총소리에 놀라 도망갔던 황새가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황새는 이제 인간이 두려워서 쓰러져 누워 있는 자기 짝에게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진 마을 사람들은 자리를 피해 주려고 묵묵히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황새는 연신 목에 피가 맺히도록 울어댄다. 끼룩끼룩 끼 끼룩 끼루루. 그날 밤 화전민 후예들의 지붕 밑에 호롱불이 꺼지지 않았다.
이튿날 날이 밝자, 이들은 그 부상 당한 황새를 그들의 둥우리가 있던 노송 밑에 갖다 뒀다. 가련한 황새가 사람의 눈을 피하여 서로 어울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러던 며칠 뒤, 무서리가 몹시 내린 어느 날 아침 기이하고 처참한 변이 또 생겼다. 이들이 그렇게도 알뜰히 보살펴 온 그 한 쌍의 황새가 서로 목을 감고 싸늘하게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소문을 듣고 달려나온 마을 사람들은 이 슬픈 광경을 보자 갑자기 숙연해졌다. 그리고 저마다 무엇을 느꼈음인지 착잡한 심정으로 한참 말이 없었다. 황새도 영물일까. 산골의 날씨는 무섭게 추워지려는데 짝을 버리고 혼자 남쪽으로 갈 수 없었던 애절한 황새의 정, 조류(鳥類)에 따라서는 암수의 애정이 별스런 놈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그들의 본능이라 했다. 그러나 어쩐지 그들의 하찮은 본능이 오늘따라 인간의 종교보다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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